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③ “아이한테 최소한의 용서받기 위해”

입력 2020.02.11 (08:01) 수정 2020.02.1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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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건강을 위해 썼던 가습기 살균제가 독이 돼 돌아왔습니다. 자책의 세월을 보낸 피해자들은 좌절하지 않고,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를 꾸준히 사용했다는 것부터 이로 인해 병을 얻었다는 사실까지 하나하나 스스로 입증해야만 했습니다.

가습기 참사 피해자들의 지난 9년 간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기록집에는 그들이 겪은 사회의 냉소와 무관심도 담겨있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 싸움이 길어지자 사람들의 시선도 변했습니다. 관심에서 멀어졌고, 눈총은 따가워졌습니다. 이 기록집을 발간하기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참사 특조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아는 언니가 저한테 '어떻게 모든 사람을 정부가 다 해결해주냐. 가습기 살균제 문제도 정부의 잘못이 아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화가 났어요. 왜 정부의 잘못이 아니에요? 허가를 해줬는데, 인체에 무해하다고 국민한테 써도 된다고 했잖아요. 사람들은 '아직도야? 아직도 떠들어?' 그래요. 해결된 거 하나도 없거든요? 아직도 떠드는 게 아니라 아직도 시작을 안 했어요. 그런 쉽게 던지는 말들이 다 상처에요." -김현정 씨(가명)

"옥시 사옥 앞에서 꾸준히 시위하고 있어요. 피켓 들고 서 있으면 사람들이 그래요. '저거 해결된 거 아니야?' 이 추운데, 그 더운데도 나가는 건 잊히지 않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에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야죠. 내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하고, 자식이 아파서 돌봐줘야 하고, 한계가 있지만 계속 나가고 있어요. 증거 자료를 남기려고 매번 사진을 찍거든요? 지나가는 분들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다 피해요. 내 카메라로 찍어달라는데 그게 좀 그렇대요."- 추준영 씨

"숨기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폐가 안 좋다고 하면 다 폐결핵으로 봐요. 그래서 기피 대상이에요. 옆에 가면 안 된다. 자기한테 옮을까 봐 무서운 거죠. 그러니까 표시를 낼 수 없더라고요. 기침 나와도 '별거 아니야'하고 넘어가고, 속은 호흡곤란이 오는데 참고 5분간 대화를 해요. 그리고 돌아서서 미치는 거죠. 벽 잡고 숨 돌리면서 정신 헤매고... 그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니까 아예 안 나가게 되는 거죠." - 서영철 씨

기록집 발간에 참여한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타인이 처한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고, 더 나아가 타인의 문제가 모든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 문제라는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함 평론가는 "피해 구제와 배상을 통해 피해자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에 답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시급한 일"이라며 "거기서 더 나아가 유사한 참사가 반복되지 않게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고민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오늘도 거리에 나서는 피해자들

"1, 2단계 피해자 중에 합의 안 한 사람은 몇 명 없거든요? 그런데 다음 사람이 참고할 합의서가 없어요. 누구 하나 어떤 조건을 걸었고, 어떻게 보상받았다고 공개한 분이 없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내가 제대로 된 합의서, 굴욕적이지 않은 합의서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열람하게끔 하자고. 지금은 금액이 아니라 합의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피해자가 합의할 때 내 것을 기준으로 잡고 나름의 조건을 더하고 뺄 수 있도록 하려고요.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 손수연 씨

"환경부나 기관들과 10년 넘게 싸워오면서 내가 움직이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걸 조금씩 경험했어요. 그게 나 혼자의 이점이 아니라 모두의 이점이 되면 좋겠어요. 이만큼밖에 못한 게 아니라 이만큼 해서 이만큼 바뀐 거다, 나는 내 새끼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지. 그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피해자분들이 활동해오신 덕분에 판정 기준이든 뭐든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 김선미 씨

지난달, 기록집이 발간된 뒤 인터뷰에 응한 피해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기록집 발간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피해자 추준영 씨는 "아이가 사회적 약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아이한테 최소한의 용서를 받고자 한다"며 "앞으로 70년, 80년 고통받을 아이들의 인생을 위해 정부를 비롯해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모임 등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개정안 국회 상정을 촉구하고 있다.지난달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모임 등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개정안 국회 상정을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오늘도 거리에 나섭니다. 국회 앞에서, 옥시 회사 앞에서, 청와대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섭니다.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가습기 살균제 참사', 국내에서 18년간 998만 개나 팔렸습니다. 직접 피해를 신고한 피해자가 6,684명일 뿐 가습기 살균제를 써서 건강 피해를 본 사람은 49~56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사회적 참사의 끝을 어떻게 매듭짓는지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우리가 모두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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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③ “아이한테 최소한의 용서받기 위해”
    • 입력 2020-02-11 08:01:06
    • 수정2020-02-11 08:01:42
    취재K
가족의 건강을 위해 썼던 가습기 살균제가 독이 돼 돌아왔습니다. 자책의 세월을 보낸 피해자들은 좌절하지 않고,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를 꾸준히 사용했다는 것부터 이로 인해 병을 얻었다는 사실까지 하나하나 스스로 입증해야만 했습니다.

