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울리는 노래 ‘도라지’

입력 2006.08.15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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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광복절인 오늘도 일본 오키나와엔 태평양 전쟁 당시 숨진 만 5천여 명의 우리 원혼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강제노역에 끌려간 근로자와 함께 정확한 숫자조차 헤아릴 수 없는 일본군 위안부가 포함돼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오키나와로 끌려간 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숨져간 우리 여인들의 삶을 홍성철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오키나와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의 도카시키 섬에는. 한국인 위안부들을 기리기 위한 '아리랑 위령탑'이 있습니다.

이 탑은 한국인 영화감독 박남수 씨 등의 노력으로 지난 1997년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뷰>아라가끼 가즈노리(오키나와 도카시키촌역장 총무과장) :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촌의회 의장이 자신의 개인 땅을 제공해 위령탑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아리랑 위령탑은 더 이상 이곳을 지원하는 단체가 없기 때문에 섬 주민들이 가끔 주변을 정리할 뿐 사실상 이곳의 관리는 방치돼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위안부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인터뷰>고미네 다카요시(오키나와 도카시키) : "(15명의 위안부 가운데) 5명은 1946년쯤 섬 주민들과 함께 오키나와 나하로 돌아갔습니다."

이 섬에 살았던 15명의 위안부 가운데 한국인은 5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배봉기 할머니입니다.

배봉기 할머니에게도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는 있었습니다.

배봉기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1977년 최초로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며 귀국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친구도 가족도, 의지할 곳도 없이 살던 할머니는 1991년, 76살의 나이에 쓸쓸히 숨졌습니다.

29, 꽃다운 나이에 어린 두 아이를 고국에 두고 일본군에 끌려온 지 50여 년 만입니다.

<인터뷰>이도가쓰 게이꼬(참의원 의원) : "창 옆에 뜯지 않은 야쿠르트 병이 3~4개가 있어 문을 열어 보니 배봉기 할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습니다."

한 일본인은 배봉기 할머니의 애통한 삶을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효과>도라지 노래 : '도라지 한 맺힌 오키나와의 하늘을 물들여 볼께요. 도라지꽃 같은 보라색으로 말도 잃어버려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라네. 고향이 그립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라네. 아이고! 아이고!"

그냥 덮어버리기엔 너무 아픈 우리 역사의 상처들.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리는 정부 차원의 조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데, 오히려 일본인들이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과거를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홍성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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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키나와에서 울리는 노래 ‘도라지’
    • 입력 2006-08-15 20:17:11
    뉴스타임
<앵커 멘트> 광복절인 오늘도 일본 오키나와엔 태평양 전쟁 당시 숨진 만 5천여 명의 우리 원혼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강제노역에 끌려간 근로자와 함께 정확한 숫자조차 헤아릴 수 없는 일본군 위안부가 포함돼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오키나와로 끌려간 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숨져간 우리 여인들의 삶을 홍성철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오키나와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의 도카시키 섬에는. 한국인 위안부들을 기리기 위한 '아리랑 위령탑'이 있습니다. 이 탑은 한국인 영화감독 박남수 씨 등의 노력으로 지난 1997년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뷰>아라가끼 가즈노리(오키나와 도카시키촌역장 총무과장) :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촌의회 의장이 자신의 개인 땅을 제공해 위령탑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아리랑 위령탑은 더 이상 이곳을 지원하는 단체가 없기 때문에 섬 주민들이 가끔 주변을 정리할 뿐 사실상 이곳의 관리는 방치돼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위안부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인터뷰>고미네 다카요시(오키나와 도카시키) : "(15명의 위안부 가운데) 5명은 1946년쯤 섬 주민들과 함께 오키나와 나하로 돌아갔습니다." 이 섬에 살았던 15명의 위안부 가운데 한국인은 5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배봉기 할머니입니다. 배봉기 할머니에게도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는 있었습니다. 배봉기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1977년 최초로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며 귀국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친구도 가족도, 의지할 곳도 없이 살던 할머니는 1991년, 76살의 나이에 쓸쓸히 숨졌습니다. 29, 꽃다운 나이에 어린 두 아이를 고국에 두고 일본군에 끌려온 지 50여 년 만입니다. <인터뷰>이도가쓰 게이꼬(참의원 의원) : "창 옆에 뜯지 않은 야쿠르트 병이 3~4개가 있어 문을 열어 보니 배봉기 할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습니다." 한 일본인은 배봉기 할머니의 애통한 삶을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효과>도라지 노래 : '도라지 한 맺힌 오키나와의 하늘을 물들여 볼께요. 도라지꽃 같은 보라색으로 말도 잃어버려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라네. 고향이 그립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라네. 아이고! 아이고!" 그냥 덮어버리기엔 너무 아픈 우리 역사의 상처들.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리는 정부 차원의 조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데, 오히려 일본인들이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과거를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홍성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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