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남북교류 물꼬 텄지만…‘탈북민 통일 박사’ 심정은?

입력 2018.03.25 (17:01) 수정 2018.03.2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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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남북교류 물꼬 텄지만…‘탈북민 통일 박사’ 심정은?

[취재후] 남북교류 물꼬 텄지만…‘탈북민 통일 박사’ 심정은?

탈북민 주승현 교수(전주기전대학)는 16살에 북한군에 입대했다. 최전방 대남선전방송 요원으로 근무하며 직업군인이 되려는 꿈을 키워왔다. 22살이던 2002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군관학교 입학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됐다. 고심 끝에 휴전선을 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근무하던 곳에서 남한 초소까지는 약 700미터. 뜀박질로 5분도 안되는 거리지만 50년의 세월이 멈춰있는 곳이다. 1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4중 철조망을 비롯해 지뢰와 매복호 등 목숨을 노리는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철책을 넘고 지뢰를 피해 정신없이 내달리다보니 남측 초소가 보였다. 메고 있던 AK소총을 허공에 발사하며 귀순 사실을 알렸다. 살아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20대여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


2002년 2월20일 KBS ‘뉴스7’ 탈북 당시 보도 화면

■ 탈북과 동시에 생활고 내몰려…원인은 "차별"

탈북해 남한에 오면 영웅 대접 받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사실상 체제경쟁이 끝나고 남한 당국 입장에서 선전용 영웅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반면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탈북자는 급증했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민들은 당장 생계가 막막한 처지로 내몰렸다.

한국은 부익부빈익빈 현상도 심하고 경쟁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왔다. 그래도 직업 알선 정도는 해주는 줄 알았다. 잘못된 정보였다. 북한에선 출신 성분에 따라 직업이 좌우되곤 했는데, 남한에 오니 탈북민이라는 신분 자체가 ‘출신 성분’이 됐다. 단순노무직도 탈북민임을 밝히는 순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남한 젊은이들처럼 대학을 나와 당당히 취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6살부터 군생활만 했으니 공부가 익숙할 리 없었다. 밤에는 생활비를 벌고 하루 3시간씩 자며 공부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서도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란 녹록지 않았다. 한 탈북민 친구는 영어 진행 수업을 알아들을 수 없어 강의실을 뛰쳐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명문대 졸업장을 받아든 게 2007년. 한국의 취업난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100곳 넘는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탈락이었다. 남한 출신 대졸자들도 바늘구멍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체념하는 심정으로 이력서 ‘군필’난에 ‘탈북민’ 표기를 지우고 지원서를 넣었다. ‘서류전형 합격’ 통지가 이어졌다. 탈북민에게 남한은, 생계를 잇기 위해 정체성을 지워야 하는 곳이었다.

[연관기사] 이력서에 '탈북' 지우니 합격…“우리도 국민입니다”

어렵게 취업한 뒤에도 통일 분야 연구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접지 못한 건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기 때문일 터다. 박사 학위를 받고 전주기전대 교수가 되기까지 그는 매일 같이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맞닥뜨렸다.

■‘탈북민’ 밝히면 태도 변해…편견의 양쪽 끝

남한 사람과 처음 만나 “탈북민”이라고 소개하면 열 중 아홉은 ‘가르치려’ 든다고 한다. 자본주의에선 이렇게 살아야 돼, 남한에 이런 게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다수의 남한 사람들이 탈북민들로부터 열등감을 고백 받는 방법으로 우월감을 챙긴다.

그러다 “교수”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의 태도는 확 바뀐단다. 탈북민과 대학교수 사이에서 그는 오늘도 편견의 양 극단을 체험한다.

주 교수는 “탈북민도 경쟁사회에 진입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특혜도 동정도 아닌 한 사람의 국민으로 자리잡기 위한 조건이란 얘기다. 물론 경쟁의 전제는, 편견이 아닌 동등한 기회다.

극단의 체험은 분단국가의 정치 상황과 맞물릴 때 한층 심해진다. 탈북민 단체 하면 대개 보수·우익·반공 단체를 떠올리게 된다. (기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탈북민 단체가 주로 이런 곳들이다.) 주 교수가 페이스북 창을 열어보였다. 한 탈북민 동료가 촛불집회에 나서며 참여를 독려하는 게시물이었다.


