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건건] 주행 중 멈춰선 신차…한국이 아니라 독일이었다면?

입력 2017.08.09 (16:00) 수정 2017.08.09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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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건건] 주행 중 멈춰선 신차…한국이 아니라 독일이었다면?

[사사건건] 주행 중 멈춰선 신차…한국이 아니라 독일이었다면?

박상일 씨는 지난 4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왕복 4차로의 도로 한 가운데서 차량이 멈춰선 것이다. 뒷좌석엔 임신한 아내와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가 타고 있었다. 양 옆으로 달리는 차량들에 식은땀이 났지만, 고속도로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량은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신차를 인도받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수리를 위해 서비스센터에 차량을 입고하자 변속기(미션)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미션을 통째로 교환하는 데 일주일 이상 걸린다고 했다.

박 씨는 사실상 신차의 주요 부품을 완전히 교환해야 한다는 사실에 차량 자체가 하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가족이 타는 차량으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며,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했지지만 제조사 측은 "보증 기간이니 고쳐 타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박 씨와 제조사 측은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이후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박 씨의 차량은 운행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아니라 독일 주민이었다면?

제조사의 '버티기'에도 불구하고 박 씨가 차량을 교환이나 환불받겠다면, 방법은 하나다.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선 박 씨가 차량의 결함이나 하자를 직접 입증해야 하고, 소송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대기업을 상대로 한 한 개인의 힘겨운 법정 다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박 씨가 한국이 아닌 영국이나 독일에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가 유럽연합(EU)의 주민이었다면?

유럽연합은 지난 1999년 제정한 '소비재매매 및 보증에 관한 지침'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상품에 처음부터 하자가 있었다고 판단되는 경우 상품을 산 지 2년 안에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판매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산 지 6개월 내에 제품에 발생한 문제는 살 때부터 있던 하자로 추정하는데, 제품의 하자가 없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소비자가 아닌 '판매자'에게 있다. 이같은 지침에 따라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2000년대 초반 관련 법을 개정했다.

박 씨가 유럽에 살았다면 이 차량은 산 지 6개월 이내에 하자가 발생했으므로 2개월 이내에 박 씨가 이를 청구한다면 판매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제품의 하자 여부를 입증할 책임도 제조사에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같이 소비자에 대한 제조사의 책임을 '강제'하는 법률이 없다. 길고 긴 민사 소송, 결국 나가 떨어지는 건 기업이 아닌 개인이다.


센터 입고 날이 운행한 날보다 많아…미국이었다면?

구경철 씨는 지난 2월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를 구입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드림카'는 신차 출고 한 달 만에 정비센터에 입고됐다. 계기판에 '서스펜션 경고등'이 뜨는 문제가 고질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같은 증상으로 입고된 것만 6차례, 정비센터에 입고된 날이 차량을 운행한 날보다 많았다.

구 씨는 제조사 측에 차량의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했다. 마세라티 차량 안내문에는 '서스펜션 ECU에 결함이 생기면(운전할 때 화면에 경고등이 켜짐) 속도를 낮추고 가능한 한 빨리 마세라티 공식 서비스 센터에 가서 차를 점검받으십시오'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제조사 측은 "워런티를 1년 연장해주겠다"면서 수리를 고집했다.

만약 구 씨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 주민이라면 어떨까? 제조사가 차량을 교환하도록 법적 강제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 자동차의 교환·환불과 관련한 '법'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방법에 근거해 각 주마다 이른바 '레몬법(Lemon Law)'을 시행하고 있다. '레몬'이란 결함이 있는 차량을 뜻하는 말로, 신차에 결함이 있을 경우 교환이나 환불을 강제하는 법령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각종 대안은 나오고 있지만…‘반쪽짜리’

차주들의 불만이 늘어나다 보니 한국소비자원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의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에 따라 조정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소비자원의 분쟁조정에 따른 차량 교환·환불을 받는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다.


최근 국내 제조차 업체들이 내세우고 있는 '신차 교환 프로그램'도 한계가 있긴 마찬가지다. 신차에 하자가 발견될 경우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교환해주는 프로그램으로, 현대자동차가 대대적으로 도입했지만 조건이 까다롭다. 또 일정 업체의 일종 차종에만 한정돼 있어, 사실상 제조사의 '선의'에 기대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형 레몬법’ 수년째 국회 계류 중… “아예 법안을 새로 마련해야”

이에 따라 국회에서는 '자동차관리법'을 개정하려는 노력이 수년째 이어져 왔다. 4명의 의원이 4가지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냈는데, 가장 최근의 정용기 의원안도 본회의에 부의되지 못했다.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소비자의 도덕적 해이를 야기할 수 있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관리법'을 개정하는 대신, 아예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경실련은 차량의 교환과 환불에 관한 조항은 '자동차관리법'과 정합성이 맞지 않다며, 법령 개정이 아닌 입법을 요구하고 있다. 경실련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한국도 미국처럼 이른바 '레몬법'을 도입하게 되는 셈이다.

차일피일 미뤄지는 동안 손해는 ‘소비자 몫’

국회가 뒷짐을 지고 있는 동안 소비자의 피해는 늘어만 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동차라는 상품이 갖는 특성상 하루빨리 관련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성용 신한대학교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자동차는 모든 최신 기술의 융합체"라며 "자동차의 결함이나 하자에 대해 제조사가 소비자보다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신차에 하자가 발생해도 "고쳐타면 된다"는 제조사의 말에 소비자가 대항할 수단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차량은 무엇보다도 '안전'과 직결된 상품이다.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령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동안 손해를 보는 건, 소비자다.

