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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재위 태국 푸미폰 국왕 서거…애도의 물결
입력 2016.10.14 (11:10) 수정 2016.10.14 (21:59) 취재K
70년 재위 태국 푸미폰 국왕 서거…애도의 물결

[연관기사] ☞ [뉴스9] 푸미폰 국왕 서거…태국 권력 다툼 ‘촉각’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이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태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푸미폰 국왕은 특유의 검소함과 봉사활동으로 왕실의 귀감이 된 인물로 70년 동안 재위하며 태국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푸미폰 국왕은 누구

푸미폰 국왕은 1927년 프라차티폭 당시 국왕의 동생인 마히돈 왕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 마하돈 왕자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했기에 그의 출생지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다.

만 한 살이던 1928년 부친인 마히돈 왕자가 하버드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면서 그는 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1929년 부친이 사망하자 일가족은 1933년 스위스로 이주했고 푸미폰은 로잔대학교에서 물리학과 법학을 전공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가족과 함께 다시 태국으로 돌아갔다.

푸미폰은 1935년 형인 아난타 마히돈이 라마8세로 즉위했지만, 재위 11년 만인 1946년 총기 사고로 숨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초창기는 1932년 쿠데타로 차크리 왕가의 절대왕정이 무너진 상태라 실권은 물론 권위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왕가 인사와 일부 장군의 지지를 등에 업고 태국 전국 각지를 누비며 '살아있는 부처'로 태국인들의 존경을 받기 시작한다. 특히 왕실 재산을 털어 수력발전소 건설부터 황무지 개간, 농업기술 연구, 벽지 의료단 파견 등 다방면에 걸친 지역 개발사업을 벌이면서 푸미폰 국왕은 국민의 확고한 지지를 얻었다. 이 공로로 2006년 유엔에서 수여하는 ‘인간개발평생업적상’도 받았다.


이같은 국민의 지지는 즉위기간 동안 10여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나며 정권이 수시로 바뀌었지만, 푸미폰 국왕이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세력 입장에선 푸미폰 국왕의 승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푸미폰 국왕이 지지한 쿠데타는 성공하고 거부한 쿠데타는 실패했다.

1981년과 1985년 잇따라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푸미폰 국왕은 이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두 차례의 쿠데타 모두 실패로 끝났다. 2001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총리직에 올랐던 탁신 친나왓이 5년 만에 쿠데타로 실각한 것도 푸미폰 국왕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푸미폰 국왕의 권위는 92년 ‘검은 5월’ 사태에서 절정에 달했다. 1992년에는 쿠데타로 집권한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이 총리직에 오르자 이에 항의해 민주적 총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일어났다.

'피의 5월’이라 불리는 처절한 분쟁이 벌어지자 국왕은 수친다 총리와 시위대의 선봉에 선 잠롱 스리무앙 방콕시장을 왕실로 불러들였고, TV 카메라 앞에서 두 정치인을 무릎 꿇린 채 혼냈다. 수친다는 망명했고 새 헌법이 쓰였으며 문민정부가 수립됐는데 이는 정파를 초월하는 국왕의 권위를 여실히 보여 주는 장면으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에는 푸미폰 국왕의 존재로 인해 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논리가 강화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2006년 탁신 친나왓 총리와 2014년 탁신의 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를 축출한 후 군부는 과거 ‘조정자’역할을 했던 국왕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며 정당성을 확보했다. 푸미폰 국왕은 2014년 쿠데타를 주도한 프라윳 찬오차 장군을 총리에 임명하면서 사실상 쿠데타를 승인했다.


