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위원장 ‘마지막 40개월’
입력 2011.12.24 (10:02)
수정 2011.12.2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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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지난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 위원장은 수술을 받고 곧바로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5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는데요.
그래서 김 위원장이 며칠만 공개활동을 안 해도 건강이상설이 불거지곤 했습니다.
결국 김 위원장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정확하게 40개월만에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마지막 40개월을 남북의창에서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은 군부대를 현지지도했다.
김 위원장은 구석구석을 돌며 정력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은 이날 이후 북한 매체에서 사라졌다.
김 위원장이 마지막으로 현지지도를 한 지 한 달 가량 9월 9일.
정권 수립 6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이 열렸다.
집권 이래 열병식에 한차례도 빠지지 않던 김 위원장은 주석단에 없었다.
곧바로 중병설이 불거졌다.
김 위원장이 쓰러진 건 2008년 8월 14일로 확인됐다.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북한 당국은 프랑스에서 의사를 데려와 수술을 했다.
<녹취> 프랑수아 자비에 루(신경외과 전문의) : "다른 의사들에게 의학적 조언을 하며 그를 살려내는 것이 내 임무였고 그의 생명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이 공개석상에 다시 나타난 건 석달 가량이 지나서였다.
북한 매체는 평양 근교의 축구장에 나타난 김 위원장의 사진 3장을 공개했다. 얼굴에는 붓기가 빠지지 않았고, 왼손은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신발도 굽이 있는 구두가 아니라 편안한 컴포트화로 바뀌었다.
김 위원장이 같은 달 말, 신의주 지역 공장을 시찰했다.
100일만의 지방 현지지도였다.
2009년 들어 김 위원장의 건강은 회복과 악화를 반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5월, 그는 지병인 만성신부전증으로 집중 투석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수술 직후 호전되는 듯 보였던 마비도 악화됐다.
다리를 절뚝거렸으며, 머리숱도 눈에 띄게 줄어든 모습이었다.
또 오른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뚜렷이 회복된 건 뇌졸중 발병 1년이 지나서였다.
2009년 8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난 뒤 “건강했고, 통치권을 확실히 행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부터는 표면적으로 건강이 더 좋아진 것으로 보였다.
걸음걸이도 조금 자연스러웠고, 왼손의 마비도 대부분 풀린 것 같았다.
올 들어서는 바닥이 편평한 컴포트화 대신 굽이 있는 구두를 신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난 건강은 좋아졌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김 위원장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당정군의 최고책임자이자, 절대 권력자인 그의 공백이 스스로도 두려웠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과제는 자신의 사후 북한의 체제보장이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한 민심이반과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라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초조함과 불안이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초 김 위원장은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고, 북한 엘리트들에게 이를 알렸다.
이때부터 후계 구축 작업은 초고속으로 이뤄졌다.
2012년까지 경제 강국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현지지도 횟수도 늘렸다.
2007년 87차례, 2008년 97차례였던 현지지도 횟수는 2009년에 159회로 늘어났다.
북한은 지난 해 9월 권력구조를 개편할 당대표자회를 열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뇌졸중 이후 가장 공을 들인 행사였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김정은에게 권력을 물려줄 체제 정비와 엘리트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주석단에 등장한 김 위원장은 만면의 웃음을 가득 띈 채 박수를 그만 치라는 여유까지 보였다.
가장 중요한 과제 풀어낼 기반을 닦은데 대한 안도감이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부터는 대외 관계 개선에도 혼신의 힘을 쏟았다.
5월에는 4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데 이어 8월에 또 다시 중국 동북3성을 찾았다.
올해 5월에도 중국 남부 지방까지 돌아보는 장거리 여정을 소화했다.
또 8월에는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해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중국을 거쳐 돌아왔다.
3대 세습에 대한 지지와 경제지원이라는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외교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난제를 떠안은 김 위원장에게 극심한 스트레스가 뒤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9년 2월, 회령의 담배공장을 방문해 담배를 피웠다.
또 2009년 4월 행사 때는 김 위원장 앞에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2001년을 전후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 것이다.
독한 술도 마시기 시작했다.
2009년 1월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식사를 하며 독한 술을 연거푸 마셨다.
김 위원장은 뇌졸중 발병 이후 숨질 때까지 극심한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이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서는 음식 절제도 하지 않아 부쩍 살이 쪘다.
