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② “죽으면 해부하는 데 몸을 맡겨 연구하고 싶어요”

입력 2020.02.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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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피해 신고하고 2014년 받은 통지서 이게 다예요.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당신 자녀는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 적힌 한 장. 의료기록을 수백 장 냈는데 너무 적힌 게 없었죠. 밤톨이는 임신 28주에 사망해서 이름도 없고 주민등록번호도 없어요. 서류화조차 되지 못했어요. 밤톨이는 판정 불가에요. 태아 보상 기준을 산모가 폐 질환 1, 2단계인 경우로 국한해놨기 때문이에요. 이 말은 엄마가 물리적으로 숨을 못 쉬어서 죽을 만해야 배 속 아기도 숨을 못 쉬었다고 여기는 거예요. 제 폐가 썩어나가면 밝힐 수 있겠죠. 제가 멀쩡한 걸 정부가 비웃는 것 같아요." - 권민정 씨

"피해 접수하면서 폐 섬유화 사진, 폐 이식 수술한 내용, 폐 조직검사 결과 등을 다 보냈어요. 설마 2단계는 나오겠지 했는데 3단계래요. 살균제 노출 당시 배 속에 있던 작은 아이는 3단계래요. 저를 3단계 줘버리니 작은 애도 인정을 안 하는 거죠. 큰 애는 4단계를 받았어요. 희소병을 앓았지만 폐 질환이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기존에 질병이 있는 경우에는 절대 인정을 안 하더라고요. 기준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보상 안 해주겠다는 소리죠." - 윤미애 씨

"가습기 살균제 판매한 사람하고, 이상 없다는 의사하고, 허가 내준 사람, 그 사람들을 저처럼 한 곳에 몰아넣고 한 달만 가습기 살균제 써보라고 하고 싶어요. 그러면 우리가 부르짖지 않아도 자기네 몸에 어떤 이상이 생기는지 보여줄 수 있지 않나요. 어떤 사람은 '너는 뭐 핑계가 가습기냐?'라고 하는데 어떡하겠어요, 제가 쓴 게 그건데. 나중에 죽으면 해부하는 데라도 내 몸을 맡겨서 연구하라고 하고 싶어요. 어디까지 피해를 입었는지 꼭 밝혀졌으면 좋겠어요." - 김현정 씨(가명)

피해자들의 인터뷰 속에 꼭 등장하는 3단계, 4단계... 현재 정부가 가습기 피해자로 인정하는 등급을 뜻합니다. 폐 질환 1단계는 가능성 거의 확실, 2단계는 가능성 높음, 3단계 가능성 낮음, 4단계는 가능성 거의 없음입니다. 그 밖의 질환은 인정, 불인정으로 나뉩니다.

이 등급이 중요한 이유는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과 연관돼있기 때문입니다. 지원 기준은 크게 '구제급여'와 '특별구제계정'으로 나뉩니다. 구제급여는 폐 질환 1, 2단계와 천식, 아동 간질성 폐 질환 등입니다. 특별구제계정은 폐 질환 3단계와 구제급여 대상이 아닌 천식, 폐렴, 간질성 폐 질환 등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질환과의 인과관계가 명확하다고 판단한 것이 '구제급여', 상대적으로 덜 명확하다고 판단한 것이 '특별구제계정'입니다. 이 때문에 구제급여는 정부 예산, 특별구제계정은 기업 돈으로 지원합니다. 당연히 특별구제계정 피해자들은 정부가 인정해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업과 손해배상 소송 등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중 정부에게 인정받은 '구제급여' 대상자는 895명으로 전체 피해 신청자의 13.3% 수준에 불과합니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질병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누락', '착오'...입증 책임은 오로지 '피해자 몫'

