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박원순 “제가 몇 달 동안 시청 직원들을 괴롭혔습니다”…경비원, 행복해질까?

입력 2020.06.25 (09:48) 수정 2020.06.25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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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달 동안 제가 우리 직원들을 괴롭혔습니다. 하나의 사건으로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대한민국 서울 하늘 아래에서 이런 일은 있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마련한 것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어제(24일) 서울시청 기자회견에서 '아파트 경비노동자 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한 말입니다. 서울시는 아파트 경비원을 대상으로 한 종합대책은 처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박 시장은 직원들을 왜 '괴롭혔다'고 말했을까요? 그리고 '이만큼이라도'라는 표현에 담긴 아쉬움은 무엇일까요?

[연관기사] 서울, 경비원 보호 종합 대책 발표…고용승계 시 보조금 (2020.06.24. 'KBS 뉴스7')


■ "너무 약하다"…출고 20분 전 연기된 엠바고

서울시는 지난 1월부터 경비원 인권보호 내용을 담은 '서울시 공동주택관리규약 준칙' 개정을 추진해 왔습니다. 지난달 입주민 갑질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최희석 경비원 사건이 나기 전부터 이미 준비를 해왔던 셈입니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의 제도 개선 요구는 더 커졌고, 서울시 입장에선 관심이 쏠린 만큼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놔야 했습니다.

사실 서울시는 보름 전, 경비원 전담 신고센터 운영 및 계약서로 정한 업무 범위 외의 부당한 업무지시를 금지하는 규정을 '공동주택관리규약 준칙'에 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책을 세우고 보도자료도 냈었습니다.

보통 서울시 보도자료는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유예)가 걸려있는데, 경비원 대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엠바고 해제 20여 분 전에 서울시에서 엠바고가 변경됐다고 급하게 알렸습니다. 밀린 엠바고 일정은 정해지지 않은 채였습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기사 출고 직전에 엠바고가 바뀌는 일은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우"라고 전했습니다.

이런 이례적인 배경에는 박 시장이 있었다는 게 주변 이야기입니다. 즉, 저 정도의 내용으로는 경비원을 보호할 수도 없고, 언론에 발표하기도 민망한 소위 "너무 약한" 대책이었다는 것입니다.


■ 경비원은 '고다자'…3명 중 1명은 1년 미만의 단기계약

애초보다 보름이 밀려 다시 나온 경비원 종합대책에는 일단 핵심은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경비원 3명 중 1명은 1년 미만의 단기계약인 소위 '쪼개기 계약'으로 고용(전국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조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지난해)돼 일합니다. 퇴직금 때문이든 혹은 '길들이기' 위한 것이든 여러 이유 때문인데, 경비원들은 스스로를 '고다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는 의미입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고다자'라는 사실을 경비원이 알고, 특히 입주민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갑질이 나온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불안한 고용구조가 누군가에게는 하소연조차 못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권력을 주는 것입니다. 고(故) 최희석 경비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갑질'의 근본 원인은 불안한 고용구조…핵심은 담았지만….

서울시 종합대책의 첫 번째도 고용불안 해소였습니다. 만약 아파트 관리규약에 고용승계·유지 규정을 두고 있거나 고용불안을 야기하는 독소조항이 없는 모범단지를 선정해 공용시설 보수비, 휴게시설 개선비, 공동체 활성화 사업비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또 경비원 노동환경 개선과 인권존중에 앞장선 단지를 매년 20개씩 '배려·상생 공동주택 우수단지'로 인증해 단지 내 공용시설물의 유지 관리비를 일부 지원할 때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일종의 인센티브제를 활용하는 방식인데 법을 만드는 기관이 아닌 데다 자치 행정기관이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다 동원했다는 게 서울시의 설명입니다. 박 시장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 필요하지만, 서울시는 조례로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규정은 할 수가 없다. 지금 지방자치의 한계"라고 말했습니다.

즉, 강제규정이 아니라 아파트에 대한 간접 지원을 통해 경비원 고용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구상입니다. "너무 약했던" 대책 때는 없던 내용으로 박 시장이 시청 직원들을 괴롭힌(?) 결과물이자 동시에 아쉬움도 담긴 셈입니다.


■ 경비원 행복해질까?…"현장에 먹힐지는 두고 봐야"

그래서 궁금한 건 서울시의 대책으로 서울 아파트 경비원들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지입니다.

어제(24일) 기자회견 자리에 섰던 정의헌 전국아파트 경비노동자 공동사업단 대표는 "서울시가 제한적이나마 필요한 조치를 했다고 본다."라면서도 "다만 인센티브 방식이라 현장에서 얼마만큼 먹힐지는 두고 봐야 되는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3개월, 1개월 단위의 계약을 노동법에서 못 하도록 규정하는 게 필요하고, 실질적 사용자인 주민들이 어떤 의식을 가졌는지도 중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제 대책이 나온 만큼, 현장에서 얼마나 반영되고 어떤 반응이 올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다만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 18만, 서울 2만 4천 명의 아파트 경비원들은 '고다자'의 불안에 떨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최희석 경비원을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한 이도 입주민이었고, 분향소를 차리고 노제를 치러준 이도 입주민들이었습니다. 경비원들을 '고다자'의 불안에 떨게 하는 것도, 혹은 힘든 업무에도 보람을 느끼며 웃으며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입주민들의 몫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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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박원순 “제가 몇 달 동안 시청 직원들을 괴롭혔습니다”…경비원, 행복해질까?
    • 입력 2020-06-25 09:48:09
    • 수정2020-06-25 09:48:16
    취재후·사건후
"지난 몇 달 동안 제가 우리 직원들을 괴롭혔습니다. 하나의 사건으로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대한민국 서울 하늘 아래에서 이런 일은 있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마련한 것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어제(24일) 서울시청 기자회견에서 '아파트 경비노동자 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한 말입니다. 서울시는 아파트 경비원을 대상으로 한 종합대책은 처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박 시장은 직원들을 왜 '괴롭혔다'고 말했을까요? 그리고 '이만큼이라도'라는 표현에 담긴 아쉬움은 무엇일까요?

