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지도교수 성추행 폭로 그 후…“기사 좀 내려주실 수 없나요?”

입력 2018.03.20 (08:17) 수정 2018.03.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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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지도교수 성추행 폭로에도 가해자 징계까지는 ‘먼 산’

[취재후] 지도교수 성추행 폭로에도 가해자 징계까지는 ‘먼 산’


[연관기사] “졸업 못 시킨다” 제자 성추행…영상에 잡힌 과학계 ‘미투’

"기자님 정말 죄송한데 기사를 내려주시거나 수정해주실 수 없나요?"

졸업을 시켜줄 수 없다며 대학원생 여 제자를 유행주점에 데려가 성추행한 경희대 교수에 대한 뉴스를 지난 주 보도했습니다. 그 날 밤늦게 제보자 윤주 씨(가명)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장문의 글에는 고민의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가해자 걱정보다는 '제보자 걱정' 많아

음성 변조와 모자이크를 했건만 말투나 제스처, 학교 이름 등에서 자신임을 특정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지도교수에게 당한 일을 용기내 고백한 건데 대부분의 반응은 가해자보다는 윤주 씨의 앞날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고 했습니다. 학계 권위자인 교수를 상대로 싸워봤자 상처만 입고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도 컸다고 합니다.

뉴스가 나가고 두려워해야할 사람은 가해자인데 왜 자신이 그래야 하냐고 윤주 씨는 물었습니다. 제보자의 신원을 철저하게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2차 피해도 걱정이 됐지만 지금 기사를 내리면 가해 교수가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경희대 측과 통화를 했습니다. 올해 초 '미투' 관련된 학내 감사를 벌였고 교수와 제자 등 권력 관계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성폭력 사건들을 대대적으로 조사해 중징계를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보도가 나오자 곤혹스러워했지만 긴급 이사회를 열어 가해 교수를 직위 해제시키겠다고 밝혔습니다.

[연관기사] 경희대, 성추행 교수 업무 배제 등 징계 절차 착수

곧바로 학교 측은 해당 교수가 맡은 강의와 연구 활동, 학생 지도 등 모든 업무를 중지시켰습니다.제보자와 다른 학생들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시킨 건데 교수의 얼굴을 매일 보는 학생들 입장에선 아무리 비밀을 보장해준다고 해도 증언을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학생들의 논문은 물론 졸업과 유학, 취업 등 전권을 쥐고 있는 지도교수이기에 혹시라도 밉보이면 학계를 떠날 각오까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3자 고발'에 이어 성폭력 상담실 문 두드려

학교에서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제3자에 의한 성폭력 고발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윤주 씨는 미투 고발의 충격으로 추가 증언은 힘들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고 동영상도 가지고 있는 제가 고발인으로 나서게 됐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피해자 본인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해서 윤주 씨를 설득했는데 다행히 같은 연구실에 있던 다른 학생과 함께 학교 성폭력 상담실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경찰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첩보만으로도 수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피해자 진술 없이 중징계는 힘들다고 제보자를 설득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추행의 괴로움을 떨쳐버리기도 힘든데 경찰과 검찰 등 지난한 출석과 증언 과정을 겪어야할 윤주 씨 생각에 도저히 적극적으로 권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따라다니는 지도교수의 이름 ...징계는 '먼 산'

보도 후 1주일이 지났습니다. 학교 측은 조사위를 꾸려 가해 교수에 대한 수사를 적극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이후에는 특별위원회와 인사위원회, 징계위원회 등 절차가 남아있어 최대한 서둘러도 시간이 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산 넘어 산인 셈인데요.

윤주 씨는 학교를 떠났지만 취업을 위해서 앞으로도 지도교수의 이름이 계속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력서에 어느 교수의 연구실에 있었는지 밝혀야 하는데, 면접관이 지도교수와 선후배 등으로 얽혀있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사실상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도 불가능합니다.

