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이후 삶이 바뀌었다”…‘그녀들의 전쟁’

입력 2017.08.17 (16:41) 수정 2017.08.1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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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을 이야기한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 회고담에서 철저히 배제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백만 명이 넘는 여성이 전쟁에 가담해 싸웠지만, 그들 중 그 누구의 이름과 얼굴도 기억되지 못하는 데서 집필이 시작됐다.

이처럼 생사를 오가며 전쟁터를 누빈 것은 비단 남성들만이 아니다. 격전지나 명분은 모두 달랐지만, 동아시아 전쟁터에도 분명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바라본 전쟁은 어떤 모습일까. 'KBS스페셜'이 자신의 의지 혹은 국가의 부름으로 참전한 동아시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연관기사] ‘전쟁과 여성’…그녀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에 뛰어든 소녀


"저 사람을 안 죽이면 내가 죽어야 하는 거니까 내가 살려면 악한 마음을 가져야 하잖아요."


대한민국 유일의 6·25 참전 유공자회 여성 회장 박옥선(86) 할머니. 종로구 유공자 지회의 살림을 꾸리는 와중에도 유공자 회원 가족을 챙기는 그녀의 손길은 각별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경기여자중학교 5학년이던 그녀는 전쟁 통에도 임시 학습소를 찾아다니며 학업에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넘쳐나는 부상자를 치료할 간호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참전을 결심하고, 부모님 몰래 간호장교 임관 시험에 합격해 집합 명령을 전달받는다.


훈련소행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하던 날, 뒤늦게 달려온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죽음을 전하는 전령사


"전쟁은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중국 우한에 사는 허위커(97) 할머니는 1940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참전했다. 육군 제8군 5사 정치부 소속으로 전쟁터로 향하는 용사들과 악수를 하며 승기를 북돋았다.

건장했던 아침과 달리 복귀한 용사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가족에게 "나라를 위한 값진 죽음이었다"라고 위로를 전하는 것도 그녀의 임무 중 하나였다. 그녀는 징병 된 아들이 보고 싶어 전방까지 찾아온 노모에게 죽음을 전해야 했던 순간이 전쟁 중 가장 애통했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감수성으로 바라본 전쟁터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제국주의의 소녀들


"죽는 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주민 모두 면도칼, 낫, 도끼를 가지고 피난 갔었죠. 제가 용케 죽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중 유일하게 미군과 지상전을 벌였던 지역이다. 관광지로 알려진 오키나와의 자마미섬은 1945년 미군과 일본군의 격전지 중 하나였다. 자마미섬 주민들은 매년 음력 2월 15일, 전쟁 때 사망한 가족을 기린다. 미야무라 후미코(95) 할머니도 매년 이날이 오면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미군과 지상전이 벌어지던 2~3개월 사이, 목숨을 잃은 사람은 1천여 명.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있던 방공호 안에서,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을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미야무라 후미코 할머니가 목격한 전쟁의 민낯을 들여다본다.


일본의 패색이 짙던 1945년 3월, 오키나와 여자 사범학교에도 징집령이 떨어진다. 교사를 꿈꾸던 15~19세 소녀들은 '히메유리 학도대'라는 이름으로 방공호에 배치됐다. 시마부쿠로(91) 할머니도 그중 한 명으로, 부상당한 일본군을 치료하는 임무를 받아 수행했다.

그러나 3개월 후, 일본군이 전쟁에서 패할 조짐이 일자 전쟁터에 투입됐던 소녀들은 버려졌다. 미국인과 영국인들은 일본 여성을 성폭행하고, 남자들은 사살하는 괴물과 같다고 교육받은 소녀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끝까지 미군을 피해 도망 다니다 목숨을 잃었다. 그 결과 240명 중 13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실종됐다.


"일주일이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줄 알았어요. 그림 그리길 좋아하는 친구는 벼루와 붓을, 공부를 좋아하는 친구는 책과 안경을 챙겨가기도 했죠."

살아 돌아온 소녀들은 다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죽은 친구들이 잊히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각자 그날의 기억을 조합하고, 작은 자료도 소중히 모아 히메유리 학도대 평화 자료 기념관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6월 23일이면 먼저 떠난 친구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린다.

