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18일 오전 9시53분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녹취> "어처구니 없는 대형 참사입니다."
<녹취> "1082? 1082? 나오세요! "
<녹취> "불이 났다고 했어요. 불이 나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녹취> "하나도 안 보이고 모르겠어요. 그냥 소리만 나면 우리가 찾아라도 가는데..."
<녹취> "아~, 미영아 친구들이 다 왔는데 왜 안 나오노."
<앵커 멘트>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 꼭 10년이 됐습니다.
사고 전동차에는 이렇게 당시의 처참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부상자와 희생자 가족들은 참사 이후의 시간이 더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대구에선 무슨 일이 있어났는 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대구시 팔공산에 위치한 시민안전테마파크.
<녹취> 유족 대표 : "192명 우리 가족의 목숨값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이곳 시민안전테마파크인 것입니다."
<녹취> 상가 대표 : "더 좋은 자리에 추모탑과 위령탑을 하십시오. 여기는 관광지입니다."
조형물 앞에서 욕설과 고성이 오갑니다.
테마파크 인근 상인과 주민들이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러 온 유족들과 충돌한 겁니다.
몸싸움이 격렬해 지자 급기야 경찰이 나서 양쪽을 갈라놓습니다.
유족들은 결국 조형물 인근에 국화를 놓아둔 채 목 놓아 오열합니다.
<녹취> "엄마 왔다. 내 아들아, 엄마 왔다. 언젠가는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줄께, 엄마가 살아있는 한..."
계란과 밀가루, 분말 소화기까지 등장하는 등 몇년 째 반복되는 충돌.
시작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난 2009년, 일부 유족들이 모여 희생자를 위한 추도제를 지냅니다.
유족들은 그동안 납골당 등을 떠돌던 유골 29구를 모아 테마파크 안 조형물 근처에 묻었습니다.
이를 두고 주민과 상인들은 어둠을 틈탄 '유골 암매장'이라며 크게 반발했습니다.
<인터뷰> 김남호(팔공산 상가 번영회장) : "팔공산은 대구의 얼굴이자 상징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전국적으로 오는 시민들이 위락시설로, 먹고 마시고 놀기 위해서 오는데 여기에 추모공원이나 추모화는 맞지 않습니다."
대구시도 테마파크 건립 당시 상인들에게 보낸 공문에서 "유골은 테마파크 내에 설치하지 않으며, 조형물도 참사와 무관하다"고 밝혔습니다.
유족 단체는 그러나 대구시와 상반된 내용의 이면 합의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합니다.
테마파크 안에 수목장으로 꾸민 희생자 묘역과 추모탑, 유품 전시관 등 추모 공원을 조성하고, 유족들에게 사무실을 제공하겠다고 대구시가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 말이 맞는 걸까.
취재팀은 당시 유골 암매장을 앞두고 대구시와 유족간 협의 영상을 입수했습니다.
대구시는 테마파크 안에 희생자 숫자 192명에 맞춘 수목장을 언급합니다.
<녹취> 유족 관계자(2010년 7월1일) : "그래서 그럼 유골은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어요?"
<녹취> 대구시 관계자(음성변조) : "그때 그렇게 합의된 겁니다. 그래. 192구에 식재를 하고 거기에 수목장 형태로 원하시는 분들이 하는 걸로."
이어 유족과의 이면 합의 내용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말도 나옵니다.
<녹취> 유족 관계자(2009년 7월17일) : "이면 합의가 지켜지지 않는다, 내지는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부정당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안했어요."
<녹취> 대구시 관계자(음성변조) : "우리가 '서류상 뭐 나타난 게 없다', '이면 사항까지 일곱가지, 거기에 나온 게 없다' 이거 가지고 묵살할 생각은 없습니다. 없고"
그렇다면 대구시는 왜 이런 이중플레이를 했을까?
대구시는 그동안 추모공원 후보지로 시내 공원 등 5곳을 선정했지만, 상권 침체 등을 우려한 주민들 반대로 추모공원 설립이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녹취> 대구시 관계자(음성변조) : "혐오시설이라고 하는 게 제일 크죠. 주민들에게 제안을 엄청 많이 했습니다. 일단 되는 데가 없었죠. 무조건 다 간다고 하면 다 반대이니까."
그래서 나온 게 시민안전테마파크를 중심으로 한 이면 합의였다는 게 유족 측 주장입니다.
<인터뷰> 윤석기(희생자 대책위원장) : "대외 발표문에는 희생자 묘역도 없고, 추모탑도 없고, 유품 전시관도 없다, 이렇게 하고, 실제 착공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간을 갖고 대구시가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겠다, 이렇게 저희들에게 제안을 하죠."
하지만 '유골 암매장' 문제가 불거지자 대구시는 약속과 달리 이를 주도한 유족 대표를 고발했고, 법원은 지난 7일, "자연 장지는 처벌 법규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으로 이해 당사자간 갈등을 조정해야 할 대구시가 오히려 갈등의 불씨를 제공한 셈입니다.
김범일 대구시장에게 입장을 물었습니다.
<녹취> 김범일(대구광역시장) : "(유가족 단체와 과거에 이면 합의라는 논란이 있지 않습니까?) 시로서는 합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다 했고...(유골 암매장 관련해서 무죄선고 나왔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직 대법원까지 끝이 안 났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려봅시다. (혹시 항소 예정이 있으신가요?) ..."
