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러, 칼리닌그라드의 도전

입력 2011.03.1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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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시청자 여러분 혹시 칼리닌그라드를 아십니까? 역사적 비운을 겪으며 러시아 본토에서 떨어져 폴란드와 발트3국 사이에 끼어 있는 러시아 영토인데요...

한때 러시아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사회적 병폐가 심한 곳으로 낙인 찍혔지만 지금은 모범적인 지역 발전 모델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김명섭 특파원이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쭉 뻗은 사구, 세계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모래언덕으로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러시아에서 발트3국을 지나 폴란드쪽으로 향한 바로 이 모래언덕에서 러시아의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가 시작됩니다.

바다를 지나 강을 거슬러 오르면 독일풍의 한 성당과 마주칩니다. 이 성당에 근대 서양 철학을 확립한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묘가 있습니다. 칸트는 과거 독일 영토로 쾨니히스베르크로 불렸던 이곳을 평생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터뷰> 이바노비치(관광객/모스크바 주민):"과거 칸트 같은 철학자가 있었기에 현대 학문이 완성된 거죠."

2차세계대전 전에는 쾨니히스베르크였던 이 도시는 중세 독일풍의 성과 운하가 어우러져 북유럽에서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2차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봄, 히틀러는 베를린 사수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쾨니히스베르크의 총력 방어를 명령합니다.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10만 소련군과 이곳을 방어하는 5만의 독일군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대격전을 벌입니다. 당시 쾨니히스베르크의 5 요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병사들이 숨진 최대 격전지였습니다. 이 요새를 빼앗고 도시를 점령한 러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베를린까지 진격합니다.

<인터뷰> 폴리나(칼리닌그라드 주민):"칼리닌그라드가 점령되면서 2차대전은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 후 모든 것이 파괴돼 잿더미만 남았고, 독일인들이 모두 쫓겨난 자리를 본토에서 이주한 러시아인들이 채웠습니다. 소련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소련의 사회체제가 그대로 이식됐습니다.

<인터뷰> 세르게이(칼리닌그라드 주민):"내가 어렸을 때 이 도시는 온통 폐허뿐이었고 시내 중앙에 몇 개의 커다란 건물이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칼리닌그라드는 소련 발틱함대의 기지로 러시아인들조차 통행이 쉽지 않은 감춰진 군사도시였습니다. 20년 전 소 연방 해체 뒤 유럽의 섬처럼 고립된 칼리닌그라드 역시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는 군사 전략 요충지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나탈리아(러 사회정책연구소 지역프로그램 국장):"칼리닌그라드 지역은 해군이 밀집한 전략 기지였기 때문에 소련 시대에서 시장 사회로 이행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개방 이후 지역 경제 사정은 오히려 나빠져 러시아에서 가장 경제 수준이 떨어지는 지역으로까지 몰락했습니다. 반면 유럽과 가까운 덕택에 각종 밀수가 성행하고 퇴폐적인 문화가 유입돼 마약과 AIDS 감염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모스크바 근교 출신의 10대 간호병으로 칼리닌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던 야나 할머니, 전쟁 후 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60여 년간 겨우겨우 살아왔지만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놓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야나(칼리닌그라드 전투 참전 용사):"생존은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쉽게 용기를 잃거나 낙담하지 않았어요."

희망을 꿈꾸던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이 열린 것은 지난 2000년대입니다. 이 일대가 자유무역지대가 지정된 뒤 외국의 각종 공산품이 들어와 이곳 공장에서 재조립되고 관세 없이 러시아 본토에 운송됐습니다.

<인터뷰> 나탈리아(러 사회정책연구소 지역프로그램 국장):"러시아로 들어오는 자동차와 각종 가구, 식품 등의 재가공 산업이 형성됐습니다. 기존의 소련 사회에서는 없던 것이었죠."

가공 무역이 활기를 띄면서 러시아 여타 지역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2008년 경제 위기 때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회복세가 빨라 지난 2년간 러시아 평균 경제성장률 2%보다 훨씬 높은 17%를 기록했습니다.

칼리닌그라드시의 중심가 승리광장은 언제나 활기로 넘쳐납니다.

이곳 칼리닌그라드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과거의 어두운 경험을 교훈 삼아 내일에 대한 우려보다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과 6년 전까지만 해도 레닌 동상을 중심으로 몇 채의 옛 소련의 관공서 건물만 썰렁하게 자리했던 광장 주위가 온통 현대식 건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인터뷰> 안젤라(칼리닌그라드 주민):"시내 중심이 많이 변했어요. 빌딩들이 새로 세워졌고, 무역과 쇼핑센터가 늘어 도시가 한결 살기 좋아졌어요."

도시 곳곳에 조성되는 주택단지는 유럽 어느 명품 도시 못지않게 아름답고 세련되게 꾸며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올가(칼리닌그라드 주민):"과거에 비해 훨씬 좋아졌어요. 새 건물과 새 길이 들어섰잖아요."

