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로 합성해줘”…일상의 n번방 ‘지인 능욕’

입력 2020.04.03 (07:00) 수정 2020.04.0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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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최초 신고자인 대학생 '추적단 불꽃'과 함께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연속 기획을 보도합니다. 'n번방', '박사방' 등 성착취 영상 촬영을 강요당했거나 이 과정에서 금전적 사기나 신상정보 유출 등 피해를 당한 사례 등 성범죄 피해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를 받고 취재하는 과정에서 신원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KBS X 불꽃 ②] "내 친구로 합성해줘" 일상의 n번방 '지인 능욕'

디지털 성범죄 가운데 '지인 능욕'이라는 성범죄가 있습니다. 가해자들이 은어로 사용하는 '지인 능욕'은 말 그대로 내 주변에 있는 친구나 회사 동료, 심지어 여성인 가족 구성원들까지 범행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간단히 말해 자신 지인의 SNS에서 도용한 사진이나 몰래 찍은 일상의 사진을, 성적인 사진과 허위 사실을 함께 온라인에 게시하는 범죄입니다.

[연관기사] 주변 지인도 성착취 대상.. 처벌은 미미 (2020.3.28. KBS1TV '뉴스9')

‘지인 능욕’ 디지털 성범죄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SNS 계정의 게시판‘지인 능욕’ 디지털 성범죄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SNS 계정의 게시판

'지인 능욕' 전용 대화방, 대부분 미성년자 사진으로 범행

며칠 전, 20대 초반의 여성 김 모 씨는 텀블러라는 해외 SNS 계정에 자신의 사진이 도용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김 씨가 자신의 공개 SNS에 올린 사진이 성적인 허위 사실과 음란 사진이 합성된 채 익명 대화방에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김 씨가 들어간 대화방에 올라간 다른 천 명이 넘는 피해자들이 대부분 미성년자였다는 점입니다. 김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링크를 타고 들어간 '지인 능욕' 방에 나와 같은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며 "대부분 자신의 사진이 성범죄에 쓰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미성년자"라고 밝혔습니다.

‘지인 능욕’ 대화방에서는 음란 사진 합성을 부탁하거나, 활발한 범죄를 요구받는다.‘지인 능욕’ 대화방에서는 음란 사진 합성을 부탁하거나, 활발한 범죄를 요구받는다.

대화방 활동 없으면 '강퇴'…'2차 가해'하는 경찰관도

'지인 능욕'은 일상적이고 체계적입니다. 텔레그램 n번방에서 파생된 성 착취 대화방뿐 아니라 '지인 능욕'만 취급하는 대화방도 있습니다. 돈을 받고 사진을 합성해주는 전문가가 따로 있는가 하면, '지인 능욕' 대화방에 남아 있고 싶은 가해자들에게 끊임없이 사진을 올리게 하는 등 활동을 강요합니다.

끊임없이 성적인 허위 사실을 만들어 내고, 실제 피해자의 연락처나 신상정보 등을 함께 공개합니다. 피해자 주변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상의 'n번방'인 셈입니다.

문제는 수사가 사실상 어렵다는 겁니다. 실제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해외 IP를 쓰는 SNS라는 이유로 신고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거나, 피해자 본인이 '지인 능욕' 게시물의 허위사실을 직접 증명하지 않으면 처벌이 어렵습니다.

'지인 능욕' 피해자 연대 대표는 "경찰이 해외 계정이라며 가해자를 잡을 수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거나, 미성년자의 경우 민감한 내용의 신고인데도 반드시 부모를 동행하라고 한다"며 "오히려 성적인 게시물을 보고 피해자에게 예쁘다거나, SNS에 셀카를 찍어 올리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2차 가해를 하는 경찰도 있다"며 수사 기관의 잘못된 대처가 더 피해를 키운다고 말했습니다.

‘지인 능욕’ 피해자연대가 조속한 가해자 조사를 위한 청와대 국민 청원을 올렸다.‘지인 능욕’ 피해자연대가 조속한 가해자 조사를 위한 청와대 국민 청원을 올렸다.

