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남북 경협 개척자 ‘정주영’

입력 2011.03.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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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올 가을에는 모두 금강산에 가 볼 수가 있습니다.”



<녹취>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말 본받고 싶습니다."



<인터뷰> "남북화합에 있어서 많은 공로를 세우신 것 같아서 제일 많이 생각이 납니다."



<녹취> 조선중앙TV(지난 19일) : "김정일 동지께서는 구두친서에서 정주영 선생은 민족화해와 협력의 길을 개척하고 북남관계 발전과 조국통일 성업을 위해 참으로 큰일을 하셨다고 하시면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0주기를 맞아 추모행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이런 신념으로 기업을 일궈왔다고 밝혔는데요.



남북 경제협력 분야에서도,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연 개척자였습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입니다.



실향민인 정 전 회장은 호를 ‘아산’이라 지을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녹취> 故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 "고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더욱이 이를 테면 고향산천을 북에 놓고 온 사람이야 더 간절할 테죠. (빨리 가셨으면...) 꼭 가게 될 걸로 생각합니다."



그가 다시 고향땅을 밟는 데는 30년이 더 걸렸습니다.



1989년, 정 전 회장은 당시 노동당비서였던 허담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제3국을 경유하긴 했지만, 민간인으로는 휴전 이후 첫 방북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금강산 관광사업의 기초가 된 ‘금강산 남북 공동 개발 의정서’를 체결했습니다.



그로부터 9년 후, 1998년 6월 50대의 대형트럭이 새벽의 여명을 뚫고 정주영 회장의 서산농장을 출발했습니다.



500마리의 소를 실은 트럭은 곧장 판문점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그에게 ‘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소 한 마리를 판 돈 70원을 훔쳐 집을 나왔습니다.



<녹취> 故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 “이제 그 한 마리의 소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려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문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 전 회장은 민간인 신분으로는 처음,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녹취> “우리 고향 쪽으로 가니까 반갑습니다.”



긴장과 대결의 상징이던 판문점이 교류와 협력의 장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녹취> 송호경(전 北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 “정 선생님, 열렬히 환영합니다.”



7박 8일의 일정 동안 그는 북측과  금강산 개발과 관광 교류사업을 비롯한 경제협력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1998년 10월 그는 소떼 501마리와 함께 다시 북으로 향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첫 만남은 이때 이뤄졌습니다.



<녹취> 故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 "(김 위원장이)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 찾아와서 긴 시간 얘기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 최종 합의했습니다.



<녹취> 故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 "오늘 첫 출항하는 금강산 관광선 남북이 서로 힘을 합쳐 추진한 남북교류사업의 큰 결실이라는 점에서."



두 번째 소떼 방북이 이뤄지고 한 달 후, 실향민을 비롯한 남측의 국민들이 반세기 만에 북녘 땅을 밟게 됐습니다.



<녹취> 첫 금강산 관광객(1998년) : “고향 가는 느낌이 꼭 들지는 않아도 고향은 고향 아닌가. 그래서 지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녹취> 첫 금강산 관광객(1998년) : "좋았죠, 뭐. 기다리던 그 길을 튼 것 같아서 너무 고맙고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민간 차원의 남북 경제교류 협력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대북사업 개척에 여생을 바치기로 한 정 전 회장은 지난 2000년까지 북한을 여덟 차례 방문했고, 김정일 위원장과 세 번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성공단 개발사업도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화해 분위기 속에 남북의 경제협력은 더욱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3월 21일.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8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북한은 분단 사상 처음으로 그의 장례식에 조문단을 보냈습니다.



<인터뷰> 송호경(전 北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 “북남 사이의 화해와 협력, 민족 대단결과 통일 애국사업에 기여한 정주영 선생의 사망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정 전 회장이 기반을 닦아놓은 대북사업은 그가 타계한 이후에도 계속 진행됐습니다.



지난 2008년 8월까지 금강산에는 195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갔고, 지난 2007년 시작된 개성관광에는 9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갔습니다.



2003년 6월에 첫 삽을 뜬 개성공단은 지난해 9월, 누적생산액이 1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정주영 회장이 남긴 유산은 결국 남북관계가 정치적으로 어렵다고 하더라도 특히 민간 부분에서의 교류협력은 지속돼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발전들을 통해서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협력이 실질적으로 통일을 우리가 이루는 데 있어서도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의 크나큰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통일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로 보나 문화로 보나 우리 민족보다 훌륭한 민족은 없습니다.



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우리의 노력으로 머지않은 시일 안에 꼭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기업인들이 세계를 누비면서 앞장섰듯이 통일한국의 미래를 이끄는 일에도 기업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과 천안함 연평도 사건으로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경제협력은 2년 넘게 중단된 상태입니다.