소련 연방 해체 후 20년 동안 러시아 어느 곳보다 가장 많은 변화를 거친 칼리닌그라드, 유럽의 전통 속에서 러시아의 잠재력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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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리포트] 러, 칼리닌그라드의 도전
    • 입력 2011-03-13 09:13:13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시청자 여러분 혹시 칼리닌그라드를 아십니까? 역사적 비운을 겪으며 러시아 본토에서 떨어져 폴란드와 발트3국 사이에 끼어 있는 러시아 영토인데요... 한때 러시아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사회적 병폐가 심한 곳으로 낙인 찍혔지만 지금은 모범적인 지역 발전 모델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김명섭 특파원이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쭉 뻗은 사구, 세계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모래언덕으로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러시아에서 발트3국을 지나 폴란드쪽으로 향한 바로 이 모래언덕에서 러시아의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가 시작됩니다. 바다를 지나 강을 거슬러 오르면 독일풍의 한 성당과 마주칩니다. 이 성당에 근대 서양 철학을 확립한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묘가 있습니다. 칸트는 과거 독일 영토로 쾨니히스베르크로 불렸던 이곳을 평생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터뷰> 이바노비치(관광객/모스크바 주민):"과거 칸트 같은 철학자가 있었기에 현대 학문이 완성된 거죠." 2차세계대전 전에는 쾨니히스베르크였던 이 도시는 중세 독일풍의 성과 운하가 어우러져 북유럽에서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2차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봄, 히틀러는 베를린 사수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쾨니히스베르크의 총력 방어를 명령합니다.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10만 소련군과 이곳을 방어하는 5만의 독일군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대격전을 벌입니다. 당시 쾨니히스베르크의 5 요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병사들이 숨진 최대 격전지였습니다. 이 요새를 빼앗고 도시를 점령한 러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베를린까지 진격합니다. <인터뷰> 폴리나(칼리닌그라드 주민):"칼리닌그라드가 점령되면서 2차대전은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 후 모든 것이 파괴돼 잿더미만 남았고, 독일인들이 모두 쫓겨난 자리를 본토에서 이주한 러시아인들이 채웠습니다. 소련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소련의 사회체제가 그대로 이식됐습니다. <인터뷰> 세르게이(칼리닌그라드 주민):"내가 어렸을 때 이 도시는 온통 폐허뿐이었고 시내 중앙에 몇 개의 커다란 건물이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칼리닌그라드는 소련 발틱함대의 기지로 러시아인들조차 통행이 쉽지 않은 감춰진 군사도시였습니다. 20년 전 소 연방 해체 뒤 유럽의 섬처럼 고립된 칼리닌그라드 역시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는 군사 전략 요충지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나탈리아(러 사회정책연구소 지역프로그램 국장):"칼리닌그라드 지역은 해군이 밀집한 전략 기지였기 때문에 소련 시대에서 시장 사회로 이행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개방 이후 지역 경제 사정은 오히려 나빠져 러시아에서 가장 경제 수준이 떨어지는 지역으로까지 몰락했습니다. 반면 유럽과 가까운 덕택에 각종 밀수가 성행하고 퇴폐적인 문화가 유입돼 마약과 AIDS 감염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모스크바 근교 출신의 10대 간호병으로 칼리닌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던 야나 할머니, 전쟁 후 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60여 년간 겨우겨우 살아왔지만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놓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야나(칼리닌그라드 전투 참전 용사):"생존은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쉽게 용기를 잃거나 낙담하지 않았어요." 희망을 꿈꾸던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이 열린 것은 지난 2000년대입니다. 이 일대가 자유무역지대가 지정된 뒤 외국의 각종 공산품이 들어와 이곳 공장에서 재조립되고 관세 없이 러시아 본토에 운송됐습니다. <인터뷰> 나탈리아(러 사회정책연구소 지역프로그램 국장):"러시아로 들어오는 자동차와 각종 가구, 식품 등의 재가공 산업이 형성됐습니다. 기존의 소련 사회에서는 없던 것이었죠." 가공 무역이 활기를 띄면서 러시아 여타 지역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2008년 경제 위기 때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회복세가 빨라 지난 2년간 러시아 평균 경제성장률 2%보다 훨씬 높은 17%를 기록했습니다. 칼리닌그라드시의 중심가 승리광장은 언제나 활기로 넘쳐납니다. 이곳 칼리닌그라드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과거의 어두운 경험을 교훈 삼아 내일에 대한 우려보다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과 6년 전까지만 해도 레닌 동상을 중심으로 몇 채의 옛 소련의 관공서 건물만 썰렁하게 자리했던 광장 주위가 온통 현대식 건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인터뷰> 안젤라(칼리닌그라드 주민):"시내 중심이 많이 변했어요. 빌딩들이 새로 세워졌고, 무역과 쇼핑센터가 늘어 도시가 한결 살기 좋아졌어요." 도시 곳곳에 조성되는 주택단지는 유럽 어느 명품 도시 못지않게 아름답고 세련되게 꾸며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올가(칼리닌그라드 주민):"과거에 비해 훨씬 좋아졌어요. 새 건물과 새 길이 들어섰잖아요." 소련 연방 해체 후 20년 동안 러시아 어느 곳보다 가장 많은 변화를 거친 칼리닌그라드, 유럽의 전통 속에서 러시아의 잠재력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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