<인터뷰> 임은철(동서한방병원 원장) : "인민복이 맞지 않을 정도로 살이 쪘다는 것. 살이 쪘다는 게 근육량이 늘어난게
아니라 안에 체지방량이 늘은 거거든요. 체지방량이 늘었다는 것은 동맥경화나 혹은, 안에 고지혈증. 혈관 속에 기름도 많이 흘러갈 확률도 높고. 그러므로 인해서 심장에 부담을 줄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높아졌겠죠."
김 위원장의 정력적인 현지지도 행보는 숨지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2010년 161차례, 올해도 숨지기 전까지 145회나 됐다.
이틀에 한번 꼴로 현지지도를 하면서 북한 전역을 돌았다.
마지막 공식활동도 광복거리 슈퍼마켓과 하나음악정보센터 현지지도였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 "그 나름대로 내년도 강성대국의 문을 연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욕적으로 정력적으로 지시를 하고 현지를 챙긴 것은 그의 건강으로부터는 무리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뇌졸중 후유증과 스트레스, 술과 담배, 과로가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지난 해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
당대표자회를 통해 공식등장한 김정은이 일반 주민과 외신들에 최초로 공개된 자리였다. 주석단에 오른 김 위원장은 오랫동안 말없이 아들을 근심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20대 아들에게 맡겨진 북한의 앞날이 그 역시도 크게 불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뇌졸중에서 깨어나 숨질 때까지 이런 마음이 내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아들에게 권력을 다 물려주지 못한 채 뇌졸중 발병 40개월 만에 눈을 감았다.
지난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 위원장은 수술을 받고 곧바로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5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는데요.
그래서 김 위원장이 며칠만 공개활동을 안 해도 건강이상설이 불거지곤 했습니다.
결국 김 위원장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정확하게 40개월만에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마지막 40개월을 남북의창에서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은 군부대를 현지지도했다.
김 위원장은 구석구석을 돌며 정력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은 이날 이후 북한 매체에서 사라졌다.
김 위원장이 마지막으로 현지지도를 한 지 한 달 가량 9월 9일.
정권 수립 6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이 열렸다.
집권 이래 열병식에 한차례도 빠지지 않던 김 위원장은 주석단에 없었다.
곧바로 중병설이 불거졌다.
김 위원장이 쓰러진 건 2008년 8월 14일로 확인됐다.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북한 당국은 프랑스에서 의사를 데려와 수술을 했다.
<녹취> 프랑수아 자비에 루(신경외과 전문의) : "다른 의사들에게 의학적 조언을 하며 그를 살려내는 것이 내 임무였고 그의 생명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이 공개석상에 다시 나타난 건 석달 가량이 지나서였다.
북한 매체는 평양 근교의 축구장에 나타난 김 위원장의 사진 3장을 공개했다. 얼굴에는 붓기가 빠지지 않았고, 왼손은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신발도 굽이 있는 구두가 아니라 편안한 컴포트화로 바뀌었다.
김 위원장이 같은 달 말, 신의주 지역 공장을 시찰했다.
100일만의 지방 현지지도였다.
2009년 들어 김 위원장의 건강은 회복과 악화를 반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5월, 그는 지병인 만성신부전증으로 집중 투석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수술 직후 호전되는 듯 보였던 마비도 악화됐다.
다리를 절뚝거렸으며, 머리숱도 눈에 띄게 줄어든 모습이었다.
또 오른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뚜렷이 회복된 건 뇌졸중 발병 1년이 지나서였다.
2009년 8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난 뒤 “건강했고, 통치권을 확실히 행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부터는 표면적으로 건강이 더 좋아진 것으로 보였다.
걸음걸이도 조금 자연스러웠고, 왼손의 마비도 대부분 풀린 것 같았다.
올 들어서는 바닥이 편평한 컴포트화 대신 굽이 있는 구두를 신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난 건강은 좋아졌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김 위원장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당정군의 최고책임자이자, 절대 권력자인 그의 공백이 스스로도 두려웠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과제는 자신의 사후 북한의 체제보장이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한 민심이반과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라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초조함과 불안이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초 김 위원장은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고, 북한 엘리트들에게 이를 알렸다.
이때부터 후계 구축 작업은 초고속으로 이뤄졌다.
2012년까지 경제 강국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현지지도 횟수도 늘렸다.
2007년 87차례, 2008년 97차례였던 현지지도 횟수는 2009년에 159회로 늘어났다.