'지인 능욕' 처벌 조항 마련됐지만 여전히 "피해 증명은 피해자가'"

다행히 뒤늦게나마 '지인 능욕'을 처벌하는 법적 조항이 지난달 24일에 마련이 됐습니다. 성폭력처벌법의 신설 조항에 따르면 '영상 공유와 반포의 목적으로 만든 불법 촬영물을,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할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상의 벌금을 과한다'고 규정합니다. 다만 신설 조항이기 때문에 효력이 오는 6월부터 발생합니다. 그 이전에 발생된 디지털 성범죄는 처벌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해야 하지만, 명예훼손 혐의로는 가해자를 처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인 능욕' 피해자 김 씨는 경찰에 가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신고했지만, 게시물이 모두 허위라는 사실을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한다며 신고를 반려당했습니다.

김 씨는 "애초에 성적 허위 사실이 적힌 디지털 성범죄 게시물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거짓이라고 증명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명예훼손보다 형량이 적은 모욕 혐의로만 신고했는데 처벌은 벌금형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인 능욕'은 내 주변 모두의 문제…연대와 공감 필요

가해자들은 '지인 능욕'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가해자들을 살펴보면 성적인 디지털범죄를 단순한 괴롭힘으로 생각할 뿐 성범죄를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성적 가학물을 장난으로 여기는 잘못된 또래 집단 문화"로 정의했습니다.

지난해 같은 반 여학생에게 지속적인 '지인 능욕'을 저지르고, 신상정보를 온라인에 무단 공유해 실형을 받은 20살 가해자 이 모 씨는 "그냥 재밌고 장난으로 한 일"이라며 "직접 찾아가 성폭행을 하지 않았으니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바 있습니다.

텔레그램 'n번방'의 실체가 밝혀진 이후 디지털 성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는 사라졌습니다. 젠더 갈등을 떠나 개인의 성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고, 장난과 괴롭힘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범죄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됐습니다.

내 주변의 지인들까지 성범죄의 대상으로 만드는 '지인 능욕'은 강력한 처벌과 동시에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작은 물결이_모여_큰 파도가_되길

■ [KBS X 불꽃 ⓛ] "상위 '성착취방' 들어가려 수험생방에 링크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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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친구로 합성해줘”…일상의 n번방 ‘지인 능욕’
    • 입력 2020-04-03 07:00:19
    • 수정2020-04-03 14:19:43
    취재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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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X 불꽃 ②] "내 친구로 합성해줘" 일상의 n번방 '지인 능욕'

디지털 성범죄 가운데 '지인 능욕'이라는 성범죄가 있습니다. 가해자들이 은어로 사용하는 '지인 능욕'은 말 그대로 내 주변에 있는 친구나 회사 동료, 심지어 여성인 가족 구성원들까지 범행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간단히 말해 자신 지인의 SNS에서 도용한 사진이나 몰래 찍은 일상의 사진을, 성적인 사진과 허위 사실을 함께 온라인에 게시하는 범죄입니다.

[연관기사] 주변 지인도 성착취 대상.. 처벌은 미미 (2020.3.28. KBS1TV '뉴스9')

‘지인 능욕’ 디지털 성범죄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SNS 계정의 게시판
'지인 능욕' 전용 대화방, 대부분 미성년자 사진으로 범행

며칠 전, 20대 초반의 여성 김 모 씨는 텀블러라는 해외 SNS 계정에 자신의 사진이 도용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김 씨가 자신의 공개 SNS에 올린 사진이 성적인 허위 사실과 음란 사진이 합성된 채 익명 대화방에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김 씨가 들어간 대화방에 올라간 다른 천 명이 넘는 피해자들이 대부분 미성년자였다는 점입니다. 김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링크를 타고 들어간 '지인 능욕' 방에 나와 같은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며 "대부분 자신의 사진이 성범죄에 쓰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미성년자"라고 밝혔습니다.

