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5년간 자책했다는 그녀, 이젠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입력 2018.03.3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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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5년간 자책했다는 그녀, 이젠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취재후] 5년간 자책했다는 그녀, 이젠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자정이 다 된 시각. 까만 점퍼를 입은 20대 여성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옵니다. 목소리는 느리고 신중했지만, 아픈 기억을 꺼낼 때마다 그녀의 말에서는 자책감이 묻어났습니다. 예술가를 꿈꾸며 2011년 중앙대 조소과에 입학했던 A 씨입니다.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2번의 성폭행...자책하는 피해자

A 씨는 대학교 3학년이던 지난 2013년 4월, 강사로 있던 조각가 최 모 씨에게서 2번의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1차 성폭행은 강사 최 씨가 진행하던 <창작과 사회> 수업을 마치고, 현직 작가들과 함께한 술자리가 끝난 뒤에 발생했습니다.

A 씨는 화장실을 다녀온 뒤 최 씨가 준 술을 마시고,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깨어나 보니 모텔이었다는 겁니다. 강사 최 씨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처음이고 실수였고, 너는 특별하게 느껴졌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2차 성폭행은 강사 최 씨가 A 씨에게 사과를 하겠다며 만난 자리에서 이뤄졌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술을 마시더니, A 씨를 모텔로 강제로 끌고 가 다시 성폭행했다는 겁니다. A 씨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기둥을 붙잡으며 버티고, 싫다고 소리도 질렀지만, 최 씨의 완력을 이길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 씨는 이 부분에 대해 심하게 자책했습니다. 사과를 받겠다는 이유였지만, 성폭행 이후에도 최 씨를 다시 만나러 간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고, 수치스러웠다는 겁니다. '네가 자초한 것 아니냐'는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만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A씨가 2번이나 성폭행을 당하고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지난 5년 동안 입을 꾹 닫았던 이유입니다.

또 다른 성추행...지켜지지 않은 약속

강사 최 씨의 성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해당 과목의 종강파티(2013년 6월 12일) 때 술자리에 참석한 여자 학생들을 또다시 성추행한 겁니다. 해당 학생들은 바로 다음날 이 사실을 지도교수에게 알렸고, 중앙대 인권센터 측에도 신고했습니다.


결국, 최 씨는 사죄문을 발표하고, 이행각서까지 작성했습니다. "중앙대 강사를 그만두겠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폐쇄하고, 그동안 몸담아 온 협회 등에서 탈퇴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최 씨는 성추행 사실이 잠잠해지자 활발한 전시활동을 하면서, 여러 언론 매체에 주목받는 조각가로 소개됐습니다.

하지만, A 씨는 친구들이 강사 최 씨의 성추행을 고발할 때도, 자신이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두렵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무기력했다고 토로합니다.


그녀가 5년 만에 나선 이유

A 씨가 처음으로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알리고 나선 건 이달 초입니다. A 씨와 성추행 피해자들은 도심 빌딩 앞에 서 있는 조각가 최 씨의 공공설치물을 마주할 때마다 큰 분노를 느꼈다고 말합니다.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조각가 최 씨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친구들과 함께 결국 A 씨도 어렵게 입을 열게 된 겁니다. A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한(恨)이고 상처였던 부분은 제가 당시에 용기를 내지 않아서 다른 동기들이 당했다는 거거든요. 그것 때문에 너무 자책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용기를 냈더라면, 가해자는 진작 학교에서 사라졌을 거고, 제 친구들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이라도 제가 입을 연 이유는 똑같아요. 저희가 다시 방관하면 이런 일은 또 일어나요. 후배들이 또다시 2차 피해자가 될 수도 있어요."

