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대통령의 위로, 그러나…‘끝나지 않은 가습기 전쟁’

입력 2017.08.09 (11:26) 수정 2017.08.2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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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따듯한 위로.. 눈물 흘린 가습기 피해자들

문재인 대통령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은영 씨의 손을 잡았다. 문 대통령을 마주한 이은영 씨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씨는 무너지듯 고개를 숙였고 문 대통령은 등을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이 씨는 비강 섬유화를 앓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함께 7년째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억울함과 비통함, 국가에 대한 원망, 7년간 쌓였던 울분이 터져 나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씨는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애경이 만든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2011년부터 모자는 이유 없이 아팠다. 이 씨의 아들이 앓고 있는 비강 섬유화는 콧구멍이 딱딱하게 굳어져 숨을 제대로 못 쉬게 한다. 이 씨는 자신과 아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오랜 시간 고민했다. 가습기살균제의 사용이 아닌 다른 원인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씨와 이 씨의 아들이 받은 건 4급 판정이다. 4급은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피해가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을 때 내려지는 판정이다. 결국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이 씨 모자의 고통은 어제(지난 8일) 처음 주목을 받았다. 이 씨 모자가 국가에 대답을 요구한 지 6년 만이었다.

이 씨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많은 가습기살균자 피해자들이 이 씨와 같은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 지난 8일 오후 청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전쟁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일부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 위안을 얻을 무렵, 또 다른 피해자 윤미애 씨와 윤 씨의 남편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다. 8일 취재진과 만난 39세 주부 윤 씨는 오랜 투병생활로 비쩍 마른 몸에, 목에 남아있는 산소호흡기 삽관의 흔적이 아직 선명했다.

윤 씨와 윤 씨 가족은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옥시싹싹' 가습기살균제를 썼다. 결과는 참혹했다. 2007년 첫째를 잃고, 본인도 현재 폐섬유화로 기나긴 투병생활을 이어오다가 6월 폐이식 수술을 받았다. 윤 씨 남편 역시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다.

숨진 첫째 자녀는 4등급('관련성 거의 없음')이 나왔다. 윤 씨 본인과 10살짜리 셋째는 3급을, 8살짜리 넷째는 4급을 받았다.

가습기살균제와 신체피해와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만한 제대로 된 검사와 의료기록이 없으면 피해인정(1~2등급)을 받기는 어렵다. 가습기살균제의 흡입 독성은 2011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그 전에 숨진 상당수의 피해 의심환자들은 인정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가습기살균제'의 영향을 염두에 둔 정밀한 검사와 진료가 더 빨리 이뤄질수록, 가습기살균제와 신체피해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낼 가능성은 높아진다. 반대로 형편이 어렵거나, 시간이 없어서, 정보가 부족해서 등 여러 사정으로 검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피해 인정을 받기는 더 어려워지게 된다.

윤 씨는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 속상하다"고 말했다.

"피해 입은 사람들이 본인 스스로 피해를 입증해야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그러는 사이 어느 순간 보면 옥시 불매운동하던 것도 조용히 사라져 버리고, 손해를 입은 기업은 금방 회복이 돼서 현재도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제가 폐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지원을 다 받은 것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수술비 수천만 원과 한 달에 3백만 원씩 들어가는 약값 모두 아직까지 하나도 지원받은 게 없어요"


숫자가 말하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실

최대 피해 55만 명 > 피해 신고 5,788명 > 판정 완료 982명 > 피해 인정 280명

2017년 5월 이경무 한국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은 350만 명에서 400만 명이다. 연구 결과 전체 노출 인원 가운데 13.9%인 48만 7,000여 명에서 55만 6,000여 명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건강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신고가 시작된 지난 2014년 이후 지금까지 정부에 접수된 피해 신고자는 9일 현재 5,788명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정부로부터 피해 인정 여부를 판정받은 신고자는 전체의 18%인 982명에 불과하다. 5천여 명에 가까운 피해 신고자들이 아직도 정부의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판정이 늦어지고 있는 걸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정부가 피해접수를 한 차례 중단한 영향이 크다. 2015년 12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발굴과 보상이 다 끝났다고 여긴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접수와 심사를 3차에서 중단해버렸다.

그 사이 검찰 수사에서 가습기살균제 판매 기업들의 속임수와 거짓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부랴부랴 4차 피해 접수를 재개했다. 하지만 정부가 반년 가까이 손을 놓으면서 밀린 피해 접수와 심사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판정받은 982명 중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관련성이 인정(피해등급 1~2단계)된 신고자는 28.5%인 280명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추정되는 최대 55만여 명 가운데, 0.05%에 불과한 280명만 피해 보상을 받은 셈이다.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시행.. 얼마나 구제될까

오늘(9일)부터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이 시행된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건강피해를 인정받지 못한 신청자들에 대해서도 특별구제계정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피해구제에 쓰일 특별구제계정은 가습기살균제 사업자들에게 부과된 분담금으로 조성됐다. 기업별로는 옥시 674억여 원, SK케미칼과 이노베이션이 340억여 원, 애경 128억 원 등 모두 1,250억 원 규모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구제계정 마련만큼이나 중요한 건 판정 결과다. 지금까지 정부가 해왔던 심사 속도로는 피해 접수자들이 언제 판정을 다 받게 될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별법 시행에 따라 오늘(9일) 처음 열리게 될 구제계정운용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피해를 인정받지 못한 신고자들에 대해 긴급의료지원 여부를 심사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 결과에 따라 몇 명이나 긴급의료지원을 받게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피해 추정 인원의 0.05%에 불과한 피해보상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까지 늘어나고,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피해자들의 힘겨운 싸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관 기사] 살균제 피해 대통령 첫 사과…‘살생물질’ 관리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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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대통령의 위로, 그러나…‘끝나지 않은 가습기 전쟁’
    • 입력 2017-08-09 11:26:24
    • 수정2017-08-23 15:02:03
    취재후·사건후
문재인 대통령의 따듯한 위로.. 눈물 흘린 가습기 피해자들

