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뉴스] ‘3만 달러 시대’ 기술이 밑거름

입력 2011.01.03 (22:11) 수정 2011.01.0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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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멘트>

가죽에 쓸리고 못에 찔려 손마디가 굳은살 투성이인 경력 20여 년의 구두 장인입니다.

아들이 대도시 대학에 가는 대신 자신의 뒤를 이어 구두를 만들겠다는 말에 더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전통기술에 대한 이런 자부심,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리포트>

외딴 도로변에 간판 하나 없는 건물. 세계 각국에 진출해 있고, 우리나라에서만 1년 매출 100억 원이 넘는 수제화 기업입니다.

1929년 한 장인이 12세기부터 이어온 볼로냐 공법으로 하루에 구두 4켤레를 만들던 공방을 딸과 사위가 물려받았습니다.

몸집만 커졌을 뿐 그 자리, 그 기술 그대로입니다.

두께 0.1 밀리미터 가죽을 말끔한 곡선으로 박음질하고, 손톱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구멍 장식들을 만드는 건 육중하고 투박한 장인의 손입니다.

<인터뷰> 지오반니 갈라(구두 장인/25년 경력) : "내가 만드는 구두는 매우 아름답고,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구두는 내 아들과 같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 이상 경력의 장인들이 구두 한 켤레를 만드는 데 두 달 정도 걸립니다.

수작업 공정만 2백여 개, 전량 볼로냐 생산입니다.

대량 생산과 요란한 광고보다는 가장 아름답고 편한 신발로 인정받겠다는 옹고집이 벨기에 국왕,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명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입니다.

<인터뷰> 엔조 피니(아 테스토니 회장) : "기본은 구두를 만드는 열정입니다. 장인들에게 수작업을 가르치는 것은 특별한 예술품을 만드는 기쁨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기자 멘트>

장인들의 손재주와 열정만으로 전통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실력 있는 작은 공방들이 대기업에 흡수돼 버리지는 않을까요?

이탈리아 가구 도시 '메다'에서 그 답을 찾아봤습니다.

<리포트>

수백 년 된 서랍장을 복원하고, 루이 14세 양식을 재연하는 아이들, 미래의 가구 장인들입니다.

<인터뷰> 자까리아(17살) :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을 하고, 내 공방에서 내 자신의 물건을 만들고 싶다."

자까리아처럼 장인을 꿈꾸는 학생들의 95%가 학교를 졸업한 뒤 세계적인 가구업체의 공방으로 바로 진출하게 됩니다.

메다 시의 가구 기업은 600개, 공방은 천 개가 넘습니다.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면서도 각자의 영역은 좀처럼 침범하지 않습니다.

또 섬세한 수작업은 소규모 공방에 위탁 하는 방식으로 협력 체제를 유지합니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마리아니 가문도 고급 의자만 1년에 100개 정도 주문생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뻬삐노 마리아니(가구 장인/69살) : "우리와 달리 대기업은 한 제품을 수천 개, 여러 종류로 만든다. 장인들은 큰 기업과 경쟁하는 대신 고유 영역을 지켜야..."

시에서는 장인들의 기술 개발을 돕거나 세금을 면제해 줍니다.

<인터뷰> 조르지오 따베찌아(메다 시장) : "소단위의 지원기관을 만들어서 생산활동과 해외 활동을 돕습니다. 이를 통해 해외 전시에 많이 참여합니다."

장인과 기업, 학교와 지자체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메다를 세계적인 가구 도시로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뿌리명장과 산업명장 모두 합쳐 566명의 명장이 있습니다.

국제 기능올림픽 우승만 16번, 메달 리스트가 480명이 넘지만 이 가운데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명장이라는 영예를 얻고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기능인들, 김시원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기아차에서 23년 동안 금속 주조 일을 했던 강 모씨.

지난 1995년엔 최고 영예인 산업 명장으로 뽑혔습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퇴직한 뒤 13년 동안 관련된 일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녹취> 강 모씨(95년 명장 선정) : "자기가 터득한 기술을 후배 양성이나 나를 필요로 하는 부분에 가서 보수를 떠나 제공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거죠"

유연근 사장은 지난 1988년 국제 기능 올림 픽 대회 판금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지금은 동생과 함께 작은 임가공 업체를 운영합니다.

