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현장] 깊어가는 러·서방 갈등

입력 2008.08.31 (08:57) 수정 2008.08.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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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그루지야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미국 등 서방과 러시아간의 신경전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루지야의 흑해연안에서 양쪽의 함정들이 대치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그루지야 내 두 자치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독립 승인을 놓고도 날선 공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전략 요충인 그루지야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 구도가 냉전 이후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박성래 순회특파원이 현장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그루지야 흑해연안의 포티, 그루지야의 최대의 항구도십니다. 침몰된 채 방치된 그루지야 해안경비정은 포티항을 누가 장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항구 바깥 15킬로미터 지점에는 아직도 러시아 함대가 정박하며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상당수 러시아군이 그루지야에서 철수했지만 포티를 비롯한 몇몇 지역은 예외입니다. 아직도 러시아군을 쉽게 볼 수 있고 일부는 참호를 파며 장기주둔에 대비하려는 듯한 모습도 목격됐습니다.

국제적 눈총에 밀려 철군 약속을 지키는 시늉은 하고 있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안전지대'라는 명목으로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 불과 5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 바투미,

구 소련시절 러시아인들의 휴양지로 각광받던 이곳에는 미국 구축함이 입항했습니다. 미국은 난민들에게 전달할 식량과 의약품 등 구호품을 싣고 온 것뿐이라며 인도적인 조치임을 극구 강조합니다.

<녹취> 존 무어(미 해군 준장): "인도적인 물품들을 더 많이 그리고 안전하고 신속하게 지원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투미에 입항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토마호크 미사일까지 장착한 군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도발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녹취> 노고비친(러시아군 부참모장): "나토군이 흑해에 집결했습니다. 러시아 함대는 나토군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는 조치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해 미국과 독일 폴란드 등 나토 회원국들의 군함이 속속 흑해로 들어오고 있어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항구봉쇄를 통해 그루지야 경제의 숨통을 틀어막음으로써 친미정권의 붕괴를 노리고 있고, 미국은 친미정권의 붕괴를 구경만 하지는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 벌써 신냉전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분석은 그래서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깃장에 대해 러시아는 또 다른 어깃장으로 맞불을 놓았습니다. 그루지야의 자치공화국인 남 오세티야와 압하지아의 독립을 승인해 버린 겁니다.

<녹취> 메드베데프(러시아 대통령):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의 독립 승인안에 서명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동참하길 바랍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야 주민들은 축포를 쏘며 러시아의 독립 승인을 반겼습니다.

<녹취> 포프(압하지아 주민):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너무 기쁩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우리를 지원해준 조국 러시아에 감사합니다. 오늘은 독립기념일입니다."

러시아로선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선택입니다. 이들을 독립시킬 경우 자칫 체첸이나 다게스탄을 비롯한 러시아 내 자치공화국들이 너도나도 독립을 요구하고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그루지아 친미정권 붕괴를 압박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루지야의 친미정권은 더욱 갑갑해졌습니다. 그루지야 경제의 숨통이 러시아군에 짓눌린데다가 영토마저 잃게 되면 그야말로 치명상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를 비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녹취> 샤카슈빌리(그루지야 대통령): "러시아는 그루지야 영토 두 곳에 대해서 일방적인 결정을 했습니다. 나치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 같은 행동입니다."

러시아군의 점령이 장기화가 그루지야 경제의 발목을 잡으면서 서민들, 특히 도시빈민들의 삶이 더욱 고달파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러시아에 대한 그루지야인들의 반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녹취> 탈라바제: "남 오세티야와 압하지아는 우리 땅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영토입니다. (러시아의 침략이란 말입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러시아의 침략입니다."

<녹취> 루스탄지키아: "러시아군의 철군시한이 지났습니다. 전 세계가 물러가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러시아 물러가라'"

러시아가 초강수를 들고 나오자 미국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강한 유감을 표명하는 한편, 다음주 체니 부통령을 그루지야에 보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정도입니다.

<녹취> 라이스(미 국무장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러시아는 수많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어기게 됩니다."

사실 미국이 빼들 수 있는 카드는 마땅치 않습니다. 러시아의 WTO가입을 막고 경제재제를 가하자는 얘기도 흘러나오지만 그 실효성은 의문스럽습니다.

지난해 미국과 러시아의 교역량은 57%나 증가했습니다. GM을 비롯한 미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버금가는 산유량을 자랑하는 러시아를 경제적인 수단으로 압박하면 미국도 불편해집니다.

러시아의 석유에 의존하는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루지야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적어도 자신들의 앞마당에선 미국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습니다.

<녹취> 바분슈빌리(그루지야 국제 분석가): "미국이 할 수 있는 건 소치 올림픽을 보이코트하거나, 서방 은행의 러시아 자산을 동결하거나, G-8에서 쫓아내거나, 군사협력을 중단하는 것 정도입니다."

러시아는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 냉전이 오기를 바라진 않지만 그렇게 된다면 서방의 책임이라며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아직은 신냉전이라고 부르기엔 이르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녹취> 밀리밴드(영국 외무장관): "우리는 새로운 냉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고 미국의 주도권이 약화되는 추세라면 시간문제가 아니겠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세계 지도자 가운데 누가 신뢰도가 높으냐는 최근의 여론조사결과는 이런 추세와 무관치 않습니다.