후임자는 누구

푸미폰 국왕은 1950년 시리킷 왕비와 결혼한 후 1남 3녀를 낳았다. 유일한 아들인 마하 와치랄롱꼰(64) 왕세자의 왕위 승계가 확실시되지만, 태국 왕세자로 즉위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와치랄롱꼰 왕세자가 "아버지를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고 CNN 등이 13일(현지시간) 보도했기 때문이다.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도 "매우 중요한 시기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활하게 할 필요가 있다"며 "왕세자는 국왕 후계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만, 태국 국민들과 함께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어 "모두가 이를 이해해주길 바라고, 혼돈이 없길 빈다"며 "왕세자가 적절한 시기에 국왕 선포를 할 수 있도록 법적 절차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와찌랄롱꼰 왕세자는 올해 64세로 지난 1972년 12월 28일 국왕 후계자로 지명됐다. 그러나 대부분 삶을 태국이 아닌 해외에서 보낸데다 각종 구설수로 국민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지 않다.

더욱이 2014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해 왕실 수호세력을 자임하고 있는 프라윳 총리는 와찌랄롱꼰 왕세자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가까운 세력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왕세자가 순조롭게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각국 애도 성명

푸미폰 국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국 지도자들도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나는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전하의 서거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애도의 뜻을 태국 국민과 시리키트 태국 왕비, 그리고 (국왕 부부의) 자녀와 손자녀들에게 전한다"고 밝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의 서거와 관련해 태국 국민에게 깊은 위로를 전달하고 푸미폰 국왕이 남긴 업적을 기렸다.

반 총장은 푸미폰 국왕이 서거한 직후 대변인실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먼저 푸미폰 국왕의 서거로 말미암아 큰 슬픔에 빠진 태국 국민과 태국 정부, 그리고 왕실에 깊은 위로를 전했다.

중국 외무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으며, 국가의 안정과 발전에 놀랄만한 기여를 했다”며 조의를 표했다.

테레사 메이 영국총리도 성명을 통해 “푸미폰 국왕의 서거에 대해 태국 왕실과 국민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 푸미폰 국왕은 평생 태국을 위엄과 헌신, 비전으로 이끌었다”고 조의를 표명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는 "태국 국민들에 대한 정신적 지주로서 푸미폰 국왕은 놀랄만한 태국의 경제 발전과 국민 생활 수준의 개선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 70년 재위 태국 푸미폰 국왕 서거…애도의 물결
    • 입력 2016.10.14 (11:10)
    • 수정 2016.10.14 (21:59)
    취재K
70년 재위 태국 푸미폰 국왕 서거…애도의 물결

[연관기사] ☞ [뉴스9] 푸미폰 국왕 서거…태국 권력 다툼 ‘촉각’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이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태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푸미폰 국왕은 특유의 검소함과 봉사활동으로 왕실의 귀감이 된 인물로 70년 동안 재위하며 태국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푸미폰 국왕은 누구

푸미폰 국왕은 1927년 프라차티폭 당시 국왕의 동생인 마히돈 왕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 마하돈 왕자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했기에 그의 출생지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다.

만 한 살이던 1928년 부친인 마히돈 왕자가 하버드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면서 그는 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1929년 부친이 사망하자 일가족은 1933년 스위스로 이주했고 푸미폰은 로잔대학교에서 물리학과 법학을 전공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가족과 함께 다시 태국으로 돌아갔다.

푸미폰은 1935년 형인 아난타 마히돈이 라마8세로 즉위했지만, 재위 11년 만인 1946년 총기 사고로 숨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초창기는 1932년 쿠데타로 차크리 왕가의 절대왕정이 무너진 상태라 실권은 물론 권위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왕가 인사와 일부 장군의 지지를 등에 업고 태국 전국 각지를 누비며 '살아있는 부처'로 태국인들의 존경을 받기 시작한다. 특히 왕실 재산을 털어 수력발전소 건설부터 황무지 개간, 농업기술 연구, 벽지 의료단 파견 등 다방면에 걸친 지역 개발사업을 벌이면서 푸미폰 국왕은 국민의 확고한 지지를 얻었다. 이 공로로 2006년 유엔에서 수여하는 ‘인간개발평생업적상’도 받았다.