전쟁이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팔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들의 삶에서 전쟁은 짧지만,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KBS스페셜-전쟁과 여성 2부'(17일 밤 10시, 1TV)에서는 전쟁을 겪은 할머니들의 평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어 전쟁의 얼굴을 드러내는 과거 기록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에 질문을 던져본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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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7 16:41:37
    • 수정2017-08-17 16: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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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을 이야기한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 회고담에서 철저히 배제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백만 명이 넘는 여성이 전쟁에 가담해 싸웠지만, 그들 중 그 누구의 이름과 얼굴도 기억되지 못하는 데서 집필이 시작됐다.

이처럼 생사를 오가며 전쟁터를 누빈 것은 비단 남성들만이 아니다. 격전지나 명분은 모두 달랐지만, 동아시아 전쟁터에도 분명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바라본 전쟁은 어떤 모습일까. 'KBS스페셜'이 자신의 의지 혹은 국가의 부름으로 참전한 동아시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연관기사] ‘전쟁과 여성’…그녀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에 뛰어든 소녀


"저 사람을 안 죽이면 내가 죽어야 하는 거니까 내가 살려면 악한 마음을 가져야 하잖아요."


대한민국 유일의 6·25 참전 유공자회 여성 회장 박옥선(86) 할머니. 종로구 유공자 지회의 살림을 꾸리는 와중에도 유공자 회원 가족을 챙기는 그녀의 손길은 각별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경기여자중학교 5학년이던 그녀는 전쟁 통에도 임시 학습소를 찾아다니며 학업에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넘쳐나는 부상자를 치료할 간호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참전을 결심하고, 부모님 몰래 간호장교 임관 시험에 합격해 집합 명령을 전달받는다.


훈련소행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하던 날, 뒤늦게 달려온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죽음을 전하는 전령사


"전쟁은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중국 우한에 사는 허위커(97) 할머니는 1940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참전했다. 육군 제8군 5사 정치부 소속으로 전쟁터로 향하는 용사들과 악수를 하며 승기를 북돋았다.

건장했던 아침과 달리 복귀한 용사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가족에게 "나라를 위한 값진 죽음이었다"라고 위로를 전하는 것도 그녀의 임무 중 하나였다. 그녀는 징병 된 아들이 보고 싶어 전방까지 찾아온 노모에게 죽음을 전해야 했던 순간이 전쟁 중 가장 애통했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감수성으로 바라본 전쟁터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제국주의의 소녀들


"죽는 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주민 모두 면도칼, 낫, 도끼를 가지고 피난 갔었죠. 제가 용케 죽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중 유일하게 미군과 지상전을 벌였던 지역이다. 관광지로 알려진 오키나와의 자마미섬은 1945년 미군과 일본군의 격전지 중 하나였다. 자마미섬 주민들은 매년 음력 2월 15일, 전쟁 때 사망한 가족을 기린다. 미야무라 후미코(95) 할머니도 매년 이날이 오면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미군과 지상전이 벌어지던 2~3개월 사이, 목숨을 잃은 사람은 1천여 명.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있던 방공호 안에서,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을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미야무라 후미코 할머니가 목격한 전쟁의 민낯을 들여다본다.


일본의 패색이 짙던 1945년 3월, 오키나와 여자 사범학교에도 징집령이 떨어진다. 교사를 꿈꾸던 15~19세 소녀들은 '히메유리 학도대'라는 이름으로 방공호에 배치됐다. 시마부쿠로(91) 할머니도 그중 한 명으로, 부상당한 일본군을 치료하는 임무를 받아 수행했다.

그러나 3개월 후, 일본군이 전쟁에서 패할 조짐이 일자 전쟁터에 투입됐던 소녀들은 버려졌다. 미국인과 영국인들은 일본 여성을 성폭행하고, 남자들은 사살하는 괴물과 같다고 교육받은 소녀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끝까지 미군을 피해 도망 다니다 목숨을 잃었다. 그 결과 240명 중 13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실종됐다.


"일주일이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줄 알았어요. 그림 그리길 좋아하는 친구는 벼루와 붓을, 공부를 좋아하는 친구는 책과 안경을 챙겨가기도 했죠."

살아 돌아온 소녀들은 다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죽은 친구들이 잊히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각자 그날의 기억을 조합하고, 작은 자료도 소중히 모아 히메유리 학도대 평화 자료 기념관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6월 23일이면 먼저 떠난 친구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린다.

전쟁이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팔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들의 삶에서 전쟁은 짧지만,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KBS스페셜-전쟁과 여성 2부'(17일 밤 10시, 1TV)에서는 전쟁을 겪은 할머니들의 평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어 전쟁의 얼굴을 드러내는 과거 기록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에 질문을 던져본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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