"2011년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정부가 나서서 뭘 하는 모양새도 없었어요. 대책 내놓으라고 가서 시위하면 공무원들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당장 달려들어서 우리가 원인 규명하겠다고 말하고 입증하는 일을 했어야죠. 하는 말이 '너네는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어, 대표단체를 만들어 와', 이게 말이 되나요? 자기네들이 환자를 모으고, 조직을 만들어서 대응할 수 있게 힘을 실어줘야죠." - 우승하 씨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보라매병원 기록이 통째로 누락된 거에요. 종합지원센터에 연락해보니 자기네들한테도 없대요. 접수 누락된 거에 대해 사과도 안 해요. 내가 접수 안 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해요. 국민건강보험공단 기록을 보면 다 남아 있어요. 그것만 없어진 줄 알았는데 확인해보니 내가 보낸 중요한 자료 대부분이 없어요. 처음에는 서류만 제출하면 알아서 다 해줄 거라 순진하게 생각했는데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나 싶어요." - 하영림 씨(가명)

"피해 접수해놓고 1년 반 동안 연락이 없어서 센터에 전화해봤어요. 한다는 소리가 문자 통보를 했대요. 답변이 없어서 접수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번호가 011인데 번호를 잘못 적었다고 생각하고 010으로 문자를 보낸 거래요. 구두로 해야지 무슨 문자 통보를 해요. 1년 반 동안 시간이 날아간 거에요." - 문동익 씨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가해기업 임직원을 엄벌해달라고 촉구하고 있다.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가해기업 임직원을 엄벌해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피해자로 입증받기 위한 지난한 과정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정부의 역할은 부재했다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시민 건강과 안전에 관해선 '큰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환경보건학과 박동욱 교수는 "정부가 어떤 물질을 '허가'한다는 건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지금 감당을 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특히, 사고 이후의 포용적 대책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박 교수는 "피해 조사와 검증은 매우 중요하지만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피해자들의 삶이 없어지는 불행은 정부가 막아야 한다"면서 "위험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피해자의 다음 사회를 잘 만들기 위한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곁에서일어나고있는일] 3편에서는 힘든 시간을 겪은 피해자들이 9년 동안 받은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과 지금도 길거리에서 목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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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② “죽으면 해부하는 데 몸을 맡겨 연구하고 싶어요”
    • 입력 2020-02-10 08:00:11
    취재K
"2013년 피해 신고하고 2014년 받은 통지서 이게 다예요.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당신 자녀는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 적힌 한 장. 의료기록을 수백 장 냈는데 너무 적힌 게 없었죠. 밤톨이는 임신 28주에 사망해서 이름도 없고 주민등록번호도 없어요. 서류화조차 되지 못했어요. 밤톨이는 판정 불가에요. 태아 보상 기준을 산모가 폐 질환 1, 2단계인 경우로 국한해놨기 때문이에요. 이 말은 엄마가 물리적으로 숨을 못 쉬어서 죽을 만해야 배 속 아기도 숨을 못 쉬었다고 여기는 거예요. 제 폐가 썩어나가면 밝힐 수 있겠죠. 제가 멀쩡한 걸 정부가 비웃는 것 같아요." - 권민정 씨

"피해 접수하면서 폐 섬유화 사진, 폐 이식 수술한 내용, 폐 조직검사 결과 등을 다 보냈어요. 설마 2단계는 나오겠지 했는데 3단계래요. 살균제 노출 당시 배 속에 있던 작은 아이는 3단계래요. 저를 3단계 줘버리니 작은 애도 인정을 안 하는 거죠. 큰 애는 4단계를 받았어요. 희소병을 앓았지만 폐 질환이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기존에 질병이 있는 경우에는 절대 인정을 안 하더라고요. 기준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보상 안 해주겠다는 소리죠." - 윤미애 씨

