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도피사범들 “잡을테면 잡아 봐”

입력 2012.10.08 (08:53) 수정 2012.10.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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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납치범 목소리 (지난해 11월):"이 전화가 마지막 전화가 될 겁니다. (도대체 우리 아들이 어디에 있냐고요?)"

휴가차 필리핀 배낭여행을 간 아들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두 달 만에 걸려온 전화.

<녹취> 납치범 목소리 (지난해 11월):"미안하지만, 죽었습니다. (네?) 죽었어요. (왜 죽어요?) 뼈라도 찾아가세요. 뼈. (아저씨, 나 이 전화 받고 지금 쓰러질 것 같은데...)"

급한 마음에 천만 원을 보냈지만, 범인들은 돈만 빼간 채 행적을 감췄습니다.

국제형사경찰기구, 인터폴이 최상급 적색수배자로 지목한 용의자는 3명.

이들은 현지에서 십여 건의 납치.강도 사건을 주도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일당 가운데 지난해 말 붙잡힌 김성곤은 불과 열흘 만에 필리핀 현지 유치장에서 도망쳤고, 다시 지난 5월 체포돼 마닐라 남쪽 세부 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김 씨를 한국으로 데려와 아들의 생사라도 알고 싶지만, 관계 당국은 기다리라는 말 뿐입니다.

<인터뷰> 홍봉의(홍석동 씨 아버지):"진짜 피 토할 일 아니에요. 대사.영사.외교부 전화 걸면 한다는 소리가 우리는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잡는 게 아니고 필리핀 경찰이 잡는 거다."

<인터뷰> 고금혜(홍석동 씨 어머니):"솔직히 내가 (아들 주민세로) 돈 6천 원 없어서 못 내겠습니까? 그렇지만 나 못내. 그래 자기 주민이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맨날 이것 안 낸다고 독촉장만 날려 보내면서. 세금은 왜 걷어?"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해외로 달아난 도피사범들.

하지만, 이들을 잡기도 어렵고, 잡는다 해도 국내로 데려와 죗값을 묻기 역시 어렵습니다.

이른바 '해외 도피사범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필리핀 현지 취재를 통해 범죄인 송환 시스템의 문제점을 취재했습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한 고급 쇼핑몰.

지난 2006년, 필리핀으로 도주한 박 모씨 부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박 씨는 국내에서 바닷모래 채취 사업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투자자들로부터 30억여 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인터폴 적색수배자인 박 씨, 한 교민을 만나자 유력인사들을 거론하며 인맥을 과시합니다.

<녹취> 박 모 씨 부부 (음성변조):"회사의 우리 투자자들이 000(언론사 회장), 000(대기업 회장) 이런 사람들이라고." (현 회장?) "그럼요." "친해요. 전부 다. 한국에서 회장님들이 기밀로 해서 들어오잖아요. 왜 들어오겠어요? 만나러 들어오지."

수배 신분이 불안한 듯 이미 신변보호 조치를 해 놨다고 말합니다.

<녹취> 박 모 씨 부부 (음성변조):"뭐가 힘들어요? 한국에 있을 때도 경호원들 있었는데." "지금 집은 방 6개. 옛날에는 10개였어요. 이 일(적색수배) 있고 나서는 일부러 거처를 옮겼다니까."

박 씨가 살고 있다는 고급 주택가를 찾았습니다.

신분증을 맡겨야 할 정도로 경비가 삼엄합니다.

<녹취> "(신분증을 맡기라고요? 왜요?) 기록을 남겨야 해요. 보안상 나중에 안에 있는 사람이 요청하면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중한 철문에 요새를 연상시키는 고급 주택.

인근 주민들로부터 박 씨의 거주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의 운전사는 이를 숨깁니다.

<녹취>"(월세가 20만 페소(한화 5백여만 원)나 돼요?) 네 (박 씨가 여기서 사시나요?) 저는 몰라요. 경비한테 물어보세요."