북한은 지난 해 9월 권력구조를 개편할 당대표자회를 열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뇌졸중 이후 가장 공을 들인 행사였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김정은에게 권력을 물려줄 체제 정비와 엘리트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주석단에 등장한 김 위원장은 만면의 웃음을 가득 띈 채 박수를 그만 치라는 여유까지 보였다.
가장 중요한 과제 풀어낼 기반을 닦은데 대한 안도감이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부터는 대외 관계 개선에도 혼신의 힘을 쏟았다.
5월에는 4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데 이어 8월에 또 다시 중국 동북3성을 찾았다.
올해 5월에도 중국 남부 지방까지 돌아보는 장거리 여정을 소화했다.
또 8월에는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해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중국을 거쳐 돌아왔다.
3대 세습에 대한 지지와 경제지원이라는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외교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난제를 떠안은 김 위원장에게 극심한 스트레스가 뒤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9년 2월, 회령의 담배공장을 방문해 담배를 피웠다.
또 2009년 4월 행사 때는 김 위원장 앞에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2001년을 전후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 것이다.
독한 술도 마시기 시작했다.
2009년 1월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식사를 하며 독한 술을 연거푸 마셨다.
김 위원장은 뇌졸중 발병 이후 숨질 때까지 극심한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이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서는 음식 절제도 하지 않아 부쩍 살이 쪘다.
<인터뷰> 임은철(동서한방병원 원장) : "인민복이 맞지 않을 정도로 살이 쪘다는 것. 살이 쪘다는 게 근육량이 늘어난게
아니라 안에 체지방량이 늘은 거거든요. 체지방량이 늘었다는 것은 동맥경화나 혹은, 안에 고지혈증. 혈관 속에 기름도 많이 흘러갈 확률도 높고. 그러므로 인해서 심장에 부담을 줄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높아졌겠죠."
김 위원장의 정력적인 현지지도 행보는 숨지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2010년 161차례, 올해도 숨지기 전까지 145회나 됐다.
이틀에 한번 꼴로 현지지도를 하면서 북한 전역을 돌았다.
마지막 공식활동도 광복거리 슈퍼마켓과 하나음악정보센터 현지지도였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 "그 나름대로 내년도 강성대국의 문을 연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욕적으로 정력적으로 지시를 하고 현지를 챙긴 것은 그의 건강으로부터는 무리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뇌졸중 후유증과 스트레스, 술과 담배, 과로가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지난 해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
당대표자회를 통해 공식등장한 김정은이 일반 주민과 외신들에 최초로 공개된 자리였다. 주석단에 오른 김 위원장은 오랫동안 말없이 아들을 근심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20대 아들에게 맡겨진 북한의 앞날이 그 역시도 크게 불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뇌졸중에서 깨어나 숨질 때까지 이런 마음이 내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아들에게 권력을 다 물려주지 못한 채 뇌졸중 발병 40개월 만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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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위원장 ‘마지막 40개월’
-
- 입력 2011-12-24 10:02:22
- 수정2011-12-26 09:49:37
<앵커 멘트>
지난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 위원장은 수술을 받고 곧바로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5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는데요.
그래서 김 위원장이 며칠만 공개활동을 안 해도 건강이상설이 불거지곤 했습니다.
결국 김 위원장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정확하게 40개월만에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마지막 40개월을 남북의창에서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은 군부대를 현지지도했다.
김 위원장은 구석구석을 돌며 정력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은 이날 이후 북한 매체에서 사라졌다.
김 위원장이 마지막으로 현지지도를 한 지 한 달 가량 9월 9일.
정권 수립 6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이 열렸다.
집권 이래 열병식에 한차례도 빠지지 않던 김 위원장은 주석단에 없었다.
곧바로 중병설이 불거졌다.
김 위원장이 쓰러진 건 2008년 8월 14일로 확인됐다.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북한 당국은 프랑스에서 의사를 데려와 수술을 했다.
<녹취> 프랑수아 자비에 루(신경외과 전문의) : "다른 의사들에게 의학적 조언을 하며 그를 살려내는 것이 내 임무였고 그의 생명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이 공개석상에 다시 나타난 건 석달 가량이 지나서였다.
북한 매체는 평양 근교의 축구장에 나타난 김 위원장의 사진 3장을 공개했다. 얼굴에는 붓기가 빠지지 않았고, 왼손은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신발도 굽이 있는 구두가 아니라 편안한 컴포트화로 바뀌었다.