흔히 탈북민이라면 보수단체를 떠올리지만 촛불집회에 참가한 탈북민도 적지 않았다.


보수·진보 이분법이 아닌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갖는 다양성을, 탈북민을 국민으로 받아들인 이 사회는 얼마나 고려하고 있을까.

주 교수는 말한다. “경제적 이유로 탈북한 사람, 정치적으로 온 사람, 이민으로 온 사람, 유학으로 온 사람, 먼저 온 가족 따라 온 연계형 탈북…. 제각각 다 다릅니다. 탈북민이 3만2천 명이면요, 3만2천 개의 사연이 있는 겁니다.”

■ 매년 수십명 ‘탈남’(脫南)…“한반도 평화 시험대”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탈북민 수는 31,339명이다. 이들 가운데 차별과 생계 등의 문제로 남한을 떠나는 ‘탈남’ 대열 역시 매년 수십명씩 이어져, 현재까지 746명이 제3국행을 택했다. 캐나다 169명, 미국 113명, 영국 97명 등의 순이다. ‘탈북민 3만 명 시대’의 이면이다.


주승현 교수가 쓴 책 <조난자들>


탈북민 중 165명은 교도소 등에 수감 중이다. 마약, 사기·횡령, 살인 혐의 순이다. 22명은 연락 기피 등의 이유로 소재지가 파악되지 않고 있고, 12명은 북한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최근 남북 대화에 물꼬가 트인 것은 이론의 여지없이 반가운 일이다. 북한 비핵화와 전쟁 위협 억제, 대북제재 중단과 북미간 적대관계 해소 등 당면한 과제들은 어느 하나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지난한 과정의 목적지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라면, 남과 북의 시민들이 단계적으로 교류를 넓히고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 또한 당면 과제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주승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탈북민의 정착 과정은 남북 화해의 가능성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탈북민까지를 아우르는 사회 통합이 곧 통일에 이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통일에 앞서 분단을 성찰해야 합니다. 통합의 대상인 남북한이 서로를 알아가고 상생을 고민하며 통일을 하나의 과정으로 축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연관기사] 입사지원서에 ‘탈북’ 지우니 합격…“나도 대한민국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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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남북교류 물꼬 텄지만…‘탈북민 통일 박사’ 심정은?
    • 입력 2018-03-25 17:01:52
    • 수정2018-03-25 22:07:58
    취재후·사건후
탈북민 주승현 교수(전주기전대학)는 16살에 북한군에 입대했다. 최전방 대남선전방송 요원으로 근무하며 직업군인이 되려는 꿈을 키워왔다. 22살이던 2002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군관학교 입학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됐다. 고심 끝에 휴전선을 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근무하던 곳에서 남한 초소까지는 약 700미터. 뜀박질로 5분도 안되는 거리지만 50년의 세월이 멈춰있는 곳이다. 1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4중 철조망을 비롯해 지뢰와 매복호 등 목숨을 노리는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철책을 넘고 지뢰를 피해 정신없이 내달리다보니 남측 초소가 보였다. 메고 있던 AK소총을 허공에 발사하며 귀순 사실을 알렸다. 살아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20대여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


2002년 2월20일 KBS ‘뉴스7’ 탈북 당시 보도 화면

■ 탈북과 동시에 생활고 내몰려…원인은 "차별"

탈북해 남한에 오면 영웅 대접 받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사실상 체제경쟁이 끝나고 남한 당국 입장에서 선전용 영웅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반면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탈북자는 급증했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민들은 당장 생계가 막막한 처지로 내몰렸다.

한국은 부익부빈익빈 현상도 심하고 경쟁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왔다. 그래도 직업 알선 정도는 해주는 줄 알았다. 잘못된 정보였다. 북한에선 출신 성분에 따라 직업이 좌우되곤 했는데, 남한에 오니 탈북민이라는 신분 자체가 ‘출신 성분’이 됐다. 단순노무직도 탈북민임을 밝히는 순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남한 젊은이들처럼 대학을 나와 당당히 취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6살부터 군생활만 했으니 공부가 익숙할 리 없었다. 밤에는 생활비를 벌고 하루 3시간씩 자며 공부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서도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란 녹록지 않았다. 한 탈북민 친구는 영어 진행 수업을 알아들을 수 없어 강의실을 뛰쳐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명문대 졸업장을 받아든 게 2007년. 한국의 취업난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100곳 넘는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탈락이었다. 남한 출신 대졸자들도 바늘구멍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체념하는 심정으로 이력서 ‘군필’난에 ‘탈북민’ 표기를 지우고 지원서를 넣었다. ‘서류전형 합격’ 통지가 이어졌다. 탈북민에게 남한은, 생계를 잇기 위해 정체성을 지워야 하는 곳이었다.