우리 경찰이 박 씨에 대한 송환을 요청한 게 벌써 1년 전이지만, 그는 거리낌 없이 호화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인터폴이 공조 수사 중인 해외 도피사범은 1052명.

이 중 10%가 넘는 129명이 필리핀 곳곳에 숨어 지냅니다.

향락업소와 카지노가 밀집한 마닐라 북부 앙헬레스.

이 곳에서 만난 국내 폭력조직원 이 모씨.

기소중지자인 이 씨 역시 필리핀은 수사기관까지 부패해 있어 '도피자들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녹취> 기소중지자 이 모 씨 (음성변조):"현지 경찰들은 쉽게 생각하면 마당쇠로 생각하면 돼. 돈 좀 있고 머리 좀 트인 놈이면 필요하면 가져다 쓰는,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고, 여기서는. 경찰의 영향력을 못 느끼고 살아."

설사 구금시설에 들어가더라도 한국으로의 송환 걱정은 없다고 말합니다.

<녹취> 기소중지자 이 모 씨 (음성변조):"돈 주면 다 해결되지. 큰돈 안 들어가고. 사람 죽여도 돈 주면 다 해결되지. 감방 들어가도 돈 주고 나와 버리고. 공공연한 탈옥이지. 그냥 문 열고 나오는 거니까."

이런 해외 도피사범을 송환하는 방법은 범죄인 인도 청구와 강제추방 등 두 가지.

하지만 범죄인 인도는 검찰과 법무부, 외교부와 대사관을 거치고, 상대국에서도 다시 비슷한 절차를 밟아야 해 보통 수년씩 걸립니다.

한국과 필리핀 간에는 1996년 조약이 발효됐지만, 우리가 인도를 요청한 27명 가운데 단 한 명도 송환받지 못했습니다.

<녹취> 정순철 (영사/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여기에서는 외교부가 검토를 하고, 다시 법무부에서 검토를 하는, 검토기간이 너무 장기화되다 보니까 우리가 신속하게 해결해야 되는 문제를 빨리 해결 못하는..."

여권 무효화에 따른 강제추방 요청 역시 상대국 정부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지금 제 뒤로 보이는 이민국 교도소에는 한국인 31명이 수감돼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강제추방 대상에 포함되지만, 실제로 송환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멀리서 걸어 나오는 건장한 한 남성.

<녹취>"(어디서 오셨습니까?) 한국에서 왔는데요. KBS에서 왔어요."

지난해 5월, 2백만 명에 달하는 현대캐피탈 고객 정보를 빼낸 혐의로 인터폴 적색수배를 받던 신 모씨입니다.

신 씨는 현대캐피탈 외에 적어도 국내 업체 5곳 이상을 해킹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현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뒤 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취재진을 만났다는 신 씨는 그러나 뜻밖의 말을 꺼냅니다.

<녹취>신 모씨(해킹 사건 용의자/음성변조):"나는 용의선상에 있을 뿐이지 용의자는 아닙니다. (해킹을)했다는 증거도 없어요. 저 사칭하는 사람들 굉장히 많아요. 한국에서는 어차피 해커를 잡기 힘드니까 나한테 다 덮어버리는 거예요. 외국에 있으니까..."

하지만 제 발로 한국에 들어갈 일도, 그렇다고 강제송환될 일도 없다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녹취>신 모씨(해커 사건 용의자/음성변조):"여기에 죄가 있으면 죄(형기)가 다 끝나지 않으면 한국으로 가질 못해요. 국제법상으로 한국으로의 강제 송환이 불가능합니다. 저랑 같이 있는 일본인 같은 경우 14년 동안 있어요. 저는 죽어도 여기서 죽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수사기관은 신 씨를 넘겨받기 위해 강제추방 권한을 가진 필리핀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인터뷰> 망로방(필리핀 이민국 대변인):"불행히도 (강제추방) 절차가 매우 느리고 신속하지 않아요. 물론 신속 처리를 하고 싶지만, 모든 절차를 다 거쳐야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지적은 이해되지만, 그게 현재 필리핀의 시스템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해외 도피사범들이 도피자금 마련을 위해 한국 관광객과 교민을 상대로 강력 범죄를 일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녹취> 필리핀 교민 (음성변조):"만만한 게 한국 사람이니까 그러지. 자기 주변을 괴롭히고 떠나고, 그 사람들이 또 그 주변 사람을... 총기가 있으니까 막말로 한국 같으면 치고 패고 할 것도 원한관계 있으면 사람을 동원해서 총을 쏴버리는 거지."