이처럼 대구시와 유족 단체들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참사 10년이 지나도록 변변한 희생자 묘역이나 추모공원 하나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또 국민성금 670억 원 가운데 재단 설립에 책정된 110억 원 역시 아직 집행되지 못한 채 묶여 있습니다.
답답한 현실 속에 희생자들의 죽음은 점차 잊혀지고 있습니다.
<녹취> "국과수에서 현장 조사를 해서 찾아낸 우리 지은이 유품이에요. 이거는 시계예요. 10시32분에 멈춰 있더라고요. 시계가..."
살아남은 유족들은 참사보다 참사 이후의 시간이 더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윤근(참사 유족) : "(딸은) 의사자도 아니예요. 참사의 희생자예요. 그렇지만 참사의 교훈을 얻어서 그 죽음이 그 이후에 일어날 더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헛된 죽음이 아니라 값진 죽음이 아니겠느냐. (그렇지 못해서) 가슴 아프죠. 지금도 그렇습니다."
시계가 멈춘 듯 10년 전 악몽에 갇혀 있기는 부상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뷰> 김종선(참사 부상자) : "내가 막 쫓겨다니고 얼굴 새까만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꿈에. 꿈을 꾸면 자면서도 계속 이래. 이렇게 만져. 깊은 잠이 안 오고, 계속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 혼자 자면서..."
부상자 146명 가운데 60여 명은 성대 손상 등으로 지금까지 투병 중입니다.
<녹취> "이건 당뇨약, 혈압약, 이건 심장, 피 잘 흐르라고... 이렇게 해놓고 계속 먹어요. (이 약을 다 드시는 거예요?) 네. 그러니까 위장이 남아나질 않아요."
일정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평생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참사 후유증은 경제적.심리적 어려움을 더하게 합니다.
<인터뷰> 황재욱(교수/순천향의대 정신과/'대구 참사 생존자 심리' 추적 연구) : "지하철 역을 보거나 지하철을 다시 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때마다 (외상의) 재경험을 하게 되시는 경우이거든요. 다시 그 기억이 떠올라서 아물어져가는 상처를 다시 긁어서 더 나쁘게 만드는 거죠."
지난 18일, 사고 시각인 오전 9시 53분.
대구 시내에 추모 사이렌이 울립니다.
하지만 희생자 추모식은 대구 시내 3곳에서 쪼개져 열렸습니다.
하나였던 유족회가 입장 차이로 갈라지면서 추모식도 따로 치른 것입니다.
그동안 추모식에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던 시장도 올해엔 사고현장을 찾아 헌화했습니다.
<인터뷰> 김범일(대구시장) ; "특별한 이유라기 보다는 (추모식이) 분산돼서 개최되기 때문에 어느 곳에만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사고 현장이 보존된 지하철 중앙로역의 '통곡의 벽' 역시 지난 10년간 차단막으로 가려진 채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녹취> 이오섭(중앙로역 부역장) : "대구시와 유족 단체가 협의해서 다른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보존하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차단막이 설치되고 개방된 것은 없죠? 지금까지.) 네, 공식적으로 개방된 적은 없습니다."
2753명이 희생된 미국 9.11 테러.
10주년에 맞춰 공개된 추모관엔 모든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거대한 인간 띠는 그날의 아픔을 감싸 안았습니다.
전.현직 대통령 부부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 '미국은 하나'라는 화합의 메시지를 강조했습니다.
<녹취> 버락 오바마(미국 대통령)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인터뷰> 노진철(경북대 사회과학대학장) :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 가를 다양한 전문가들과 정부와 시민들이 참여해서 함께 논의했기 때문에 미국에선 오히려 계기적 사건이 되면서 국민이 통합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 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가질 않았죠."
지난 2004년, 참사 1주기 때 취재파일팀을 만났던 박두봉 씨.
제사가 끝나도 아내와 7살짜리 아들의 젯상을 물리지 못합니다.
<녹취> 박두봉(참사 유족) : "제삿상 받는다고 나아질 게 뭐 있겠습니까?(침묵) 살아 있을 때 잘 해 줬으면 내 원망이나 덜 하고 갔을 텐데..."
내내 참았던 눈물을 쏟습니다.
<녹취> "당신 실컷 먹었으니 내 한잔 줘...불쌍한 사람!"
취재팀은 9년 만에 박 씨를 다시 수소문했습니다.
그를 접한 곳은 뜻 밖의 장소였습니다.
먼저 떠난 아내와 아들 곁, 박두봉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녹취> 박두성(박두봉 씨 동생) : "못 자다 보니까 악몽에 시달리다 보니까 술에 의존하다 보니까 안 좋아져서 그렇게 된 건데. 한 묘에 합장을 했는데 형수님을 정중앙에 놓은 게 아니고요. 유골함을. 한쪽 부근에 해 놨더라고. (자기가) 같이 죽을 것을 예견했는 지는 몰라도..."
박 씨 묘 옆에는 훼손 정도가 심하거나 유전자 정보를 대조할 유가족이 나타나지 않은 대구 참사의 무연고 시신 6구도 묻혀 있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계기로 전국의 지하철 객차 내장재가 모두 방염 처리되는 등 지하철 안전은 크게 개선됐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구에는 참사의 아픔을 치유할 따스한 봄볕이 들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