[연관기사] 서울, 경비원 보호 종합 대책 발표…고용승계 시 보조금 (2020.06.24. 'KBS 뉴스7')


■ "너무 약하다"…출고 20분 전 연기된 엠바고

서울시는 지난 1월부터 경비원 인권보호 내용을 담은 '서울시 공동주택관리규약 준칙' 개정을 추진해 왔습니다. 지난달 입주민 갑질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최희석 경비원 사건이 나기 전부터 이미 준비를 해왔던 셈입니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의 제도 개선 요구는 더 커졌고, 서울시 입장에선 관심이 쏠린 만큼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놔야 했습니다.

사실 서울시는 보름 전, 경비원 전담 신고센터 운영 및 계약서로 정한 업무 범위 외의 부당한 업무지시를 금지하는 규정을 '공동주택관리규약 준칙'에 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책을 세우고 보도자료도 냈었습니다.

보통 서울시 보도자료는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유예)가 걸려있는데, 경비원 대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엠바고 해제 20여 분 전에 서울시에서 엠바고가 변경됐다고 급하게 알렸습니다. 밀린 엠바고 일정은 정해지지 않은 채였습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기사 출고 직전에 엠바고가 바뀌는 일은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우"라고 전했습니다.

이런 이례적인 배경에는 박 시장이 있었다는 게 주변 이야기입니다. 즉, 저 정도의 내용으로는 경비원을 보호할 수도 없고, 언론에 발표하기도 민망한 소위 "너무 약한" 대책이었다는 것입니다.


■ 경비원은 '고다자'…3명 중 1명은 1년 미만의 단기계약

애초보다 보름이 밀려 다시 나온 경비원 종합대책에는 일단 핵심은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경비원 3명 중 1명은 1년 미만의 단기계약인 소위 '쪼개기 계약'으로 고용(전국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조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지난해)돼 일합니다. 퇴직금 때문이든 혹은 '길들이기' 위한 것이든 여러 이유 때문인데, 경비원들은 스스로를 '고다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는 의미입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고다자'라는 사실을 경비원이 알고, 특히 입주민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갑질이 나온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불안한 고용구조가 누군가에게는 하소연조차 못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권력을 주는 것입니다. 고(故) 최희석 경비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갑질'의 근본 원인은 불안한 고용구조…핵심은 담았지만….

서울시 종합대책의 첫 번째도 고용불안 해소였습니다. 만약 아파트 관리규약에 고용승계·유지 규정을 두고 있거나 고용불안을 야기하는 독소조항이 없는 모범단지를 선정해 공용시설 보수비, 휴게시설 개선비, 공동체 활성화 사업비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또 경비원 노동환경 개선과 인권존중에 앞장선 단지를 매년 20개씩 '배려·상생 공동주택 우수단지'로 인증해 단지 내 공용시설물의 유지 관리비를 일부 지원할 때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일종의 인센티브제를 활용하는 방식인데 법을 만드는 기관이 아닌 데다 자치 행정기관이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다 동원했다는 게 서울시의 설명입니다. 박 시장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 필요하지만, 서울시는 조례로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규정은 할 수가 없다. 지금 지방자치의 한계"라고 말했습니다.

즉, 강제규정이 아니라 아파트에 대한 간접 지원을 통해 경비원 고용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구상입니다. "너무 약했던" 대책 때는 없던 내용으로 박 시장이 시청 직원들을 괴롭힌(?) 결과물이자 동시에 아쉬움도 담긴 셈입니다.


■ 경비원 행복해질까?…"현장에 먹힐지는 두고 봐야"

그래서 궁금한 건 서울시의 대책으로 서울 아파트 경비원들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지입니다.

어제(24일) 기자회견 자리에 섰던 정의헌 전국아파트 경비노동자 공동사업단 대표는 "서울시가 제한적이나마 필요한 조치를 했다고 본다."라면서도 "다만 인센티브 방식이라 현장에서 얼마만큼 먹힐지는 두고 봐야 되는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3개월, 1개월 단위의 계약을 노동법에서 못 하도록 규정하는 게 필요하고, 실질적 사용자인 주민들이 어떤 의식을 가졌는지도 중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제 대책이 나온 만큼, 현장에서 얼마나 반영되고 어떤 반응이 올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다만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 18만, 서울 2만 4천 명의 아파트 경비원들은 '고다자'의 불안에 떨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최희석 경비원을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한 이도 입주민이었고, 분향소를 차리고 노제를 치러준 이도 입주민들이었습니다. 경비원들을 '고다자'의 불안에 떨게 하는 것도, 혹은 힘든 업무에도 보람을 느끼며 웃으며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입주민들의 몫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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