마닐라의 한 빈민촌.

어렵게 불법 총기 판매업자를 접촉했습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한참 돌더니 어두운 집 안으로 데려갑니다.

바지 안에서 꺼내든 것, 바로 38구경 리볼버 권총입니다.

<녹취> "9천에서 1만 4천 페소(2~30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습니다." (그냥 바로 쏠 수 있나요?) "예." (총알은 몇 발인가요?) "6발입니다."

일련번호가 없어 추적도 되지 않는다고 안심시킵니다.

<녹취> "(총에는 일련번호가 없지요?) 예. 사제 총입니다. (다른 총은 없나요? 45구경 컬리버는 없나요?) 네, 있습니다."

필리핀 내 이런 불법 총기는 최소 백만 정을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보호단체에는 가입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동활('필리핀 112' 회장):"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가입하시고, 각자 정보를 공유하는 단체로 커가는 것 자체가 아마 필리핀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

<녹취> "들어오세요."

필리핀으로 도주한 모래 채취 사기피의자 박 씨에게 속아 23억 원을 날린 최 모 씨.

<녹취> 최 모 씨(사기 피해자/음성변조):"(집에는 얼마 만에 오신 거예요?) 6개월 만에 왔습니다. 투자금을 빚으로 내가 다 떠안아서. 가족들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잖아요. 그래서 (집에) 못 들어오는 거죠."

한때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지금은 월세 50만 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나빠졌습니다.

<인터뷰> 최 모 씨 (사기 피해자/음성변조):"냉장고 고장 난 거예요. 다 비었잖아요. TV도 고장 나고. (아내가) 파출부를 두 군데 뛰고, 한 군데는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하고 있거든요."

마닐라에 있는 박 씨 측과 6년 만에 처음 통화를 한다는 최 씨.

<녹취> (최 씨) "박○○ 씨 통화 가능하나요?" (박 씨 부인) "아니요. 지금 가능하지 않아요." (최 씨) "통화가 왜 가능하지 않죠?" (박 씨 부인) "여기에 안 계시니까요. 저는 잘 모르는 일이에요. 일단 제가 전화를 끊겠습니다. 뚜~!"

<인터뷰> 최 모 씨(사기 피해자/음성변조):"내가 희망을 잃은 대신에, 우리 가족을 고통에 빠뜨린 대신에 박○○은 책임을 져야죠. 저는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사람, 내가 죽어서라도 용서 안 할 겁니다."

느긋한 해외 도피사범... 이에 반해 발만 동동 구르는 우리 사법당국.

그 사이 최 씨와 같은 피해자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갑니다.

<인터뷰> 고금혜(홍석동 씨 어머니):"부모이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려요. 어쨌든 뭔가 확신한 걸 봐야 될 거 아냐. 진짜 죽었다는 시체라도 보던지 뭐를 봐야 포기를 하지, 포기를 하겠어요? 포기는 못해요."

우리가 다른 나라와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은 지 이제 2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죄를 짓고도 해외로 나가면 그만이라는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준오(형사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에서 100만 명의 관광객이 (필리핀에) 가는데 가는 수를 제한한다거나, 아니면 안전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통제를 하게 되면 필리핀 정부에서도 거기게 걸맞는 대응을 하지 않을까."