가습기 참사 피해자들의 지난 9년 간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기록집에는 그들이 겪은 사회의 냉소와 무관심도 담겨있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 싸움이 길어지자 사람들의 시선도 변했습니다. 관심에서 멀어졌고, 눈총은 따가워졌습니다. 이 기록집을 발간하기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참사 특조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아는 언니가 저한테 '어떻게 모든 사람을 정부가 다 해결해주냐. 가습기 살균제 문제도 정부의 잘못이 아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화가 났어요. 왜 정부의 잘못이 아니에요? 허가를 해줬는데, 인체에 무해하다고 국민한테 써도 된다고 했잖아요. 사람들은 '아직도야? 아직도 떠들어?' 그래요. 해결된 거 하나도 없거든요? 아직도 떠드는 게 아니라 아직도 시작을 안 했어요. 그런 쉽게 던지는 말들이 다 상처에요." -김현정 씨(가명)

"옥시 사옥 앞에서 꾸준히 시위하고 있어요. 피켓 들고 서 있으면 사람들이 그래요. '저거 해결된 거 아니야?' 이 추운데, 그 더운데도 나가는 건 잊히지 않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에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야죠. 내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하고, 자식이 아파서 돌봐줘야 하고, 한계가 있지만 계속 나가고 있어요. 증거 자료를 남기려고 매번 사진을 찍거든요? 지나가는 분들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다 피해요. 내 카메라로 찍어달라는데 그게 좀 그렇대요."- 추준영 씨

"숨기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폐가 안 좋다고 하면 다 폐결핵으로 봐요. 그래서 기피 대상이에요. 옆에 가면 안 된다. 자기한테 옮을까 봐 무서운 거죠. 그러니까 표시를 낼 수 없더라고요. 기침 나와도 '별거 아니야'하고 넘어가고, 속은 호흡곤란이 오는데 참고 5분간 대화를 해요. 그리고 돌아서서 미치는 거죠. 벽 잡고 숨 돌리면서 정신 헤매고... 그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니까 아예 안 나가게 되는 거죠." - 서영철 씨

기록집 발간에 참여한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타인이 처한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고, 더 나아가 타인의 문제가 모든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 문제라는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함 평론가는 "피해 구제와 배상을 통해 피해자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에 답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시급한 일"이라며 "거기서 더 나아가 유사한 참사가 반복되지 않게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고민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오늘도 거리에 나서는 피해자들

"1, 2단계 피해자 중에 합의 안 한 사람은 몇 명 없거든요? 그런데 다음 사람이 참고할 합의서가 없어요. 누구 하나 어떤 조건을 걸었고, 어떻게 보상받았다고 공개한 분이 없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내가 제대로 된 합의서, 굴욕적이지 않은 합의서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열람하게끔 하자고. 지금은 금액이 아니라 합의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피해자가 합의할 때 내 것을 기준으로 잡고 나름의 조건을 더하고 뺄 수 있도록 하려고요.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 손수연 씨

"환경부나 기관들과 10년 넘게 싸워오면서 내가 움직이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걸 조금씩 경험했어요. 그게 나 혼자의 이점이 아니라 모두의 이점이 되면 좋겠어요. 이만큼밖에 못한 게 아니라 이만큼 해서 이만큼 바뀐 거다, 나는 내 새끼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지. 그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피해자분들이 활동해오신 덕분에 판정 기준이든 뭐든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 김선미 씨

지난달, 기록집이 발간된 뒤 인터뷰에 응한 피해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기록집 발간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피해자 추준영 씨는 "아이가 사회적 약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아이한테 최소한의 용서를 받고자 한다"며 "앞으로 70년, 80년 고통받을 아이들의 인생을 위해 정부를 비롯해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모임 등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개정안 국회 상정을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오늘도 거리에 나섭니다. 국회 앞에서, 옥시 회사 앞에서, 청와대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섭니다.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가습기 살균제 참사', 국내에서 18년간 998만 개나 팔렸습니다. 직접 피해를 신고한 피해자가 6,684명일 뿐 가습기 살균제를 써서 건강 피해를 본 사람은 49~56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사회적 참사의 끝을 어떻게 매듭짓는지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우리가 모두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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