문재인 대통령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은영 씨의 손을 잡았다. 문 대통령을 마주한 이은영 씨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씨는 무너지듯 고개를 숙였고 문 대통령은 등을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이 씨는 비강 섬유화를 앓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함께 7년째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억울함과 비통함, 국가에 대한 원망, 7년간 쌓였던 울분이 터져 나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씨는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애경이 만든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2011년부터 모자는 이유 없이 아팠다. 이 씨의 아들이 앓고 있는 비강 섬유화는 콧구멍이 딱딱하게 굳어져 숨을 제대로 못 쉬게 한다. 이 씨는 자신과 아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오랜 시간 고민했다. 가습기살균제의 사용이 아닌 다른 원인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씨와 이 씨의 아들이 받은 건 4급 판정이다. 4급은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피해가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을 때 내려지는 판정이다. 결국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이 씨 모자의 고통은 어제(지난 8일) 처음 주목을 받았다. 이 씨 모자가 국가에 대답을 요구한 지 6년 만이었다.

이 씨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많은 가습기살균자 피해자들이 이 씨와 같은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 지난 8일 오후 청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전쟁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일부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 위안을 얻을 무렵, 또 다른 피해자 윤미애 씨와 윤 씨의 남편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다. 8일 취재진과 만난 39세 주부 윤 씨는 오랜 투병생활로 비쩍 마른 몸에, 목에 남아있는 산소호흡기 삽관의 흔적이 아직 선명했다.

윤 씨와 윤 씨 가족은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옥시싹싹' 가습기살균제를 썼다. 결과는 참혹했다. 2007년 첫째를 잃고, 본인도 현재 폐섬유화로 기나긴 투병생활을 이어오다가 6월 폐이식 수술을 받았다. 윤 씨 남편 역시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다.

숨진 첫째 자녀는 4등급('관련성 거의 없음')이 나왔다. 윤 씨 본인과 10살짜리 셋째는 3급을, 8살짜리 넷째는 4급을 받았다.

가습기살균제와 신체피해와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만한 제대로 된 검사와 의료기록이 없으면 피해인정(1~2등급)을 받기는 어렵다. 가습기살균제의 흡입 독성은 2011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그 전에 숨진 상당수의 피해 의심환자들은 인정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가습기살균제'의 영향을 염두에 둔 정밀한 검사와 진료가 더 빨리 이뤄질수록, 가습기살균제와 신체피해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낼 가능성은 높아진다. 반대로 형편이 어렵거나, 시간이 없어서, 정보가 부족해서 등 여러 사정으로 검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피해 인정을 받기는 더 어려워지게 된다.

윤 씨는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 속상하다"고 말했다.

"피해 입은 사람들이 본인 스스로 피해를 입증해야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그러는 사이 어느 순간 보면 옥시 불매운동하던 것도 조용히 사라져 버리고, 손해를 입은 기업은 금방 회복이 돼서 현재도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제가 폐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지원을 다 받은 것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수술비 수천만 원과 한 달에 3백만 원씩 들어가는 약값 모두 아직까지 하나도 지원받은 게 없어요"


숫자가 말하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실

최대 피해 55만 명 > 피해 신고 5,788명 > 판정 완료 982명 > 피해 인정 280명

2017년 5월 이경무 한국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은 350만 명에서 400만 명이다. 연구 결과 전체 노출 인원 가운데 13.9%인 48만 7,000여 명에서 55만 6,000여 명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건강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신고가 시작된 지난 2014년 이후 지금까지 정부에 접수된 피해 신고자는 9일 현재 5,788명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정부로부터 피해 인정 여부를 판정받은 신고자는 전체의 18%인 982명에 불과하다. 5천여 명에 가까운 피해 신고자들이 아직도 정부의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판정이 늦어지고 있는 걸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정부가 피해접수를 한 차례 중단한 영향이 크다. 2015년 12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발굴과 보상이 다 끝났다고 여긴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접수와 심사를 3차에서 중단해버렸다.

그 사이 검찰 수사에서 가습기살균제 판매 기업들의 속임수와 거짓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부랴부랴 4차 피해 접수를 재개했다. 하지만 정부가 반년 가까이 손을 놓으면서 밀린 피해 접수와 심사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판정받은 982명 중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관련성이 인정(피해등급 1~2단계)된 신고자는 28.5%인 280명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추정되는 최대 55만여 명 가운데, 0.05%에 불과한 280명만 피해 보상을 받은 셈이다.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시행.. 얼마나 구제될까

오늘(9일)부터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이 시행된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건강피해를 인정받지 못한 신청자들에 대해서도 특별구제계정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피해구제에 쓰일 특별구제계정은 가습기살균제 사업자들에게 부과된 분담금으로 조성됐다. 기업별로는 옥시 674억여 원, SK케미칼과 이노베이션이 340억여 원, 애경 128억 원 등 모두 1,250억 원 규모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구제계정 마련만큼이나 중요한 건 판정 결과다. 지금까지 정부가 해왔던 심사 속도로는 피해 접수자들이 언제 판정을 다 받게 될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별법 시행에 따라 오늘(9일) 처음 열리게 될 구제계정운용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피해를 인정받지 못한 신고자들에 대해 긴급의료지원 여부를 심사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 결과에 따라 몇 명이나 긴급의료지원을 받게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피해 추정 인원의 0.05%에 불과한 피해보상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까지 늘어나고,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피해자들의 힘겨운 싸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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