만약 지도교수가 중징계를 받아도 내부 고발자로 찍혀서 취업 문제 등 이후 상황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심리적인 충격이 클 테니 한마디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복잡한 마음에 저라면 감당할 수 없었을 텐데요. 취재기자로서 윤주 씨가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상황을 지켜보고 추가 보도를 이어가는 것이 유일한 일이겠죠. 윤주 씨는 다행히 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미투 이후의 상황을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안타깝게 보고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왜 그래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당당한 마음을 되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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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지도교수 성추행 폭로 그 후…“기사 좀 내려주실 수 없나요?”
    • 입력 2018-03-20 08:17:10
    • 수정2018-03-20 20:14:04
    취재후·사건후

[연관기사] “졸업 못 시킨다” 제자 성추행…영상에 잡힌 과학계 ‘미투’

"기자님 정말 죄송한데 기사를 내려주시거나 수정해주실 수 없나요?"

졸업을 시켜줄 수 없다며 대학원생 여 제자를 유행주점에 데려가 성추행한 경희대 교수에 대한 뉴스를 지난 주 보도했습니다. 그 날 밤늦게 제보자 윤주 씨(가명)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장문의 글에는 고민의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가해자 걱정보다는 '제보자 걱정' 많아

음성 변조와 모자이크를 했건만 말투나 제스처, 학교 이름 등에서 자신임을 특정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지도교수에게 당한 일을 용기내 고백한 건데 대부분의 반응은 가해자보다는 윤주 씨의 앞날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고 했습니다. 학계 권위자인 교수를 상대로 싸워봤자 상처만 입고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도 컸다고 합니다.

뉴스가 나가고 두려워해야할 사람은 가해자인데 왜 자신이 그래야 하냐고 윤주 씨는 물었습니다. 제보자의 신원을 철저하게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2차 피해도 걱정이 됐지만 지금 기사를 내리면 가해 교수가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경희대 측과 통화를 했습니다. 올해 초 '미투' 관련된 학내 감사를 벌였고 교수와 제자 등 권력 관계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성폭력 사건들을 대대적으로 조사해 중징계를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보도가 나오자 곤혹스러워했지만 긴급 이사회를 열어 가해 교수를 직위 해제시키겠다고 밝혔습니다.

[연관기사] 경희대, 성추행 교수 업무 배제 등 징계 절차 착수

곧바로 학교 측은 해당 교수가 맡은 강의와 연구 활동, 학생 지도 등 모든 업무를 중지시켰습니다.제보자와 다른 학생들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시킨 건데 교수의 얼굴을 매일 보는 학생들 입장에선 아무리 비밀을 보장해준다고 해도 증언을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학생들의 논문은 물론 졸업과 유학, 취업 등 전권을 쥐고 있는 지도교수이기에 혹시라도 밉보이면 학계를 떠날 각오까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3자 고발'에 이어 성폭력 상담실 문 두드려

학교에서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제3자에 의한 성폭력 고발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윤주 씨는 미투 고발의 충격으로 추가 증언은 힘들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고 동영상도 가지고 있는 제가 고발인으로 나서게 됐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피해자 본인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해서 윤주 씨를 설득했는데 다행히 같은 연구실에 있던 다른 학생과 함께 학교 성폭력 상담실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경찰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첩보만으로도 수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피해자 진술 없이 중징계는 힘들다고 제보자를 설득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추행의 괴로움을 떨쳐버리기도 힘든데 경찰과 검찰 등 지난한 출석과 증언 과정을 겪어야할 윤주 씨 생각에 도저히 적극적으로 권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따라다니는 지도교수의 이름 ...징계는 '먼 산'

보도 후 1주일이 지났습니다. 학교 측은 조사위를 꾸려 가해 교수에 대한 수사를 적극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이후에는 특별위원회와 인사위원회, 징계위원회 등 절차가 남아있어 최대한 서둘러도 시간이 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산 넘어 산인 셈인데요.

윤주 씨는 학교를 떠났지만 취업을 위해서 앞으로도 지도교수의 이름이 계속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력서에 어느 교수의 연구실에 있었는지 밝혀야 하는데, 면접관이 지도교수와 선후배 등으로 얽혀있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사실상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도 불가능합니다.

만약 지도교수가 중징계를 받아도 내부 고발자로 찍혀서 취업 문제 등 이후 상황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심리적인 충격이 클 테니 한마디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복잡한 마음에 저라면 감당할 수 없었을 텐데요. 취재기자로서 윤주 씨가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상황을 지켜보고 추가 보도를 이어가는 것이 유일한 일이겠죠. 윤주 씨는 다행히 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미투 이후의 상황을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안타깝게 보고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왜 그래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당당한 마음을 되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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