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흩어지는 1,273명의 기억’…치매와 싸우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대모

입력 2018.11.11 (08:06) 수정 2018.11.1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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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의 외딴 요양병원엔 특별한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는 99살 이금주 할머니입니다. 주름살 사이사이 세월이 내려앉은 노인들 중 그 누가 나름의 사연을 안고 있지 않겠느냐마는, 이금주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쩐지 조금 더 마음을 시리게 하는 데가 있습니다.


내년이면 백 살이 되는 고령인 데다 치매까지 앓아 거동은 물론 대화도 힘든 실정이지만, 할머니는 치매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징용 피해자 1273명의 기억을 홀로 간직했었다고 합니다. 치매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할머니의 기억 속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요?


1942년, 남편이 강제 징용되며 할머니의 행복했던 신혼생활은 비극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8개월 된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전쟁에 끌려간 남편.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갓난아기 이불을 젖혀 놓고 (얼마나 자랐는지) 재보곤 했습니다. 징용 통지를 받고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그런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남편 김도민 씨에 대한 할머니의 기억은 항상 그리움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강제징용된 이듬해 먼 이국땅, 남태평양 타라와 섬에서 전사했습니다. 해방을 고작 몇 달 앞두고 전사통지서가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산 지 40여 년.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인생의 황혼에 막 접어들기 시작한 예순아홉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묻어두었던 가슴 한 켠의 그리움과 아픔을 밖으로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숨을 돌리며 지친 마음과 몸을 추스르기 시작할 나이에 강제징용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모으기 시작한 겁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 유족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광주 진월동, 할머니의 작은 집이 그대로 유족회 사무실이 됐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모두 할머니와 비슷한 아픔을 공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들, 며느리, 손녀까지 동원돼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접했습니다. 때로는 신발을 놓을 자리가 없어 이중 삼중으로 겹쳐 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 할머니를 기억하는 동료들에겐 한쪽엔 사전을, 한쪽엔 각종 서류를 수북이 쌓아놓고 일하던 모습이 선명합니다. 할머니는 유족회를 찾은 강제징용 피해자와 가족들의 기억을 손수 꾹꾹 눌러쓰며 정리했고, 세월에 묻힐 뻔한 기억에서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그렇게 모인 1273명의 사연. 할머니는 그 기억을 들고 일본을 상대로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천 명이 넘는 원고가 소송에 참여했다고 해 이른바 '천인 소송'으로 불립니다.

천인 소송(1992)을 시작으로 위안부·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관부재판(1992), 한일협정 문서 공개 소송 (2002) 등 강제소송 피해자들의 권리를 위한 굵직한 소송들 상당수가 할머니의 손을 거쳤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바다에 수장됐던 '우키시마마루 사건'의 희생자 명단도 역시 할머니를 거쳐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정부조차 나 몰라라 하던 시절, 할머니는 이미 백발이 된 몸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발굴하고,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그 시절 KBS의 뉴스와 각종 프로그램에서도 할머니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단정히 묶은 희끗한 머리와 주름진 얼굴. 하지만 누구보다 강인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던 모습을 말입니다.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이 할머니가 '친언니와 같았다'고 추억했습니다. 90년대 초반 처음 만난 이후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가족 같은 사이로 지냈다는 두 할머니.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누운 이 할머니를 만나고 양 할머니는 차마 그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 없어 병실을 빠져나와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고 합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며 곁에서 할머니를 지켜본 동료들은 할머니를 아직도 유족회 '회장님'으로 기억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할머니의 모습이 선연하기 때문입니다.

아들 내외가 먼저 세상을 등지고 할머니가 병상에 눕게 되면서 광주유족회도 없어졌고, 광주 진월동에 있던 할머니의 각종 기록물은 현재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보관돼있습니다. 슬쩍 넘겨봤을 뿐이지만 쉽지 않은 싸움을 계속해온 할머니의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헛짓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과 남이 하는 일까지 망치는 사람이오, 아직도 일본을 두둔하는 친일파에 불과합니다. 좌절하거나 포기하면 오히려 안 한 것만 못 할뿐더러 일본은 코웃음 치면서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광주유족회 월례 회의 자리, 정부의 도움 없이 유족회의 힘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회원들을 할머니는 이렇게 독려했습니다. 역시 할머니가 자필로 남긴 기록입니다.

시민모임의 이국언 대표는 이런 기록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전산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아마 동료들이 할머니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 방법일 겁니다.


얼마 전 할머니의 남편 김도민 씨가 숨진 타라와 섬에서 김 모 씨라고 적힌 누군가의 유품이 발견됐습니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의 손녀는 가슴이 철렁했다고 합니다. 혹시나 할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약 할머니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할머니는 평생 남편의 유해를 찾지 못했고, 그저 타라와 섬을 찾아 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남편이 전사한 지 75년 만에야 타라와 섬에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할머니에게는 닿지 못합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와 동료들의 마음이 더 아픈 이유입니다.


요양병원에서 만난 할머니는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잠시 앉아있는 것조차 버거워했습니다. 그저 눈을 맞추고 깜빡일 뿐, 대화도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인지 치매로 기억이 흐려진 뒤에도 가끔 일본어를 하거나 일본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그조차 하지 못하신다고 했습니다.