[연관 기사] [뉴스9] “새 차 결함있어도 환불 NO”…국내 소비자 ‘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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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09 16:00:32
    • 수정2017-08-09 22:23:43
    사사건건
박상일 씨는 지난 4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왕복 4차로의 도로 한 가운데서 차량이 멈춰선 것이다. 뒷좌석엔 임신한 아내와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가 타고 있었다. 양 옆으로 달리는 차량들에 식은땀이 났지만, 고속도로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량은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신차를 인도받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수리를 위해 서비스센터에 차량을 입고하자 변속기(미션)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미션을 통째로 교환하는 데 일주일 이상 걸린다고 했다.

박 씨는 사실상 신차의 주요 부품을 완전히 교환해야 한다는 사실에 차량 자체가 하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가족이 타는 차량으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며,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했지지만 제조사 측은 "보증 기간이니 고쳐 타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박 씨와 제조사 측은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이후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박 씨의 차량은 운행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아니라 독일 주민이었다면?

제조사의 '버티기'에도 불구하고 박 씨가 차량을 교환이나 환불받겠다면, 방법은 하나다.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선 박 씨가 차량의 결함이나 하자를 직접 입증해야 하고, 소송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대기업을 상대로 한 한 개인의 힘겨운 법정 다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박 씨가 한국이 아닌 영국이나 독일에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가 유럽연합(EU)의 주민이었다면?

유럽연합은 지난 1999년 제정한 '소비재매매 및 보증에 관한 지침'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상품에 처음부터 하자가 있었다고 판단되는 경우 상품을 산 지 2년 안에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판매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산 지 6개월 내에 제품에 발생한 문제는 살 때부터 있던 하자로 추정하는데, 제품의 하자가 없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소비자가 아닌 '판매자'에게 있다. 이같은 지침에 따라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2000년대 초반 관련 법을 개정했다.

박 씨가 유럽에 살았다면 이 차량은 산 지 6개월 이내에 하자가 발생했으므로 2개월 이내에 박 씨가 이를 청구한다면 판매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제품의 하자 여부를 입증할 책임도 제조사에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같이 소비자에 대한 제조사의 책임을 '강제'하는 법률이 없다. 길고 긴 민사 소송, 결국 나가 떨어지는 건 기업이 아닌 개인이다.


센터 입고 날이 운행한 날보다 많아…미국이었다면?

구경철 씨는 지난 2월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를 구입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드림카'는 신차 출고 한 달 만에 정비센터에 입고됐다. 계기판에 '서스펜션 경고등'이 뜨는 문제가 고질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같은 증상으로 입고된 것만 6차례, 정비센터에 입고된 날이 차량을 운행한 날보다 많았다.

구 씨는 제조사 측에 차량의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했다. 마세라티 차량 안내문에는 '서스펜션 ECU에 결함이 생기면(운전할 때 화면에 경고등이 켜짐) 속도를 낮추고 가능한 한 빨리 마세라티 공식 서비스 센터에 가서 차를 점검받으십시오'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제조사 측은 "워런티를 1년 연장해주겠다"면서 수리를 고집했다.

만약 구 씨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 주민이라면 어떨까? 제조사가 차량을 교환하도록 법적 강제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 자동차의 교환·환불과 관련한 '법'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방법에 근거해 각 주마다 이른바 '레몬법(Lemon Law)'을 시행하고 있다. '레몬'이란 결함이 있는 차량을 뜻하는 말로, 신차에 결함이 있을 경우 교환이나 환불을 강제하는 법령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각종 대안은 나오고 있지만…‘반쪽짜리’

차주들의 불만이 늘어나다 보니 한국소비자원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의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에 따라 조정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소비자원의 분쟁조정에 따른 차량 교환·환불을 받는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다.


최근 국내 제조차 업체들이 내세우고 있는 '신차 교환 프로그램'도 한계가 있긴 마찬가지다. 신차에 하자가 발견될 경우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교환해주는 프로그램으로, 현대자동차가 대대적으로 도입했지만 조건이 까다롭다. 또 일정 업체의 일종 차종에만 한정돼 있어, 사실상 제조사의 '선의'에 기대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형 레몬법’ 수년째 국회 계류 중… “아예 법안을 새로 마련해야”

이에 따라 국회에서는 '자동차관리법'을 개정하려는 노력이 수년째 이어져 왔다. 4명의 의원이 4가지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냈는데, 가장 최근의 정용기 의원안도 본회의에 부의되지 못했다.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소비자의 도덕적 해이를 야기할 수 있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관리법'을 개정하는 대신, 아예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경실련은 차량의 교환과 환불에 관한 조항은 '자동차관리법'과 정합성이 맞지 않다며, 법령 개정이 아닌 입법을 요구하고 있다. 경실련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한국도 미국처럼 이른바 '레몬법'을 도입하게 되는 셈이다.

차일피일 미뤄지는 동안 손해는 ‘소비자 몫’

국회가 뒷짐을 지고 있는 동안 소비자의 피해는 늘어만 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동차라는 상품이 갖는 특성상 하루빨리 관련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성용 신한대학교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자동차는 모든 최신 기술의 융합체"라며 "자동차의 결함이나 하자에 대해 제조사가 소비자보다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신차에 하자가 발생해도 "고쳐타면 된다"는 제조사의 말에 소비자가 대항할 수단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차량은 무엇보다도 '안전'과 직결된 상품이다.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령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동안 손해를 보는 건, 소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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