<녹취> 유연근 : "다니다가 진급이 안 되니까 자기 분야에서 자기 사업하는 거에요. 조그맣게."

<녹취> "반갑다!"

그러면 기능인들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뭘까.

<녹취> 오종민 : "얼마를 받든간에 너무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 주변사람들이 왜곡하는 그런 시선이 안타깝죠."

<녹취> 유연근 : "옆에서 같이 느끼고 손으로 감으로 느끼는 게 손 기술이거든요. 그걸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맥이 끊겼다는 게 그 의미에요."

좋아하는 일을 자부심 갖고 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기능인들.

만나는 내내 되풀이 한 말은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 였습니다.

<기자 멘트>

정부는 지난해부터 기술인력을 양성 하겠다면서 야심차게 마이스터 고등학교를 출범시켰지만, 올해 부산의 한 마이스터 고등학교의 경우 졸업생 77%가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기능 인재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산업현장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정정훈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스위스 취리히 인근의 직업학교. 모두 2,500명의 학생이 있지만 많은 교실들이 비어있습니다.

이 곳의 학생들은 일주일에 4일 정도는 기업에서 기술을 배웁니다.

이 때문에 학교에 오는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에 불과합니다.

이론 학습은 학교가, 실습과 현장교육은 기업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인터뷰>마르쿠스 크래엔뷜(직업학교 교장) : "현장근로자들의 능력은 직업훈련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스위스의 기술력이 전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의무교육을 마치면 80% 정도가 직업학교로 진학하고, 졸업과 동시에 대부분 취업합니다.

<인터뷰>루치 톰만('톰만' 사장) : "견습생들이 없었다면 우리 회사는 지금처럼 크게 성장하지 못했을겁니다."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이 자동차 회사도 중심에는 160년 역사의 직업학교가 있습니다.

<인터뷰>라니에리 니꼴리(생산 총괄) : "학생들이 이곳에서 3년 동안 배우면서 일하고 그 이후에는 우리 회사에 채용됩니다."

청년실업과 인력난이라는 모순적인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경제가 대학 진학률 30%도 안 되는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지켜봐야 할 이유입니다.