북녘의 고향을 그리워하던 실향민이자,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기업인이었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



통일에 대한 그의 염원은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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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한반도] 남북 경협 개척자 ‘정주영’
    • 입력 2011-03-26 10:00:46
    남북의 창
<녹취> “올 가을에는 모두 금강산에 가 볼 수가 있습니다.”

<녹취>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말 본받고 싶습니다."

<인터뷰> "남북화합에 있어서 많은 공로를 세우신 것 같아서 제일 많이 생각이 납니다."

<녹취> 조선중앙TV(지난 19일) : "김정일 동지께서는 구두친서에서 정주영 선생은 민족화해와 협력의 길을 개척하고 북남관계 발전과 조국통일 성업을 위해 참으로 큰일을 하셨다고 하시면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0주기를 맞아 추모행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이런 신념으로 기업을 일궈왔다고 밝혔는데요.

남북 경제협력 분야에서도,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연 개척자였습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입니다.

실향민인 정 전 회장은 호를 ‘아산’이라 지을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녹취> 故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 "고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더욱이 이를 테면 고향산천을 북에 놓고 온 사람이야 더 간절할 테죠. (빨리 가셨으면...) 꼭 가게 될 걸로 생각합니다."

그가 다시 고향땅을 밟는 데는 30년이 더 걸렸습니다.

1989년, 정 전 회장은 당시 노동당비서였던 허담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제3국을 경유하긴 했지만, 민간인으로는 휴전 이후 첫 방북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금강산 관광사업의 기초가 된 ‘금강산 남북 공동 개발 의정서’를 체결했습니다.

그로부터 9년 후, 1998년 6월 50대의 대형트럭이 새벽의 여명을 뚫고 정주영 회장의 서산농장을 출발했습니다.

500마리의 소를 실은 트럭은 곧장 판문점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그에게 ‘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소 한 마리를 판 돈 70원을 훔쳐 집을 나왔습니다.

<녹취> 故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 “이제 그 한 마리의 소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려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문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 전 회장은 민간인 신분으로는 처음,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녹취> “우리 고향 쪽으로 가니까 반갑습니다.”

긴장과 대결의 상징이던 판문점이 교류와 협력의 장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녹취> 송호경(전 北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 “정 선생님, 열렬히 환영합니다.”

7박 8일의 일정 동안 그는 북측과  금강산 개발과 관광 교류사업을 비롯한 경제협력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1998년 10월 그는 소떼 501마리와 함께 다시 북으로 향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첫 만남은 이때 이뤄졌습니다.

<녹취> 故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 "(김 위원장이)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 찾아와서 긴 시간 얘기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 최종 합의했습니다.

<녹취> 故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 "오늘 첫 출항하는 금강산 관광선 남북이 서로 힘을 합쳐 추진한 남북교류사업의 큰 결실이라는 점에서."

두 번째 소떼 방북이 이뤄지고 한 달 후, 실향민을 비롯한 남측의 국민들이 반세기 만에 북녘 땅을 밟게 됐습니다.

<녹취> 첫 금강산 관광객(1998년) : “고향 가는 느낌이 꼭 들지는 않아도 고향은 고향 아닌가. 그래서 지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녹취> 첫 금강산 관광객(1998년) : "좋았죠, 뭐. 기다리던 그 길을 튼 것 같아서 너무 고맙고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민간 차원의 남북 경제교류 협력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대북사업 개척에 여생을 바치기로 한 정 전 회장은 지난 2000년까지 북한을 여덟 차례 방문했고, 김정일 위원장과 세 번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성공단 개발사업도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화해 분위기 속에 남북의 경제협력은 더욱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3월 21일.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8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북한은 분단 사상 처음으로 그의 장례식에 조문단을 보냈습니다.

<인터뷰> 송호경(전 北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 “북남 사이의 화해와 협력, 민족 대단결과 통일 애국사업에 기여한 정주영 선생의 사망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정 전 회장이 기반을 닦아놓은 대북사업은 그가 타계한 이후에도 계속 진행됐습니다.

지난 2008년 8월까지 금강산에는 195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갔고, 지난 2007년 시작된 개성관광에는 9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갔습니다.

2003년 6월에 첫 삽을 뜬 개성공단은 지난해 9월, 누적생산액이 1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정주영 회장이 남긴 유산은 결국 남북관계가 정치적으로 어렵다고 하더라도 특히 민간 부분에서의 교류협력은 지속돼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발전들을 통해서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협력이 실질적으로 통일을 우리가 이루는 데 있어서도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의 크나큰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통일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로 보나 문화로 보나 우리 민족보다 훌륭한 민족은 없습니다.

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우리의 노력으로 머지않은 시일 안에 꼭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기업인들이 세계를 누비면서 앞장섰듯이 통일한국의 미래를 이끄는 일에도 기업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과 천안함 연평도 사건으로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경제협력은 2년 넘게 중단된 상태입니다.

북녘의 고향을 그리워하던 실향민이자,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기업인이었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

통일에 대한 그의 염원은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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