이같은 국민의 지지는 즉위기간 동안 10여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나며 정권이 수시로 바뀌었지만, 푸미폰 국왕이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세력 입장에선 푸미폰 국왕의 승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푸미폰 국왕이 지지한 쿠데타는 성공하고 거부한 쿠데타는 실패했다.

1981년과 1985년 잇따라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푸미폰 국왕은 이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두 차례의 쿠데타 모두 실패로 끝났다. 2001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총리직에 올랐던 탁신 친나왓이 5년 만에 쿠데타로 실각한 것도 푸미폰 국왕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푸미폰 국왕의 권위는 92년 ‘검은 5월’ 사태에서 절정에 달했다. 1992년에는 쿠데타로 집권한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이 총리직에 오르자 이에 항의해 민주적 총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일어났다.

'피의 5월’이라 불리는 처절한 분쟁이 벌어지자 국왕은 수친다 총리와 시위대의 선봉에 선 잠롱 스리무앙 방콕시장을 왕실로 불러들였고, TV 카메라 앞에서 두 정치인을 무릎 꿇린 채 혼냈다. 수친다는 망명했고 새 헌법이 쓰였으며 문민정부가 수립됐는데 이는 정파를 초월하는 국왕의 권위를 여실히 보여 주는 장면으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에는 푸미폰 국왕의 존재로 인해 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논리가 강화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2006년 탁신 친나왓 총리와 2014년 탁신의 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를 축출한 후 군부는 과거 ‘조정자’역할을 했던 국왕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며 정당성을 확보했다. 푸미폰 국왕은 2014년 쿠데타를 주도한 프라윳 찬오차 장군을 총리에 임명하면서 사실상 쿠데타를 승인했다.


후임자는 누구

푸미폰 국왕은 1950년 시리킷 왕비와 결혼한 후 1남 3녀를 낳았다. 유일한 아들인 마하 와치랄롱꼰(64) 왕세자의 왕위 승계가 확실시되지만, 태국 왕세자로 즉위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와치랄롱꼰 왕세자가 "아버지를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고 CNN 등이 13일(현지시간) 보도했기 때문이다.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도 "매우 중요한 시기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활하게 할 필요가 있다"며 "왕세자는 국왕 후계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만, 태국 국민들과 함께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어 "모두가 이를 이해해주길 바라고, 혼돈이 없길 빈다"며 "왕세자가 적절한 시기에 국왕 선포를 할 수 있도록 법적 절차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와찌랄롱꼰 왕세자는 올해 64세로 지난 1972년 12월 28일 국왕 후계자로 지명됐다. 그러나 대부분 삶을 태국이 아닌 해외에서 보낸데다 각종 구설수로 국민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지 않다.

더욱이 2014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해 왕실 수호세력을 자임하고 있는 프라윳 총리는 와찌랄롱꼰 왕세자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가까운 세력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왕세자가 순조롭게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각국 애도 성명

푸미폰 국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국 지도자들도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나는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전하의 서거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애도의 뜻을 태국 국민과 시리키트 태국 왕비, 그리고 (국왕 부부의) 자녀와 손자녀들에게 전한다"고 밝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의 서거와 관련해 태국 국민에게 깊은 위로를 전달하고 푸미폰 국왕이 남긴 업적을 기렸다.

반 총장은 푸미폰 국왕이 서거한 직후 대변인실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먼저 푸미폰 국왕의 서거로 말미암아 큰 슬픔에 빠진 태국 국민과 태국 정부, 그리고 왕실에 깊은 위로를 전했다.

중국 외무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으며, 국가의 안정과 발전에 놀랄만한 기여를 했다”며 조의를 표했다.

테레사 메이 영국총리도 성명을 통해 “푸미폰 국왕의 서거에 대해 태국 왕실과 국민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 푸미폰 국왕은 평생 태국을 위엄과 헌신, 비전으로 이끌었다”고 조의를 표명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는 "태국 국민들에 대한 정신적 지주로서 푸미폰 국왕은 놀랄만한 태국의 경제 발전과 국민 생활 수준의 개선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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