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혁: 야, 항문. 너 말이야. 외상외과로 옮겨왔는데 계속 항문이라고 부르기는 좀 그래. 양재원: 예, 맞아요. 좀 그래요...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중 |
넷플릭스에서 공개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의학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주인공 백강혁 교수는 항문외과 출신의 전임의 양재원을 '항문'이라 부릅니다. 아무리 교수라지만 전공의 수련 과정까지 마친 의사를 이런 굴욕적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너무하다 싶은데, 정작 '항문'이라 불리는 당사자는 저항 의지조차 없어 보입니다. 그저 교수님께서 언제쯤 호칭을 바꿔주실까 기다릴 따름입니다. 물론 백강혁 교수가 후배이자 제자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담아 그렇게 부른다는 것 쯤은 시청자들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오랜 도제식 훈련으로 상하 규율이 엄격하면서도 관계가 끈끈한 직업군의 특성을 유쾌하게 담아낸 대목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의정 갈등이 장기화 되면서 의료계 내부의 갈등도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사제 간의 오랜 질서까지 무너지는 양상입니다.■교육부 발표가 발단..."의대생 이달 내 전원 복귀하면 모집 인원 감축" 발단은 지난 7일 교육부 발표였습니다. 이주호 사회부총리는 이날, 내년도 의대 모집 인원을 증원 전 수준인 3,058명으로 줄이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놨습니다.
조건은 현재 집단 휴학 중인 의대생들의 3월 내 복귀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제안이 일선 대학 총장들의 건의를 수용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만약 의대생들이 기한 내 복귀하지 않을 경우 정원은 2천 명 늘어난 그대로 5,058명을 유지하겠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2월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이후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의정 갈등이 교육부의 제안을 계기로 해소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렸습니다.
■ 무너지는 규율...박단 "학장이라는 자는"그러나 의대생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교육부의 발표를 이끌어낸 스승들에 대한 분노가 더 커 보였습니다. 의대생 단체인 '대한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는 교육부 발표 직후 입장문에서 대학 총장과 학장들을 향해
"교육부 장관 이주호처럼 학생들이 안 돌아오면 5,058명을 뽑겠다고 협박하고 있다"며
"교육자 입에서 일부러 교육을 더 못 받게 하겠다고 학생을 협박할 거라면, 교육과 학생을 위한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말라"고 밝혔습니다. '협박'을 유독 강조했습니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한 발 더 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학장이라는 자는 오히려 정부 권력에 편승해 제자들을 시궁창에 빠뜨리려 한다"며 "학생들을 상대로 끝까지 사기와 협박 뿐"이라고 게시했습니다. 교수들을 겨냥해 '학장이라는 자' '사기와 협박' 등의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한 논란이 잇따랐습니다. 급기야 건국대 의대에서는 수업에 참여한 일부 학생들을 향해 동급생들이 "이탈자들을 동료로 간주하지 않겠다"고 공개 협박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서울대 교수 4명 "전문가로서의 품격 찾아볼 수 없는 말들...오만하기 그지없어"서울대 일부 교수들이 실명을 걸고 제자들을 꾸짖게 되기까지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서울대 의대 하은진 (신경외과, 중환자의학과), 오주환 (국제보건정책), 한세원 (혈액종양내과), 강희경 (소아청소년과) 등 4명의 교수는 지난 17일 <복귀하는 동료는 더 이상 동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께>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의료계에서 기명 성명은 극히 드문 일인데, 그 내용은 더 이례적이었습니다.
