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학살보고서]① 검시 기록으로 본 학살

입력 2019.05.22 (17:27) 수정 2019.05.2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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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모습입니다. 당시 계엄군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진압 장면의 하나입니다.

1980년 잔혹했던 5월....한 도시에서 열흘동안 165명 사망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동안 숨진 희생자는 몇 명일까? 검시보고서 등을 통해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165명입니다. 당시 광주직할시의 인구가 87만 3천여 명이었으니, 짧은 기간에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희생자 165명이 어떻게 사망에 이르게 됐는지 살펴봤습니다. 총상이 131명으로 가장 많았고, 특수 제작된 진압봉이나 소총 개머리판 등에 맞은 타박상이 18명, 차량 사고가 12명이었습니다. 심지어 대검에 찔린 사람도 4명이나 됩니다.

신군부 작성 5.18 사망자 165명 사인별 분류신군부 작성 5.18 사망자 165명 사인별 분류

전두환 씨 등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위해 자위권이 발동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사망한 165명은 계엄군에 위협을 가할만큼 극렬한 시위를 했던 걸까요. 또는 시위에 가담했다면 잔혹하고, 끔찍하게 진압을 해도 되는 걸까요.

'고의적이고 악질적 의도 드러나'...신군부도 숨기려 했던 검시결과 검토 보고서

신군부도 이같은 점을 의식했는지 사망자들의 검시 결과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1985년 6월 작성된 '5·18 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 보고섭니다.


‘5·18 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 보고서‘5·18 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 보고서

▲8발의 총탄이 관통한 사망자 ▲유방이 칼에 찔리고 총탄 2발에 맞은 19살 여성 ▲임신 7개월의 임신부 사망 ▲온몸을 두들겨 맞은 뒤 총에 맞은 숨진 남성 등 시신에 '잔인한 상흔'이 많다고 기록했습니다.

특히 후면의 총상, 두개골의 자상 등을 볼 때 방어적 살인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악질적인 의도가 드러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때문에 국회 자료 제출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고하고 실제 제출하지도 않았습니다.

"국민 대상 시위 진압 아니라 적을 대상으로 전투"

전문가들은 5.18의 잔인한 학살행위는 1979년 부마항쟁 진압 경험이 바탕이 됐다고 분석합니다.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항쟁 교훈집을 보면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하고, 간담을 서늘케해 데모 의지를 상실하도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보안사 작성 부마항쟁 교훈집 중보안사 작성 부마항쟁 교훈집 중

이에대해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당시 신군부가 정권 장악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공수부대 투입 자체가 말이 안된다"며 "국민들을 대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게 아니라 적을 대상으로 전투를 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연관기사] 검시 기록으로 본 5·18…“잔혹한 학살·고의적 살인”
광주총국 기획 ① 다시보는 5.18 검시기록 “잔혹한 학살·고의적 살인”

[5·18 학살보고서]
① 검시 기록으로 본 학살
② 초등생·주부·부상자 총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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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학살보고서]① 검시 기록으로 본 학살
    • 입력 2019-05-22 17:27:42
    • 수정2019-05-22 18:08:51
    취재K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모습입니다. 당시 계엄군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진압 장면의 하나입니다.

1980년 잔혹했던 5월....한 도시에서 열흘동안 165명 사망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동안 숨진 희생자는 몇 명일까? 검시보고서 등을 통해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165명입니다. 당시 광주직할시의 인구가 87만 3천여 명이었으니, 짧은 기간에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희생자 165명이 어떻게 사망에 이르게 됐는지 살펴봤습니다. 총상이 131명으로 가장 많았고, 특수 제작된 진압봉이나 소총 개머리판 등에 맞은 타박상이 18명, 차량 사고가 12명이었습니다. 심지어 대검에 찔린 사람도 4명이나 됩니다.

신군부 작성 5.18 사망자 165명 사인별 분류
전두환 씨 등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위해 자위권이 발동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사망한 165명은 계엄군에 위협을 가할만큼 극렬한 시위를 했던 걸까요. 또는 시위에 가담했다면 잔혹하고, 끔찍하게 진압을 해도 되는 걸까요.

'고의적이고 악질적 의도 드러나'...신군부도 숨기려 했던 검시결과 검토 보고서

신군부도 이같은 점을 의식했는지 사망자들의 검시 결과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1985년 6월 작성된 '5·18 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 보고섭니다.


‘5·18 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 보고서
▲8발의 총탄이 관통한 사망자 ▲유방이 칼에 찔리고 총탄 2발에 맞은 19살 여성 ▲임신 7개월의 임신부 사망 ▲온몸을 두들겨 맞은 뒤 총에 맞은 숨진 남성 등 시신에 '잔인한 상흔'이 많다고 기록했습니다.

특히 후면의 총상, 두개골의 자상 등을 볼 때 방어적 살인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악질적인 의도가 드러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때문에 국회 자료 제출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고하고 실제 제출하지도 않았습니다.

"국민 대상 시위 진압 아니라 적을 대상으로 전투"

전문가들은 5.18의 잔인한 학살행위는 1979년 부마항쟁 진압 경험이 바탕이 됐다고 분석합니다.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항쟁 교훈집을 보면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하고, 간담을 서늘케해 데모 의지를 상실하도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보안사 작성 부마항쟁 교훈집 중
이에대해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당시 신군부가 정권 장악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공수부대 투입 자체가 말이 안된다"며 "국민들을 대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게 아니라 적을 대상으로 전투를 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연관기사] 검시 기록으로 본 5·18…“잔혹한 학살·고의적 살인”
광주총국 기획 ① 다시보는 5.18 검시기록 “잔혹한 학살·고의적 살인”

[5·18 학살보고서]
① 검시 기록으로 본 학살
② 초등생·주부·부상자 총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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