과거 건강했던 시절의 할머니와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할머니가 일생을 그리워했던 남편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김도민 씨를 아시느냐고 물은 기자에게 할머니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기억도, 손수 기록했던 강제징용 피해자 1273명의 기억도 이제 어디론가 흩어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서는 길. 여러 감정과 생각이 교차했지만 그저 건강하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연관 기사] [뉴스9] ‘강제 징용’ 끌려간 남편 기다리며 한평생…99살 할머니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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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흩어지는 1,273명의 기억’…치매와 싸우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대모
    • 입력 2018-11-11 08:06:54
    • 수정2018-11-11 13:59:12
    취재후·사건후
전남 순천의 외딴 요양병원엔 특별한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는 99살 이금주 할머니입니다. 주름살 사이사이 세월이 내려앉은 노인들 중 그 누가 나름의 사연을 안고 있지 않겠느냐마는, 이금주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쩐지 조금 더 마음을 시리게 하는 데가 있습니다.


내년이면 백 살이 되는 고령인 데다 치매까지 앓아 거동은 물론 대화도 힘든 실정이지만, 할머니는 치매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징용 피해자 1273명의 기억을 홀로 간직했었다고 합니다. 치매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할머니의 기억 속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요?


1942년, 남편이 강제 징용되며 할머니의 행복했던 신혼생활은 비극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8개월 된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전쟁에 끌려간 남편.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갓난아기 이불을 젖혀 놓고 (얼마나 자랐는지) 재보곤 했습니다. 징용 통지를 받고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그런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남편 김도민 씨에 대한 할머니의 기억은 항상 그리움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강제징용된 이듬해 먼 이국땅, 남태평양 타라와 섬에서 전사했습니다. 해방을 고작 몇 달 앞두고 전사통지서가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산 지 40여 년.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인생의 황혼에 막 접어들기 시작한 예순아홉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묻어두었던 가슴 한 켠의 그리움과 아픔을 밖으로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숨을 돌리며 지친 마음과 몸을 추스르기 시작할 나이에 강제징용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모으기 시작한 겁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 유족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광주 진월동, 할머니의 작은 집이 그대로 유족회 사무실이 됐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모두 할머니와 비슷한 아픔을 공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들, 며느리, 손녀까지 동원돼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접했습니다. 때로는 신발을 놓을 자리가 없어 이중 삼중으로 겹쳐 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 할머니를 기억하는 동료들에겐 한쪽엔 사전을, 한쪽엔 각종 서류를 수북이 쌓아놓고 일하던 모습이 선명합니다. 할머니는 유족회를 찾은 강제징용 피해자와 가족들의 기억을 손수 꾹꾹 눌러쓰며 정리했고, 세월에 묻힐 뻔한 기억에서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그렇게 모인 1273명의 사연. 할머니는 그 기억을 들고 일본을 상대로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천 명이 넘는 원고가 소송에 참여했다고 해 이른바 '천인 소송'으로 불립니다.

천인 소송(1992)을 시작으로 위안부·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관부재판(1992), 한일협정 문서 공개 소송 (2002) 등 강제소송 피해자들의 권리를 위한 굵직한 소송들 상당수가 할머니의 손을 거쳤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바다에 수장됐던 '우키시마마루 사건'의 희생자 명단도 역시 할머니를 거쳐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정부조차 나 몰라라 하던 시절, 할머니는 이미 백발이 된 몸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발굴하고,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그 시절 KBS의 뉴스와 각종 프로그램에서도 할머니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단정히 묶은 희끗한 머리와 주름진 얼굴. 하지만 누구보다 강인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던 모습을 말입니다.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이 할머니가 '친언니와 같았다'고 추억했습니다. 90년대 초반 처음 만난 이후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가족 같은 사이로 지냈다는 두 할머니.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누운 이 할머니를 만나고 양 할머니는 차마 그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 없어 병실을 빠져나와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고 합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며 곁에서 할머니를 지켜본 동료들은 할머니를 아직도 유족회 '회장님'으로 기억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할머니의 모습이 선연하기 때문입니다.

아들 내외가 먼저 세상을 등지고 할머니가 병상에 눕게 되면서 광주유족회도 없어졌고, 광주 진월동에 있던 할머니의 각종 기록물은 현재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보관돼있습니다. 슬쩍 넘겨봤을 뿐이지만 쉽지 않은 싸움을 계속해온 할머니의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헛짓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과 남이 하는 일까지 망치는 사람이오, 아직도 일본을 두둔하는 친일파에 불과합니다. 좌절하거나 포기하면 오히려 안 한 것만 못 할뿐더러 일본은 코웃음 치면서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광주유족회 월례 회의 자리, 정부의 도움 없이 유족회의 힘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회원들을 할머니는 이렇게 독려했습니다. 역시 할머니가 자필로 남긴 기록입니다.

시민모임의 이국언 대표는 이런 기록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전산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아마 동료들이 할머니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 방법일 겁니다.


얼마 전 할머니의 남편 김도민 씨가 숨진 타라와 섬에서 김 모 씨라고 적힌 누군가의 유품이 발견됐습니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의 손녀는 가슴이 철렁했다고 합니다. 혹시나 할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약 할머니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할머니는 평생 남편의 유해를 찾지 못했고, 그저 타라와 섬을 찾아 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남편이 전사한 지 75년 만에야 타라와 섬에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할머니에게는 닿지 못합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와 동료들의 마음이 더 아픈 이유입니다.


요양병원에서 만난 할머니는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잠시 앉아있는 것조차 버거워했습니다. 그저 눈을 맞추고 깜빡일 뿐, 대화도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인지 치매로 기억이 흐려진 뒤에도 가끔 일본어를 하거나 일본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그조차 하지 못하신다고 했습니다.

과거 건강했던 시절의 할머니와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할머니가 일생을 그리워했던 남편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김도민 씨를 아시느냐고 물은 기자에게 할머니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기억도, 손수 기록했던 강제징용 피해자 1273명의 기억도 이제 어디론가 흩어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서는 길. 여러 감정과 생각이 교차했지만 그저 건강하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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