김 위원장이 같은 달 말, 신의주 지역 공장을 시찰했다.
100일만의 지방 현지지도였다.
2009년 들어 김 위원장의 건강은 회복과 악화를 반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5월, 그는 지병인 만성신부전증으로 집중 투석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수술 직후 호전되는 듯 보였던 마비도 악화됐다.
다리를 절뚝거렸으며, 머리숱도 눈에 띄게 줄어든 모습이었다.
또 오른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뚜렷이 회복된 건 뇌졸중 발병 1년이 지나서였다.
2009년 8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난 뒤 “건강했고, 통치권을 확실히 행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부터는 표면적으로 건강이 더 좋아진 것으로 보였다.
걸음걸이도 조금 자연스러웠고, 왼손의 마비도 대부분 풀린 것 같았다.
올 들어서는 바닥이 편평한 컴포트화 대신 굽이 있는 구두를 신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난 건강은 좋아졌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김 위원장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당정군의 최고책임자이자, 절대 권력자인 그의 공백이 스스로도 두려웠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과제는 자신의 사후 북한의 체제보장이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한 민심이반과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라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초조함과 불안이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초 김 위원장은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고, 북한 엘리트들에게 이를 알렸다.
이때부터 후계 구축 작업은 초고속으로 이뤄졌다.
2012년까지 경제 강국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현지지도 횟수도 늘렸다.
2007년 87차례, 2008년 97차례였던 현지지도 횟수는 2009년에 159회로 늘어났다.
북한은 지난 해 9월 권력구조를 개편할 당대표자회를 열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뇌졸중 이후 가장 공을 들인 행사였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김정은에게 권력을 물려줄 체제 정비와 엘리트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주석단에 등장한 김 위원장은 만면의 웃음을 가득 띈 채 박수를 그만 치라는 여유까지 보였다.
가장 중요한 과제 풀어낼 기반을 닦은데 대한 안도감이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부터는 대외 관계 개선에도 혼신의 힘을 쏟았다.
5월에는 4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데 이어 8월에 또 다시 중국 동북3성을 찾았다.
올해 5월에도 중국 남부 지방까지 돌아보는 장거리 여정을 소화했다.
또 8월에는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해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중국을 거쳐 돌아왔다.
3대 세습에 대한 지지와 경제지원이라는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외교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난제를 떠안은 김 위원장에게 극심한 스트레스가 뒤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9년 2월, 회령의 담배공장을 방문해 담배를 피웠다.
또 2009년 4월 행사 때는 김 위원장 앞에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2001년을 전후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 것이다.
독한 술도 마시기 시작했다.
2009년 1월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식사를 하며 독한 술을 연거푸 마셨다.
김 위원장은 뇌졸중 발병 이후 숨질 때까지 극심한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이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서는 음식 절제도 하지 않아 부쩍 살이 쪘다.
<인터뷰> 임은철(동서한방병원 원장) : "인민복이 맞지 않을 정도로 살이 쪘다는 것. 살이 쪘다는 게 근육량이 늘어난게
아니라 안에 체지방량이 늘은 거거든요. 체지방량이 늘었다는 것은 동맥경화나 혹은, 안에 고지혈증. 혈관 속에 기름도 많이 흘러갈 확률도 높고. 그러므로 인해서 심장에 부담을 줄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높아졌겠죠."
김 위원장의 정력적인 현지지도 행보는 숨지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2010년 161차례, 올해도 숨지기 전까지 145회나 됐다.
이틀에 한번 꼴로 현지지도를 하면서 북한 전역을 돌았다.
마지막 공식활동도 광복거리 슈퍼마켓과 하나음악정보센터 현지지도였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 "그 나름대로 내년도 강성대국의 문을 연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욕적으로 정력적으로 지시를 하고 현지를 챙긴 것은 그의 건강으로부터는 무리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뇌졸중 후유증과 스트레스, 술과 담배, 과로가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지난 해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
당대표자회를 통해 공식등장한 김정은이 일반 주민과 외신들에 최초로 공개된 자리였다. 주석단에 오른 김 위원장은 오랫동안 말없이 아들을 근심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20대 아들에게 맡겨진 북한의 앞날이 그 역시도 크게 불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뇌졸중에서 깨어나 숨질 때까지 이런 마음이 내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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