A 씨와 다른 피해자 등 4명은 최 씨를 성폭행 혐의 등으로 서울 동작경찰서에 고소했습니다. 최 씨는 건강상의 이유와 자료 준비 등을 명목으로 2차례 출석을 미뤘습니다. 경찰은 4월 초에 최 씨를 다시 불러 이번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지금은 미술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는 A 씨는 기사가 나간 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공정한 수사가 이뤄져, 성폭력 피해자가 더는 자책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연관기사] “방관하면 되풀이된다” 중앙대 미대 졸업생의 #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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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5년간 자책했다는 그녀, 이젠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 입력 2018-03-31 14:57:20
    취재후·사건후
자정이 다 된 시각. 까만 점퍼를 입은 20대 여성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옵니다. 목소리는 느리고 신중했지만, 아픈 기억을 꺼낼 때마다 그녀의 말에서는 자책감이 묻어났습니다. 예술가를 꿈꾸며 2011년 중앙대 조소과에 입학했던 A 씨입니다.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2번의 성폭행...자책하는 피해자

A 씨는 대학교 3학년이던 지난 2013년 4월, 강사로 있던 조각가 최 모 씨에게서 2번의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1차 성폭행은 강사 최 씨가 진행하던 <창작과 사회> 수업을 마치고, 현직 작가들과 함께한 술자리가 끝난 뒤에 발생했습니다.

A 씨는 화장실을 다녀온 뒤 최 씨가 준 술을 마시고,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깨어나 보니 모텔이었다는 겁니다. 강사 최 씨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처음이고 실수였고, 너는 특별하게 느껴졌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2차 성폭행은 강사 최 씨가 A 씨에게 사과를 하겠다며 만난 자리에서 이뤄졌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술을 마시더니, A 씨를 모텔로 강제로 끌고 가 다시 성폭행했다는 겁니다. A 씨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기둥을 붙잡으며 버티고, 싫다고 소리도 질렀지만, 최 씨의 완력을 이길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 씨는 이 부분에 대해 심하게 자책했습니다. 사과를 받겠다는 이유였지만, 성폭행 이후에도 최 씨를 다시 만나러 간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고, 수치스러웠다는 겁니다. '네가 자초한 것 아니냐'는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만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A씨가 2번이나 성폭행을 당하고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지난 5년 동안 입을 꾹 닫았던 이유입니다.

또 다른 성추행...지켜지지 않은 약속

강사 최 씨의 성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해당 과목의 종강파티(2013년 6월 12일) 때 술자리에 참석한 여자 학생들을 또다시 성추행한 겁니다. 해당 학생들은 바로 다음날 이 사실을 지도교수에게 알렸고, 중앙대 인권센터 측에도 신고했습니다.


결국, 최 씨는 사죄문을 발표하고, 이행각서까지 작성했습니다. "중앙대 강사를 그만두겠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폐쇄하고, 그동안 몸담아 온 협회 등에서 탈퇴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최 씨는 성추행 사실이 잠잠해지자 활발한 전시활동을 하면서, 여러 언론 매체에 주목받는 조각가로 소개됐습니다.

하지만, A 씨는 친구들이 강사 최 씨의 성추행을 고발할 때도, 자신이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두렵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무기력했다고 토로합니다.


그녀가 5년 만에 나선 이유

A 씨가 처음으로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알리고 나선 건 이달 초입니다. A 씨와 성추행 피해자들은 도심 빌딩 앞에 서 있는 조각가 최 씨의 공공설치물을 마주할 때마다 큰 분노를 느꼈다고 말합니다.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조각가 최 씨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친구들과 함께 결국 A 씨도 어렵게 입을 열게 된 겁니다. A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한(恨)이고 상처였던 부분은 제가 당시에 용기를 내지 않아서 다른 동기들이 당했다는 거거든요. 그것 때문에 너무 자책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용기를 냈더라면, 가해자는 진작 학교에서 사라졌을 거고, 제 친구들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이라도 제가 입을 연 이유는 똑같아요. 저희가 다시 방관하면 이런 일은 또 일어나요. 후배들이 또다시 2차 피해자가 될 수도 있어요."

A 씨와 다른 피해자 등 4명은 최 씨를 성폭행 혐의 등으로 서울 동작경찰서에 고소했습니다. 최 씨는 건강상의 이유와 자료 준비 등을 명목으로 2차례 출석을 미뤘습니다. 경찰은 4월 초에 최 씨를 다시 불러 이번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지금은 미술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는 A 씨는 기사가 나간 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공정한 수사가 이뤄져, 성폭력 피해자가 더는 자책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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