외국과의 사법 공조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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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 도피사범들 “잡을테면 잡아 봐”
    • 입력 2012-10-08 08:53:35
    • 수정2012-10-08 13:26:22
    취재파일K
<녹취> 납치범 목소리 (지난해 11월):"이 전화가 마지막 전화가 될 겁니다. (도대체 우리 아들이 어디에 있냐고요?)" 휴가차 필리핀 배낭여행을 간 아들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두 달 만에 걸려온 전화. <녹취> 납치범 목소리 (지난해 11월):"미안하지만, 죽었습니다. (네?) 죽었어요. (왜 죽어요?) 뼈라도 찾아가세요. 뼈. (아저씨, 나 이 전화 받고 지금 쓰러질 것 같은데...)" 급한 마음에 천만 원을 보냈지만, 범인들은 돈만 빼간 채 행적을 감췄습니다. 국제형사경찰기구, 인터폴이 최상급 적색수배자로 지목한 용의자는 3명. 이들은 현지에서 십여 건의 납치.강도 사건을 주도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일당 가운데 지난해 말 붙잡힌 김성곤은 불과 열흘 만에 필리핀 현지 유치장에서 도망쳤고, 다시 지난 5월 체포돼 마닐라 남쪽 세부 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김 씨를 한국으로 데려와 아들의 생사라도 알고 싶지만, 관계 당국은 기다리라는 말 뿐입니다. <인터뷰> 홍봉의(홍석동 씨 아버지):"진짜 피 토할 일 아니에요. 대사.영사.외교부 전화 걸면 한다는 소리가 우리는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잡는 게 아니고 필리핀 경찰이 잡는 거다." <인터뷰> 고금혜(홍석동 씨 어머니):"솔직히 내가 (아들 주민세로) 돈 6천 원 없어서 못 내겠습니까? 그렇지만 나 못내. 그래 자기 주민이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맨날 이것 안 낸다고 독촉장만 날려 보내면서. 세금은 왜 걷어?"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해외로 달아난 도피사범들. 하지만, 이들을 잡기도 어렵고, 잡는다 해도 국내로 데려와 죗값을 묻기 역시 어렵습니다. 이른바 '해외 도피사범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필리핀 현지 취재를 통해 범죄인 송환 시스템의 문제점을 취재했습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한 고급 쇼핑몰. 지난 2006년, 필리핀으로 도주한 박 모씨 부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박 씨는 국내에서 바닷모래 채취 사업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투자자들로부터 30억여 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인터폴 적색수배자인 박 씨, 한 교민을 만나자 유력인사들을 거론하며 인맥을 과시합니다. <녹취> 박 모 씨 부부 (음성변조):"회사의 우리 투자자들이 000(언론사 회장), 000(대기업 회장) 이런 사람들이라고." (현 회장?) "그럼요." "친해요. 전부 다. 한국에서 회장님들이 기밀로 해서 들어오잖아요. 왜 들어오겠어요? 만나러 들어오지." 수배 신분이 불안한 듯 이미 신변보호 조치를 해 놨다고 말합니다. <녹취> 박 모 씨 부부 (음성변조):"뭐가 힘들어요? 한국에 있을 때도 경호원들 있었는데." "지금 집은 방 6개. 옛날에는 10개였어요. 이 일(적색수배) 있고 나서는 일부러 거처를 옮겼다니까." 박 씨가 살고 있다는 고급 주택가를 찾았습니다. 신분증을 맡겨야 할 정도로 경비가 삼엄합니다. <녹취> "(신분증을 맡기라고요? 왜요?) 기록을 남겨야 해요. 보안상 나중에 안에 있는 사람이 요청하면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중한 철문에 요새를 연상시키는 고급 주택. 인근 주민들로부터 박 씨의 거주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의 운전사는 이를 숨깁니다. <녹취>"(월세가 20만 페소(한화 5백여만 원)나 돼요?) 네 (박 씨가 여기서 사시나요?) 저는 몰라요. 경비한테 물어보세요." 