푸틴 러시아 총리가 2위에 오른 반면, 부시 미국 대통령은 하위권에 처졌습니다. 냉전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로선 러시아의 달라진 위상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 4강인 러시아의 급격한 위상변화에 따라 북핵 6자회담과 경제협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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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 현장] 깊어가는 러·서방 갈등
    • 입력 2008-08-31 08:00:16
    • 수정2008-08-31 09:05:37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그루지야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미국 등 서방과 러시아간의 신경전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루지야의 흑해연안에서 양쪽의 함정들이 대치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그루지야 내 두 자치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독립 승인을 놓고도 날선 공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전략 요충인 그루지야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 구도가 냉전 이후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박성래 순회특파원이 현장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그루지야 흑해연안의 포티, 그루지야의 최대의 항구도십니다. 침몰된 채 방치된 그루지야 해안경비정은 포티항을 누가 장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항구 바깥 15킬로미터 지점에는 아직도 러시아 함대가 정박하며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상당수 러시아군이 그루지야에서 철수했지만 포티를 비롯한 몇몇 지역은 예외입니다. 아직도 러시아군을 쉽게 볼 수 있고 일부는 참호를 파며 장기주둔에 대비하려는 듯한 모습도 목격됐습니다. 국제적 눈총에 밀려 철군 약속을 지키는 시늉은 하고 있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안전지대'라는 명목으로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 불과 5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 바투미, 구 소련시절 러시아인들의 휴양지로 각광받던 이곳에는 미국 구축함이 입항했습니다. 미국은 난민들에게 전달할 식량과 의약품 등 구호품을 싣고 온 것뿐이라며 인도적인 조치임을 극구 강조합니다. <녹취> 존 무어(미 해군 준장): "인도적인 물품들을 더 많이 그리고 안전하고 신속하게 지원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투미에 입항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토마호크 미사일까지 장착한 군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도발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녹취> 노고비친(러시아군 부참모장): "나토군이 흑해에 집결했습니다. 러시아 함대는 나토군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는 조치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해 미국과 독일 폴란드 등 나토 회원국들의 군함이 속속 흑해로 들어오고 있어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항구봉쇄를 통해 그루지야 경제의 숨통을 틀어막음으로써 친미정권의 붕괴를 노리고 있고, 미국은 친미정권의 붕괴를 구경만 하지는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 벌써 신냉전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분석은 그래서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깃장에 대해 러시아는 또 다른 어깃장으로 맞불을 놓았습니다. 그루지야의 자치공화국인 남 오세티야와 압하지아의 독립을 승인해 버린 겁니다. <녹취> 메드베데프(러시아 대통령):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의 독립 승인안에 서명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동참하길 바랍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야 주민들은 축포를 쏘며 러시아의 독립 승인을 반겼습니다. <녹취> 포프(압하지아 주민):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너무 기쁩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우리를 지원해준 조국 러시아에 감사합니다. 오늘은 독립기념일입니다." 러시아로선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선택입니다. 이들을 독립시킬 경우 자칫 체첸이나 다게스탄을 비롯한 러시아 내 자치공화국들이 너도나도 독립을 요구하고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그루지아 친미정권 붕괴를 압박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루지야의 친미정권은 더욱 갑갑해졌습니다. 그루지야 경제의 숨통이 러시아군에 짓눌린데다가 영토마저 잃게 되면 그야말로 치명상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를 비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녹취> 샤카슈빌리(그루지야 대통령): "러시아는 그루지야 영토 두 곳에 대해서 일방적인 결정을 했습니다. 나치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 같은 행동입니다." 러시아군의 점령이 장기화가 그루지야 경제의 발목을 잡으면서 서민들, 특히 도시빈민들의 삶이 더욱 고달파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러시아에 대한 그루지야인들의 반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녹취> 탈라바제: "남 오세티야와 압하지아는 우리 땅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영토입니다. (러시아의 침략이란 말입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러시아의 침략입니다." <녹취> 루스탄지키아: "러시아군의 철군시한이 지났습니다. 전 세계가 물러가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러시아 물러가라'" 러시아가 초강수를 들고 나오자 미국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강한 유감을 표명하는 한편, 다음주 체니 부통령을 그루지야에 보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정도입니다. <녹취> 라이스(미 국무장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러시아는 수많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어기게 됩니다." 사실 미국이 빼들 수 있는 카드는 마땅치 않습니다. 러시아의 WTO가입을 막고 경제재제를 가하자는 얘기도 흘러나오지만 그 실효성은 의문스럽습니다. 지난해 미국과 러시아의 교역량은 57%나 증가했습니다. GM을 비롯한 미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버금가는 산유량을 자랑하는 러시아를 경제적인 수단으로 압박하면 미국도 불편해집니다. 러시아의 석유에 의존하는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루지야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적어도 자신들의 앞마당에선 미국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습니다. <녹취> 바분슈빌리(그루지야 국제 분석가): "미국이 할 수 있는 건 소치 올림픽을 보이코트하거나, 서방 은행의 러시아 자산을 동결하거나, G-8에서 쫓아내거나, 군사협력을 중단하는 것 정도입니다." 러시아는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 냉전이 오기를 바라진 않지만 그렇게 된다면 서방의 책임이라며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아직은 신냉전이라고 부르기엔 이르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녹취> 밀리밴드(영국 외무장관): "우리는 새로운 냉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고 미국의 주도권이 약화되는 추세라면 시간문제가 아니겠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세계 지도자 가운데 누가 신뢰도가 높으냐는 최근의 여론조사결과는 이런 추세와 무관치 않습니다. 푸틴 러시아 총리가 2위에 오른 반면, 부시 미국 대통령은 하위권에 처졌습니다. 냉전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로선 러시아의 달라진 위상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 4강인 러시아의 급격한 위상변화에 따라 북핵 6자회담과 경제협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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