[연관기사] 이력서에 '탈북' 지우니 합격…“우리도 국민입니다”

어렵게 취업한 뒤에도 통일 분야 연구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접지 못한 건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기 때문일 터다. 박사 학위를 받고 전주기전대 교수가 되기까지 그는 매일 같이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맞닥뜨렸다.

■‘탈북민’ 밝히면 태도 변해…편견의 양쪽 끝

남한 사람과 처음 만나 “탈북민”이라고 소개하면 열 중 아홉은 ‘가르치려’ 든다고 한다. 자본주의에선 이렇게 살아야 돼, 남한에 이런 게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다수의 남한 사람들이 탈북민들로부터 열등감을 고백 받는 방법으로 우월감을 챙긴다.

그러다 “교수”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의 태도는 확 바뀐단다. 탈북민과 대학교수 사이에서 그는 오늘도 편견의 양 극단을 체험한다.

주 교수는 “탈북민도 경쟁사회에 진입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특혜도 동정도 아닌 한 사람의 국민으로 자리잡기 위한 조건이란 얘기다. 물론 경쟁의 전제는, 편견이 아닌 동등한 기회다.

극단의 체험은 분단국가의 정치 상황과 맞물릴 때 한층 심해진다. 탈북민 단체 하면 대개 보수·우익·반공 단체를 떠올리게 된다. (기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탈북민 단체가 주로 이런 곳들이다.) 주 교수가 페이스북 창을 열어보였다. 한 탈북민 동료가 촛불집회에 나서며 참여를 독려하는 게시물이었다.


흔히 탈북민이라면 보수단체를 떠올리지만 촛불집회에 참가한 탈북민도 적지 않았다.


보수·진보 이분법이 아닌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갖는 다양성을, 탈북민을 국민으로 받아들인 이 사회는 얼마나 고려하고 있을까.

주 교수는 말한다. “경제적 이유로 탈북한 사람, 정치적으로 온 사람, 이민으로 온 사람, 유학으로 온 사람, 먼저 온 가족 따라 온 연계형 탈북…. 제각각 다 다릅니다. 탈북민이 3만2천 명이면요, 3만2천 개의 사연이 있는 겁니다.”

■ 매년 수십명 ‘탈남’(脫南)…“한반도 평화 시험대”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탈북민 수는 31,339명이다. 이들 가운데 차별과 생계 등의 문제로 남한을 떠나는 ‘탈남’ 대열 역시 매년 수십명씩 이어져, 현재까지 746명이 제3국행을 택했다. 캐나다 169명, 미국 113명, 영국 97명 등의 순이다. ‘탈북민 3만 명 시대’의 이면이다.


주승현 교수가 쓴 책 <조난자들>


탈북민 중 165명은 교도소 등에 수감 중이다. 마약, 사기·횡령, 살인 혐의 순이다. 22명은 연락 기피 등의 이유로 소재지가 파악되지 않고 있고, 12명은 북한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최근 남북 대화에 물꼬가 트인 것은 이론의 여지없이 반가운 일이다. 북한 비핵화와 전쟁 위협 억제, 대북제재 중단과 북미간 적대관계 해소 등 당면한 과제들은 어느 하나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지난한 과정의 목적지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라면, 남과 북의 시민들이 단계적으로 교류를 넓히고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 또한 당면 과제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주승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탈북민의 정착 과정은 남북 화해의 가능성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탈북민까지를 아우르는 사회 통합이 곧 통일에 이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통일에 앞서 분단을 성찰해야 합니다. 통합의 대상인 남북한이 서로를 알아가고 상생을 고민하며 통일을 하나의 과정으로 축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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