"가습기 살균제 판매한 사람하고, 이상 없다는 의사하고, 허가 내준 사람, 그 사람들을 저처럼 한 곳에 몰아넣고 한 달만 가습기 살균제 써보라고 하고 싶어요. 그러면 우리가 부르짖지 않아도 자기네 몸에 어떤 이상이 생기는지 보여줄 수 있지 않나요. 어떤 사람은 '너는 뭐 핑계가 가습기냐?'라고 하는데 어떡하겠어요, 제가 쓴 게 그건데. 나중에 죽으면 해부하는 데라도 내 몸을 맡겨서 연구하라고 하고 싶어요. 어디까지 피해를 입었는지 꼭 밝혀졌으면 좋겠어요." - 김현정 씨(가명)

피해자들의 인터뷰 속에 꼭 등장하는 3단계, 4단계... 현재 정부가 가습기 피해자로 인정하는 등급을 뜻합니다. 폐 질환 1단계는 가능성 거의 확실, 2단계는 가능성 높음, 3단계 가능성 낮음, 4단계는 가능성 거의 없음입니다. 그 밖의 질환은 인정, 불인정으로 나뉩니다.

이 등급이 중요한 이유는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과 연관돼있기 때문입니다. 지원 기준은 크게 '구제급여'와 '특별구제계정'으로 나뉩니다. 구제급여는 폐 질환 1, 2단계와 천식, 아동 간질성 폐 질환 등입니다. 특별구제계정은 폐 질환 3단계와 구제급여 대상이 아닌 천식, 폐렴, 간질성 폐 질환 등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질환과의 인과관계가 명확하다고 판단한 것이 '구제급여', 상대적으로 덜 명확하다고 판단한 것이 '특별구제계정'입니다. 이 때문에 구제급여는 정부 예산, 특별구제계정은 기업 돈으로 지원합니다. 당연히 특별구제계정 피해자들은 정부가 인정해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업과 손해배상 소송 등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중 정부에게 인정받은 '구제급여' 대상자는 895명으로 전체 피해 신청자의 13.3% 수준에 불과합니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질병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누락', '착오'...입증 책임은 오로지 '피해자 몫'

"2011년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정부가 나서서 뭘 하는 모양새도 없었어요. 대책 내놓으라고 가서 시위하면 공무원들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당장 달려들어서 우리가 원인 규명하겠다고 말하고 입증하는 일을 했어야죠. 하는 말이 '너네는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어, 대표단체를 만들어 와', 이게 말이 되나요? 자기네들이 환자를 모으고, 조직을 만들어서 대응할 수 있게 힘을 실어줘야죠." - 우승하 씨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보라매병원 기록이 통째로 누락된 거에요. 종합지원센터에 연락해보니 자기네들한테도 없대요. 접수 누락된 거에 대해 사과도 안 해요. 내가 접수 안 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해요. 국민건강보험공단 기록을 보면 다 남아 있어요. 그것만 없어진 줄 알았는데 확인해보니 내가 보낸 중요한 자료 대부분이 없어요. 처음에는 서류만 제출하면 알아서 다 해줄 거라 순진하게 생각했는데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나 싶어요." - 하영림 씨(가명)

"피해 접수해놓고 1년 반 동안 연락이 없어서 센터에 전화해봤어요. 한다는 소리가 문자 통보를 했대요. 답변이 없어서 접수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번호가 011인데 번호를 잘못 적었다고 생각하고 010으로 문자를 보낸 거래요. 구두로 해야지 무슨 문자 통보를 해요. 1년 반 동안 시간이 날아간 거에요." - 문동익 씨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가해기업 임직원을 엄벌해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피해자로 입증받기 위한 지난한 과정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정부의 역할은 부재했다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시민 건강과 안전에 관해선 '큰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환경보건학과 박동욱 교수는 "정부가 어떤 물질을 '허가'한다는 건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지금 감당을 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특히, 사고 이후의 포용적 대책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박 교수는 "피해 조사와 검증은 매우 중요하지만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피해자들의 삶이 없어지는 불행은 정부가 막아야 한다"면서 "위험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피해자의 다음 사회를 잘 만들기 위한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곁에서일어나고있는일] 3편에서는 힘든 시간을 겪은 피해자들이 9년 동안 받은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과 지금도 길거리에서 목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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