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일본에 ‘책임 정치’는 없다

입력 2018.06.05 (11:27) 수정 2018.06.0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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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에서 연일 보도가 이어지면서 사회적으로 공분을 자아낸 사안 2가지가 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공을 이미 패스한 뒤 무방비 상태에 있던 쿼터백을 태클해 다치게 한 사건과 총리 부인이 명예 교장으로 있던 학교 법인에 국유지를 90% 가까이 헐값에 넘긴 사건이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 사회의 '책임성의 성숙도'라는 측면에서 묘하게 대비되는 두 사건을 들여다본다.

[연관 기사] [뉴스12] ‘日재무성 문서조작 사건…아베에 ‘면죄부’

■ "나는 직접 지시한 적이 없다"...그러나 책임은 진다.

지난달 열린 일본 대학 미식축구의 양대 명문인 니혼 대학과 간사이가쿠인 대학의 정기전.
간사이가쿠인 대학의 쿼터백(패스를 던져 공격수들의 공격을 지휘하는 사령탑)이 공을 던진 뒤, 그러니까 플레이가 일단 끝난 상태에서 상대 팀인 니혼대학의 수비수가 수십 미터를 뒤따라 달려가 뒤에서 거친 태클을 가했다.

공개된 영상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플레이가 끝난 뒤 경기와 무관하게 선수만을 노린 태클이라는 점이 명백했다. 여론이 들끓었다.



거기에 반칙을 한 선수가 경기 전 코치로부터 "쿼터백을 부숴버려"라는 말을 들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폭로하면서 파문은 더욱 커졌다.

이후 감독과 코치가 기자회견을 열고 '명시적'으로 지시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특정 선수에게 반칙하라는 말은 없었다는 것, 그 부분은 코치, 감독과 선수의 말이 일치한다.

단지 "부숴버려"라는 말만 있었다는 것인데...하지만 선수가 출장을 잘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이를 코치진이 이용한 듯한 언급을 했다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암묵적인 압력'이 있었다는 데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에 이르렀다.

결국, 해당 미식축구팀 감독은 감독직을 사임했고, 대학의 상임 이사직에서도 물러났다. 선수가 일종의 손타쿠(상대의 뜻을 헤아려 알아서 맞춰 행동한다는 일본식 조어)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들끓는 여론에 감독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직접 지시한 적이 없다"...그리고 책임도 안 진다.

지난해부터 제기돼 아베 정권의 도덕성에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학 스캔들'. 그 한 축인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은 총리 부인이 명예 교장으로 있던 학교 법인이 국유지를 90% 가까이 싸게 불하받았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학교 측이 땅을 구매하기 위해 협상하는 과정에서 정치권의 관련성이 해당 학교 법인 이사장의 직접 증언으로 대두됐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올해 들어서는 재무성이 당시 학교 법인과의 토지 가격 협상 과정을 담은 문서를 국회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조작하고 일부러 폐기하는 방법 등으로 총리 부부의 관련성을 약화하려 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4일 일본 재무성은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당시 담당 국장이 이를 주도했다며 정직 3개월에 해당하는 퇴직금 감액 처분(이미 퇴직한 상태이다)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관련 공무원 20명이 징계를 받은 매머드급 스캔들의 최종 발표였다.

특히 조사결과 지난해 2월 아베 총리가 국회 답변에서 "본인과 아내가 토지 거래에 관련됐다면 사임할 것"이라고 말한 뒤부터 일련의 부정행위가 시작됐다는 점도 밝혀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부서를 총괄하는 부총리에게 보고는 없었다고 면죄부를 줬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재무성을 총괄하고 있는 아소 부총리는 급여 1년 치를 자진 반납할 뜻은 밝혔지만 물러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밑에 사람이 알아서 한 행위라는 깊은 이해(?) 일까...

담당 국장의 단독 결정일 수 없다는 비판이 거세지만 일본 검찰도 여기에 발맞춰 문서 조작과 관련해 관련자를 기소하지 않기로 하면서 더 이상의 수사도, 그 배경을 캘 생각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아베 총리 또한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재발 방지책 마련에 아소 부총리 겸 재무상이 선두에 서서 책임을 다해주길 바란다"며 아소 부총리를 재신임했다.

그리고 한 기자의 "총리, 정치적 책임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 나가던 아베 총리, 마지 못해 다시 돌아와 "정치적 책임은 이러한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비켜갔다.


아소 부총리를 끝까지 감싸는 아베 총리의 태도에 대해 9월 총재 선거에서 '아소 부총리 파벌'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분석, 그리고 아소 총리를 경질할 경우 바로 그다음에는 총리 책임론이 등장할 거라는 '이와 잇몸론' 등이 나오는 실정이다.