우리 경찰이 박 씨에 대한 송환을 요청한 게 벌써 1년 전이지만, 그는 거리낌 없이 호화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인터폴이 공조 수사 중인 해외 도피사범은 1052명. 이 중 10%가 넘는 129명이 필리핀 곳곳에 숨어 지냅니다. 향락업소와 카지노가 밀집한 마닐라 북부 앙헬레스. 이 곳에서 만난 국내 폭력조직원 이 모씨. 기소중지자인 이 씨 역시 필리핀은 수사기관까지 부패해 있어 '도피자들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녹취> 기소중지자 이 모 씨 (음성변조):"현지 경찰들은 쉽게 생각하면 마당쇠로 생각하면 돼. 돈 좀 있고 머리 좀 트인 놈이면 필요하면 가져다 쓰는,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고, 여기서는. 경찰의 영향력을 못 느끼고 살아." 설사 구금시설에 들어가더라도 한국으로의 송환 걱정은 없다고 말합니다. <녹취> 기소중지자 이 모 씨 (음성변조):"돈 주면 다 해결되지. 큰돈 안 들어가고. 사람 죽여도 돈 주면 다 해결되지. 감방 들어가도 돈 주고 나와 버리고. 공공연한 탈옥이지. 그냥 문 열고 나오는 거니까." 이런 해외 도피사범을 송환하는 방법은 범죄인 인도 청구와 강제추방 등 두 가지. 하지만 범죄인 인도는 검찰과 법무부, 외교부와 대사관을 거치고, 상대국에서도 다시 비슷한 절차를 밟아야 해 보통 수년씩 걸립니다. 한국과 필리핀 간에는 1996년 조약이 발효됐지만, 우리가 인도를 요청한 27명 가운데 단 한 명도 송환받지 못했습니다. <녹취> 정순철 (영사/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여기에서는 외교부가 검토를 하고, 다시 법무부에서 검토를 하는, 검토기간이 너무 장기화되다 보니까 우리가 신속하게 해결해야 되는 문제를 빨리 해결 못하는..." 여권 무효화에 따른 강제추방 요청 역시 상대국 정부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지금 제 뒤로 보이는 이민국 교도소에는 한국인 31명이 수감돼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강제추방 대상에 포함되지만, 실제로 송환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멀리서 걸어 나오는 건장한 한 남성. <녹취>"(어디서 오셨습니까?) 한국에서 왔는데요. KBS에서 왔어요." 지난해 5월, 2백만 명에 달하는 현대캐피탈 고객 정보를 빼낸 혐의로 인터폴 적색수배를 받던 신 모씨입니다. 신 씨는 현대캐피탈 외에 적어도 국내 업체 5곳 이상을 해킹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현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뒤 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취재진을 만났다는 신 씨는 그러나 뜻밖의 말을 꺼냅니다. <녹취>신 모씨(해킹 사건 용의자/음성변조):"나는 용의선상에 있을 뿐이지 용의자는 아닙니다. (해킹을)했다는 증거도 없어요. 저 사칭하는 사람들 굉장히 많아요. 한국에서는 어차피 해커를 잡기 힘드니까 나한테 다 덮어버리는 거예요. 외국에 있으니까..." 하지만 제 발로 한국에 들어갈 일도, 그렇다고 강제송환될 일도 없다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녹취>신 모씨(해커 사건 용의자/음성변조):"여기에 죄가 있으면 죄(형기)가 다 끝나지 않으면 한국으로 가질 못해요. 국제법상으로 한국으로의 강제 송환이 불가능합니다. 저랑 같이 있는 일본인 같은 경우 14년 동안 있어요. 저는 죽어도 여기서 죽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수사기관은 신 씨를 넘겨받기 위해 강제추방 권한을 가진 필리핀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인터뷰> 망로방(필리핀 이민국 대변인):"불행히도 (강제추방) 절차가 매우 느리고 신속하지 않아요. 물론 신속 처리를 하고 싶지만, 모든 절차를 다 거쳐야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지적은 이해되지만, 그게 현재 필리핀의 시스템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해외 도피사범들이 도피자금 마련을 위해 한국 관광객과 교민을 상대로 강력 범죄를 일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녹취> 필리핀 교민 (음성변조):"만만한 게 한국 사람이니까 그러지. 