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사퇴 의사를 밝힌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는 미국 이민 1.5세 출신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 산업의 융합을 통한 '창조경제' 실현에 이바지하겠다는 '코리안 드림'은 결국 이루지 못하게 됐다.
그는 만 14세이던 1975년 미국 메릴랜드주(州)로 가족과 함께 이주한 후 16세에 독립해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일하는 고학 생활을 시작했다.
장학금을 받고 존스홉킨스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간 그는 3년 만에 우등졸업했으며, 이후 해군 장교로 7년간 복무하면서 핵 잠수함의 엔지니어로 일했다. 군 복무 기간 시간을 쪼개 기술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제대 후에는 통신기업에서 일하면서 메릴랜드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1992년 그는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첨단 통신장비 업체 유리 시스템즈를 만들고 통신장비를 미군에 납품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유리시스템즈는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초고속 성장을 했다.
김 내정자는 1998년 이 회사를 루슨트 테크놀로지에 11억 달러에 팔고 5억1천만 달러 어치의 지분을 받아 38세에 미국에서 손꼽히는 자수성가형 거부(巨富)가 됐다. 이듬해에는 미국 잡지 포천이 선정한 미국의 40세 이하 부자 40명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이후 그는 유리시스템즈를 인수한 루슨트의 광대역네트워크사업 부문 사장으로 일했으며 2005년에는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 사장을 맡았다. 메릴랜드대 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07년이었다.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가 공동 진행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던 김 내정자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유력 대선 후보들을 만났는데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 대통령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김 내정자는 그 이전에도 사업 영역에서 한국과 관계를 이어 왔으며, 여름마다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려고 일주일씩 한국을 찾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김 내정자를 처음 만날 당시부터 눈여겨 보다가 지난해 말 당선 후 김 내정자를 신설될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내정했다. 새 정부의 '창조경제' 비전을 실현하는 데 적임자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정부조직법을 둘러싼 국회 논의가 시간을 끌고 방송 업무 관할을 놓고 여야간 줄다리기가 길어지면서 결국 김 내정자가 내정자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미래창조과학부는 신설되지 못했다.
김 내정자는 4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조국을 위해 (남은 일생을) 바치려던 꿈을 지키기 어렵고, 조국을 위해 바치려 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과학과 ICT(정보통신기술) 산업을 생산적으로 융합해 새로운 일자리와 미래성장동력을 창출해 한국의 미래를 열겠다"는 비전에 헌신하려던 김 내정자의 '코리안 드림'은 결국 좌절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