이유야 어떻든 중앙 행정부의 핵심 부서 공무원이 총리와 관련된 사안으로 20명이나 징계를 받았지만 결국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상황으로 사학 스캔들의 한 막이 또 내려가고 있다. 2012년 2차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일본에서 사라져버린 '책임 정치'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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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일본에 ‘책임 정치’는 없다
    • 입력 2018-06-05 11:27:33
    • 수정2018-06-05 17:13:50
    특파원 리포트
최근 일본에서 연일 보도가 이어지면서 사회적으로 공분을 자아낸 사안 2가지가 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공을 이미 패스한 뒤 무방비 상태에 있던 쿼터백을 태클해 다치게 한 사건과 총리 부인이 명예 교장으로 있던 학교 법인에 국유지를 90% 가까이 헐값에 넘긴 사건이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 사회의 '책임성의 성숙도'라는 측면에서 묘하게 대비되는 두 사건을 들여다본다.

[연관 기사] [뉴스12] ‘日재무성 문서조작 사건…아베에 ‘면죄부’

■ "나는 직접 지시한 적이 없다"...그러나 책임은 진다.

지난달 열린 일본 대학 미식축구의 양대 명문인 니혼 대학과 간사이가쿠인 대학의 정기전.
간사이가쿠인 대학의 쿼터백(패스를 던져 공격수들의 공격을 지휘하는 사령탑)이 공을 던진 뒤, 그러니까 플레이가 일단 끝난 상태에서 상대 팀인 니혼대학의 수비수가 수십 미터를 뒤따라 달려가 뒤에서 거친 태클을 가했다.

공개된 영상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플레이가 끝난 뒤 경기와 무관하게 선수만을 노린 태클이라는 점이 명백했다. 여론이 들끓었다.



거기에 반칙을 한 선수가 경기 전 코치로부터 "쿼터백을 부숴버려"라는 말을 들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폭로하면서 파문은 더욱 커졌다.

이후 감독과 코치가 기자회견을 열고 '명시적'으로 지시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특정 선수에게 반칙하라는 말은 없었다는 것, 그 부분은 코치, 감독과 선수의 말이 일치한다.

단지 "부숴버려"라는 말만 있었다는 것인데...하지만 선수가 출장을 잘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이를 코치진이 이용한 듯한 언급을 했다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암묵적인 압력'이 있었다는 데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에 이르렀다.

결국, 해당 미식축구팀 감독은 감독직을 사임했고, 대학의 상임 이사직에서도 물러났다. 선수가 일종의 손타쿠(상대의 뜻을 헤아려 알아서 맞춰 행동한다는 일본식 조어)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들끓는 여론에 감독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직접 지시한 적이 없다"...그리고 책임도 안 진다.

지난해부터 제기돼 아베 정권의 도덕성에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학 스캔들'. 그 한 축인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은 총리 부인이 명예 교장으로 있던 학교 법인이 국유지를 90% 가까이 싸게 불하받았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학교 측이 땅을 구매하기 위해 협상하는 과정에서 정치권의 관련성이 해당 학교 법인 이사장의 직접 증언으로 대두됐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올해 들어서는 재무성이 당시 학교 법인과의 토지 가격 협상 과정을 담은 문서를 국회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조작하고 일부러 폐기하는 방법 등으로 총리 부부의 관련성을 약화하려 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4일 일본 재무성은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당시 담당 국장이 이를 주도했다며 정직 3개월에 해당하는 퇴직금 감액 처분(이미 퇴직한 상태이다)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관련 공무원 20명이 징계를 받은 매머드급 스캔들의 최종 발표였다.

특히 조사결과 지난해 2월 아베 총리가 국회 답변에서 "본인과 아내가 토지 거래에 관련됐다면 사임할 것"이라고 말한 뒤부터 일련의 부정행위가 시작됐다는 점도 밝혀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부서를 총괄하는 부총리에게 보고는 없었다고 면죄부를 줬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재무성을 총괄하고 있는 아소 부총리는 급여 1년 치를 자진 반납할 뜻은 밝혔지만 물러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밑에 사람이 알아서 한 행위라는 깊은 이해(?) 일까...

담당 국장의 단독 결정일 수 없다는 비판이 거세지만 일본 검찰도 여기에 발맞춰 문서 조작과 관련해 관련자를 기소하지 않기로 하면서 더 이상의 수사도, 그 배경을 캘 생각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아베 총리 또한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재발 방지책 마련에 아소 부총리 겸 재무상이 선두에 서서 책임을 다해주길 바란다"며 아소 부총리를 재신임했다.

그리고 한 기자의 "총리, 정치적 책임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 나가던 아베 총리, 마지 못해 다시 돌아와 "정치적 책임은 이러한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비켜갔다.


아소 부총리를 끝까지 감싸는 아베 총리의 태도에 대해 9월 총재 선거에서 '아소 부총리 파벌'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분석, 그리고 아소 총리를 경질할 경우 바로 그다음에는 총리 책임론이 등장할 거라는 '이와 잇몸론' 등이 나오는 실정이다.

이유야 어떻든 중앙 행정부의 핵심 부서 공무원이 총리와 관련된 사안으로 20명이나 징계를 받았지만 결국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상황으로 사학 스캔들의 한 막이 또 내려가고 있다. 2012년 2차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일본에서 사라져버린 '책임 정치'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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