자기 주변을 괴롭히고 떠나고, 그 사람들이 또 그 주변 사람을... 총기가 있으니까 막말로 한국 같으면 치고 패고 할 것도 원한관계 있으면 사람을 동원해서 총을 쏴버리는 거지." 마닐라의 한 빈민촌. 어렵게 불법 총기 판매업자를 접촉했습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한참 돌더니 어두운 집 안으로 데려갑니다. 바지 안에서 꺼내든 것, 바로 38구경 리볼버 권총입니다. <녹취> "9천에서 1만 4천 페소(2~30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습니다." (그냥 바로 쏠 수 있나요?) "예." (총알은 몇 발인가요?) "6발입니다." 일련번호가 없어 추적도 되지 않는다고 안심시킵니다. <녹취> "(총에는 일련번호가 없지요?) 예. 사제 총입니다. (다른 총은 없나요? 45구경 컬리버는 없나요?) 네, 있습니다." 필리핀 내 이런 불법 총기는 최소 백만 정을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보호단체에는 가입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동활('필리핀 112' 회장):"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가입하시고, 각자 정보를 공유하는 단체로 커가는 것 자체가 아마 필리핀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 <녹취> "들어오세요." 필리핀으로 도주한 모래 채취 사기피의자 박 씨에게 속아 23억 원을 날린 최 모 씨. <녹취> 최 모 씨(사기 피해자/음성변조):"(집에는 얼마 만에 오신 거예요?) 6개월 만에 왔습니다. 투자금을 빚으로 내가 다 떠안아서. 가족들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잖아요. 그래서 (집에) 못 들어오는 거죠." 한때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지금은 월세 50만 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나빠졌습니다. <인터뷰> 최 모 씨 (사기 피해자/음성변조):"냉장고 고장 난 거예요. 다 비었잖아요. TV도 고장 나고. (아내가) 파출부를 두 군데 뛰고, 한 군데는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하고 있거든요." 마닐라에 있는 박 씨 측과 6년 만에 처음 통화를 한다는 최 씨. <녹취> (최 씨) "박○○ 씨 통화 가능하나요?" (박 씨 부인) "아니요. 지금 가능하지 않아요." (최 씨) "통화가 왜 가능하지 않죠?" (박 씨 부인) "여기에 안 계시니까요. 저는 잘 모르는 일이에요. 일단 제가 전화를 끊겠습니다. 뚜~!" <인터뷰> 최 모 씨(사기 피해자/음성변조):"내가 희망을 잃은 대신에, 우리 가족을 고통에 빠뜨린 대신에 박○○은 책임을 져야죠. 저는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사람, 내가 죽어서라도 용서 안 할 겁니다." 느긋한 해외 도피사범... 이에 반해 발만 동동 구르는 우리 사법당국. 그 사이 최 씨와 같은 피해자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갑니다. <인터뷰> 고금혜(홍석동 씨 어머니):"부모이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려요. 어쨌든 뭔가 확신한 걸 봐야 될 거 아냐. 진짜 죽었다는 시체라도 보던지 뭐를 봐야 포기를 하지, 포기를 하겠어요? 포기는 못해요." 우리가 다른 나라와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은 지 이제 2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죄를 짓고도 해외로 나가면 그만이라는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준오(형사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에서 100만 명의 관광객이 (필리핀에) 가는데 가는 수를 제한한다거나, 아니면 안전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통제를 하게 되면 필리핀 정부에서도 거기게 걸맞는 대응을 하지 않을까." 외국과의 사법 공조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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