KBS 뉴스 정정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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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01-03 22:11:22
    • 수정2011-01-03 2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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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멘트> 가죽에 쓸리고 못에 찔려 손마디가 굳은살 투성이인 경력 20여 년의 구두 장인입니다. 아들이 대도시 대학에 가는 대신 자신의 뒤를 이어 구두를 만들겠다는 말에 더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전통기술에 대한 이런 자부심,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리포트> 외딴 도로변에 간판 하나 없는 건물. 세계 각국에 진출해 있고, 우리나라에서만 1년 매출 100억 원이 넘는 수제화 기업입니다. 1929년 한 장인이 12세기부터 이어온 볼로냐 공법으로 하루에 구두 4켤레를 만들던 공방을 딸과 사위가 물려받았습니다. 몸집만 커졌을 뿐 그 자리, 그 기술 그대로입니다. 두께 0.1 밀리미터 가죽을 말끔한 곡선으로 박음질하고, 손톱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구멍 장식들을 만드는 건 육중하고 투박한 장인의 손입니다. <인터뷰> 지오반니 갈라(구두 장인/25년 경력) : "내가 만드는 구두는 매우 아름답고,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구두는 내 아들과 같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 이상 경력의 장인들이 구두 한 켤레를 만드는 데 두 달 정도 걸립니다. 수작업 공정만 2백여 개, 전량 볼로냐 생산입니다. 대량 생산과 요란한 광고보다는 가장 아름답고 편한 신발로 인정받겠다는 옹고집이 벨기에 국왕,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명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입니다. <인터뷰> 엔조 피니(아 테스토니 회장) : "기본은 구두를 만드는 열정입니다. 장인들에게 수작업을 가르치는 것은 특별한 예술품을 만드는 기쁨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기자 멘트> 장인들의 손재주와 열정만으로 전통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실력 있는 작은 공방들이 대기업에 흡수돼 버리지는 않을까요? 이탈리아 가구 도시 '메다'에서 그 답을 찾아봤습니다. <리포트> 수백 년 된 서랍장을 복원하고, 루이 14세 양식을 재연하는 아이들, 미래의 가구 장인들입니다. <인터뷰> 자까리아(17살) :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을 하고, 내 공방에서 내 자신의 물건을 만들고 싶다." 자까리아처럼 장인을 꿈꾸는 학생들의 95%가 학교를 졸업한 뒤 세계적인 가구업체의 공방으로 바로 진출하게 됩니다. 메다 시의 가구 기업은 600개, 공방은 천 개가 넘습니다.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면서도 각자의 영역은 좀처럼 침범하지 않습니다. 또 섬세한 수작업은 소규모 공방에 위탁 하는 방식으로 협력 체제를 유지합니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마리아니 가문도 고급 의자만 1년에 100개 정도 주문생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뻬삐노 마리아니(가구 장인/69살) : "우리와 달리 대기업은 한 제품을 수천 개, 여러 종류로 만든다. 장인들은 큰 기업과 경쟁하는 대신 고유 영역을 지켜야..." 시에서는 장인들의 기술 개발을 돕거나 세금을 면제해 줍니다. <인터뷰> 조르지오 따베찌아(메다 시장) : "소단위의 지원기관을 만들어서 생산활동과 해외 활동을 돕습니다. 이를 통해 해외 전시에 많이 참여합니다." 장인과 기업, 학교와 지자체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메다를 세계적인 가구 도시로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뿌리명장과 산업명장 모두 합쳐 566명의 명장이 있습니다. 국제 기능올림픽 우승만 16번, 메달 리스트가 480명이 넘지만 이 가운데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명장이라는 영예를 얻고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기능인들, 김시원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기아차에서 23년 동안 금속 주조 일을 했던 강 모씨. 지난 1995년엔 최고 영예인 산업 명장으로 뽑혔습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퇴직한 뒤 13년 동안 관련된 일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녹취> 강 모씨(95년 명장 선정) : "자기가 터득한 기술을 후배 양성이나 나를 필요로 하는 부분에 가서 보수를 떠나 제공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거죠" 유연근 사장은 지난 1988년 국제 기능 올림 픽 대회 판금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지금은 동생과 함께 작은 임가공 업체를 운영합니다. <녹취> 유연근 : "다니다가 진급이 안 되니까 자기 분야에서 자기 사업하는 거에요. 조그맣게." <녹취> "반갑다!" 그러면 기능인들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뭘까. <녹취> 오종민 : "얼마를 받든간에 너무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 주변사람들이 왜곡하는 그런 시선이 안타깝죠." <녹취> 유연근 : "옆에서 같이 느끼고 손으로 감으로 느끼는 게 손 기술이거든요. 그걸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맥이 끊겼다는 게 그 의미에요." 좋아하는 일을 자부심 갖고 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기능인들. 만나는 내내 되풀이 한 말은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 였습니다. <기자 멘트> 정부는 지난해부터 기술인력을 양성 하겠다면서 야심차게 마이스터 고등학교를 출범시켰지만, 올해 부산의 한 마이스터 고등학교의 경우 졸업생 77%가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기능 인재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산업현장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정정훈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스위스 취리히 인근의 직업학교. 모두 2,500명의 학생이 있지만 많은 교실들이 비어있습니다. 이 곳의 학생들은 일주일에 4일 정도는 기업에서 기술을 배웁니다. 이 때문에 학교에 오는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에 불과합니다. 이론 학습은 학교가, 실습과 현장교육은 기업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인터뷰>마르쿠스 크래엔뷜(직업학교 교장) : "현장근로자들의 능력은 직업훈련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스위스의 기술력이 전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의무교육을 마치면 80% 정도가 직업학교로 진학하고, 졸업과 동시에 대부분 취업합니다. <인터뷰>루치 톰만('톰만' 사장) : "견습생들이 없었다면 우리 회사는 지금처럼 크게 성장하지 못했을겁니다."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이 자동차 회사도 중심에는 160년 역사의 직업학교가 있습니다. <인터뷰>라니에리 니꼴리(생산 총괄) : "학생들이 이곳에서 3년 동안 배우면서 일하고 그 이후에는 우리 회사에 채용됩니다." 청년실업과 인력난이라는 모순적인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경제가 대학 진학률 30%도 안 되는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지켜봐야 할 이유입니다. KBS 뉴스 정정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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