먼저 박단 비대위원장의 페이스북 글에 대해 교수들은
"그 안에 가득한 환자에 대한 책임도, 동료에 대한 존중도, 전문가로서의 품격도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이 넘쳐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조금은 겸손하면 좋으련만 의사 면허 하나로 전문가 대접을 받으려는 모습도 오만하기 그지없습니다"며
" 그 글들을 읽다 보면 내가 아플 때, 내 가족이 이들에게 치료받게 될까 봐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고 직격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언론에 소개된 대목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이 성명의 후반부를 보면 다분히 박단 비대위원장을 겨냥한 글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수련 환경이 가혹?...전문의 된 뒤에도 힘들게 사나?"앞서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전공의협의회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등과 함께 지난 10일 국회에서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을 주제로 토론을 개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단 비대위원장은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노동 착취가 합리화되고 있다"며 전공의 수련 과정의 부당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전공의 수련 시간을 주당 80시간에서 64시간으로 줄이고 장기적으로는 근로기준법 특례 업종에서 의료인을 삭제해 주 52시간 상한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공의 급여 체계의 문제도 언급하면서 "포괄임금제를 금하고 휴일·연장·야간 수당도 지급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한마디로 전공의들이 수련이란 명목으로 낮은 임금과 긴 노동 시간을 감수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4명의 서울대 교수들은 이번 성명에서 "수련 환경이 가혹하고 내용적으로 부족한 점,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면서도,
"지난 국회 토론회에서 여러분이 요구한 것은 오직 노동 시간과 월급 이야기뿐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수련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지 않은 점을 부각한 겁니다. 교수들은 이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공의 과정이 힘들다고 해서, 전문의가 된 후에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대다수는 고액 연봉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대목입니다.
■박단 "교수라 불릴 자격도 없는 몇몇 분...위선을 실토"박단 비대위원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즉각 대응했습니다. 언사는 더 거칠어졌습니다. 우선 제목이
< 교수라 불릴 자격도 없는 몇몇 분들께>입니다.
"교육을 얼마나 등한시했던 건지. 교수의 역할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교수의 본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성 없이 당당하게 이야기하니 당혹스럽기까지 하다"고 서울대 교수들의 성명을 공격했습니다.
"교육자로서 본분을 다하지 않은 교수 네 분의 자백"이라며
"이런 사태가 벌어져야만 위선을 실토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다분히 감정적인 표현들입니다. 사제 간 규율이 엄격한 의료계의 관행을 고려하면 사실 충격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박단 비대위원장은 서울대 교수들이 의대생들의 복귀를 촉구한 대목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번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는 오로지 국회 토론회 관련 내용만을 겨냥했습니다. 전공의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대응했다기보다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교수들의 반박을 재반박한 글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글의 말미에서는
"언론도 (교수들의 성명을) 무분별하게 퍼 나르지 않길 바란다"는 경고까지 덧붙였습니다.
■ '대규모 제적' 현실화 가능성...의대생들의 여론은?교육부가 제시한 의대생들의 복귀 시한은 3월이지만, 대학별로 날짜가 조금씩 다릅니다. 가장 빠른 시점은 연세대와 고려대가 밝힌 오는 21일입니다.
교육부가 미복귀 학생들을 학칙대로 처리할 것을 종용했기 때문에 이르면 이번 주 내로 대규모 유급과 제적이 현실화할 수 있습니다. 교수와 학생 모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직 전공의들 역시 집단행동의 한 축인 의대생들이 무너지면 의료계 전체의 투쟁 대오가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대생들의 복귀를 막아야 하는 입장입니다.
성명에 참여한 강희경 교수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수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상당수임에도 다수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속적으로 학생들을 인터뷰한 결과라고도 덧붙였습니다. 반면 김성근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어떤 것이 (의대생들의) 다수 의견인지 (학생 대표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있다"며
"각자 주체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의사협회는 의대생 절대다수가 수업 복귀를 거부하는 데 찬성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 협회와 일선 교수들의 현실 인식조차 이렇게 극명히 대조되기 때문에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당사자인 의대생들조차 알 수 없을 듯합니다.
언젠가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학교와 병원으로 돌아오더라도, 의정 갈등의 과정에서 사제가 주고받은 날 선 언어의 상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번 성명에 참여한 4명의 서울대 교수들도 한 때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을 지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교육 현장에서 제자들을 대면해야 하는 교수들이 실명을 걸고 변화된 입장을 밝히며 던진 쓴소리를 그 당사자들은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채로 공개되는 감정적인 표현들이 오랜 의정 갈등을 인내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도 돌이켜 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