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국에 갈 수 없는 ‘조선족’입니다

입력 2021.04.24 (07:01)


지명광 씨는 '조선족'입니다. 올해 나이 38살. 중국 헤이룽장성 조선족 마을에서 나고 자라, 베이징의 유명 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의 한 중소기업에서 마케팅 담당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독일 베를린 유학 시절 지명광 씨 (지명광 씨 제공)독일 베를린 유학 시절 지명광 씨 (지명광 씨 제공)

■ 지명광 "저는 조선족입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조선어'를 썼습니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도 살아가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조선의 음식을 먹고, 조선의 놀이를 하고, 조선의 명절을 지냈습니다.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지명광 씨는 자신이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소수민족인 '조선족'임을 알게 됐습니다.

중국의 헌법은 조선족을 비롯한 55개 소수민족의 평등과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한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조선족 땅이 헐값에 넘어갔습니다. 고향 마을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옆 동네는 한족 마을에 편입됐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선족의 삶과 기억이 사라지는 모습에 상처를 받았고,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소송도 해보고, 언론사에 제보도 했지만, 변한 건 없었습니다.

부실 개발로 폐허가 된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의 지명광 씨 고향 마을 (지명광 씨 제공)부실 개발로 폐허가 된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의 지명광 씨 고향 마을 (지명광 씨 제공)

그러다 2017년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중국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영업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2019년엔 영주권을 취득했습니다.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영주권자가 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조선족'은 지명광 씨를 규정짓는 가장 정확한 이름이었습니다.

2020년 9월 19일 주한중국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 (지명광 씨 제공)2020년 9월 19일 주한중국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 (지명광 씨 제공)

■ "고향에서 한글 사라질거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 2020년, 중국 정부가 조선족 학교에서 조선어 수업을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꾸고, 조선어문 교재를 중국어로 바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필수 과목이 아니면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선택할 리가 없습니다. 조선족 마을에서 '한글'을 점차 사라지게 할 정책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국은 집회 결사의 자유가 있으니, 합법적으로 집회를 열고, '한글 퇴출 정책'의 문제점을 공론화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장소는 주한중국대사관 앞으로 정했습니다. 입술에 자물쇠를 채운 그림의 티셔츠를 맞춰 입고, "한글 말살 정책과 강제 한화 교육에 항의한다"는 현수막을 들었습니다.

KBS 취재진에게 사연을 설명하는 지명광 씨KBS 취재진에게 사연을 설명하는 지명광 씨

■ "조선족이지만 중국에 갈 수 없게 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향에 있는 여러 명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중국 공안이 지명광 씨에 대해 조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종교는 있는지 등을 따져 물었다고 합니다. 코로나19 방역 때문에 조사하는 거라고 했다는데, 당장 중국에 갈 계획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조사하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최근엔 대사관으로부터 중국 출입국을 할 수 없게 됐단 통보도 받았습니다.

주한중국대사관은 지명광 씨의 여권이 중국에서 불법 행위에 이용됐다며, 왜 여권을 넘겼냐고 따졌습니다. 지명광 씨는 여권이 자신에게 있고, 최근 중국을 방문한 적도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특히 중국 정책에 반대하는 다른 활동도 활발히 해온 조선족은 중국 내 상가 운영권을 몰수당했다고 합니다. 집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한편으론, 중국 정부가 우리를 이렇게까지 신경쓰는구나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4살 아들이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4살 아들을 제때 중국에 데리고 갈 수 없으면 언젠가는 불법체류자 신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명광 씨는 중국인이란 정체성을 버리고 한국으로 귀화 신청하려고 합니다. 한국에 남아서, 조선족의 뿌리를 지키는 일을 계속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언어 사라지는 中 소수민족…설 곳 잃는 조선족

중국의 소수민족 인구는 2019년 기준 1억 2천만 명입니다. 전체 인구의 8.5%입니다. 중국 헌법은 이들의 정체성 보호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소수민족의 정체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만주족의 언어는 이미 소멸됐습니다.

중국 정부는 2014년부터 소수민족이 모두 중국어를 구사하도록 해 사회 통합을 시킨다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신장위구르에선 2017년부터, 티베트에선 2018년부터 중국어 사용을 늘리는 정책이 시행돼 왔습니다. 2020년 7월부터 이 정책이 네이멍구와 조선족자치구 등으로 확대됐습니다.

네이멍구 몽골족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했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시위가 진행됐습니다. 30만 명 이상이 참여했는데, 중국 공안당국은 시위 주동자 얼굴을 공개하고 검거에 나섰습니다. 군용 장갑차까지 시내에 등장했습니다.

[연관기사] 中, 소수민족 언어교육 탄압…조선족 한글 교육 어쩌나 (2020년 9월 19일)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08393


티베트어 보존 캠페인을 벌인 티베트인은 '분열선동죄'란 명목으로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와 앰네스티 등은 판결이 부당하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조선족은 그동안 반발 움직임이 거세진 않았습니다. 인구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상황 등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한국 등 해외에 있는 조선족을 중심으로 최근 반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명광 씨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문제는 조선족이 민족정체성을 지키겠다고 중국 정부와 대립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조선족은 엄연히 중국인이기 때문에 '내정 간섭'으로 비춰질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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