‘지인 능욕’ 대화방에서는 음란 사진 합성을 부탁하거나, 활발한 범죄를 요구받는다.
대화방 활동 없으면 '강퇴'…'2차 가해'하는 경찰관도

'지인 능욕'은 일상적이고 체계적입니다. 텔레그램 n번방에서 파생된 성 착취 대화방뿐 아니라 '지인 능욕'만 취급하는 대화방도 있습니다. 돈을 받고 사진을 합성해주는 전문가가 따로 있는가 하면, '지인 능욕' 대화방에 남아 있고 싶은 가해자들에게 끊임없이 사진을 올리게 하는 등 활동을 강요합니다.

끊임없이 성적인 허위 사실을 만들어 내고, 실제 피해자의 연락처나 신상정보 등을 함께 공개합니다. 피해자 주변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상의 'n번방'인 셈입니다.

문제는 수사가 사실상 어렵다는 겁니다. 실제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해외 IP를 쓰는 SNS라는 이유로 신고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거나, 피해자 본인이 '지인 능욕' 게시물의 허위사실을 직접 증명하지 않으면 처벌이 어렵습니다.

'지인 능욕' 피해자 연대 대표는 "경찰이 해외 계정이라며 가해자를 잡을 수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거나, 미성년자의 경우 민감한 내용의 신고인데도 반드시 부모를 동행하라고 한다"며 "오히려 성적인 게시물을 보고 피해자에게 예쁘다거나, SNS에 셀카를 찍어 올리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2차 가해를 하는 경찰도 있다"며 수사 기관의 잘못된 대처가 더 피해를 키운다고 말했습니다.

‘지인 능욕’ 피해자연대가 조속한 가해자 조사를 위한 청와대 국민 청원을 올렸다.
'지인 능욕' 처벌 조항 마련됐지만 여전히 "피해 증명은 피해자가'"

다행히 뒤늦게나마 '지인 능욕'을 처벌하는 법적 조항이 지난달 24일에 마련이 됐습니다. 성폭력처벌법의 신설 조항에 따르면 '영상 공유와 반포의 목적으로 만든 불법 촬영물을,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할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상의 벌금을 과한다'고 규정합니다. 다만 신설 조항이기 때문에 효력이 오는 6월부터 발생합니다. 그 이전에 발생된 디지털 성범죄는 처벌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해야 하지만, 명예훼손 혐의로는 가해자를 처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인 능욕' 피해자 김 씨는 경찰에 가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신고했지만, 게시물이 모두 허위라는 사실을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한다며 신고를 반려당했습니다.

김 씨는 "애초에 성적 허위 사실이 적힌 디지털 성범죄 게시물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거짓이라고 증명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명예훼손보다 형량이 적은 모욕 혐의로만 신고했는데 처벌은 벌금형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인 능욕'은 내 주변 모두의 문제…연대와 공감 필요

가해자들은 '지인 능욕'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가해자들을 살펴보면 성적인 디지털범죄를 단순한 괴롭힘으로 생각할 뿐 성범죄를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성적 가학물을 장난으로 여기는 잘못된 또래 집단 문화"로 정의했습니다.

지난해 같은 반 여학생에게 지속적인 '지인 능욕'을 저지르고, 신상정보를 온라인에 무단 공유해 실형을 받은 20살 가해자 이 모 씨는 "그냥 재밌고 장난으로 한 일"이라며 "직접 찾아가 성폭행을 하지 않았으니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바 있습니다.

텔레그램 'n번방'의 실체가 밝혀진 이후 디지털 성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는 사라졌습니다. 젠더 갈등을 떠나 개인의 성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고, 장난과 괴롭힘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범죄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됐습니다.

내 주변의 지인들까지 성범죄의 대상으로 만드는 '지인 능욕'은 강력한 처벌과 동시에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작은 물결이_모여_큰 파도가_되길

■ [KBS X 불꽃 ⓛ] "상위 '성착취방' 들어가려 수험생방에 링크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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