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양아버지가 원수였다!”

입력 2013.05.11 (08:21) 수정 2013.05.1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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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바람직한 입양 문화를 장려하기 위한 '입양의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한 가정이 한 명을 입양해 새 가정이 된다는 의미로 가정의 달 5월의 11일로 정했답니다.

가슴으로 낳은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찡하고 훈훈해지는데요.

그런데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선 자신을 지금껏 키워준 아버지가 알고 보니 생부의 원수라는 안타까운 사연이 많답니다.

1970~80년대 군사 정부 시절, 기구한 운명이 시작됐다고 하는데요.

좀 짐작이 갑니다! 어떤 사연인지, 이재석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

그 앞에는 아르헨티나 민주주의의 성지와도 같은 '5월 광장'이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이면 광장은 이 어머니들, 아니 이젠 백발이 된 할머니들의 외침으로 가득합니다.

머리에 두른 하얀색 스카프. 70~80년대 군사 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숨졌거나 실종된 자식 이름을 새긴 스카프가 어머니들의 상징입니다.

어머니들은 실종된 자식들을 찾고, 관련자들 처벌이 완료될 때까지 끝낼 수 없는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군사 정권이 물러난 지 올해로 30년이 됩니다.

그동안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나름대로 진행돼 왔지만 아직도 그 상처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들 가운데엔 성인이 되고 나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심란해질 때마다 이 기념 공원을 찾는다는 35살 페레즈 씨.

긴 벽면 모양의 조형물에는 군 당국에 희생된 사람들 중 신원이 확인된 9천 명의 명단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페레즈 씨의 친부모 이름도 여기 있습니다.

<인터뷰> 기셰르모 페레즈 : "제가 태어난 지 3~4일 만에 어머니랑 떨어졌기 때문에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죠. 부모님의 빈자리를 많이 느낍니다."

페레즈 씨는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스물 한 살 때의 어느 날, 인권단체 사람들이 찾아와 보여준 한 장의 흑백 사진.

거기엔 자신과 꼭 닮은 어떤 남성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친아버지일 거라는 인권단체의 설명을 믿을 수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할머니와 친누나라고 소개받은 사람들과 DNA 검사를 해봤습니다.

친 가족 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페레즈 씨의 친부모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1978년 군 당국에 체포됐습니다.

이때 어머니 뱃속에는 페레즈 씨가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아이를 낳았고 이후 친부모는 실종돼 버렸습니다.

<인터뷰> 페레즈 : "사실을 알고 나서 많이 울었어요. 잠을 자려면 신경 안정제를 복용해야 할 정도였죠."

군사 정부는 갓난아기였던 페레즈 씨를 다름 아닌 군 장교에게 입양 보냈습니다.

자기 친부모가 군사 정부 때문에 희생됐는데, 그 정부의 책임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새 아버지가 된 겁니다.

<인터뷰> 페레즈 : "3년 전쯤 양아버지가 친부모 실종에 관여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가 그 일에 책임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세 아이의 엄마인 40살 몰리나 씨.

자신이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예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몰리나 씨도 자기 친부모의 사연을 스무 살 넘어서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1974년 사형 당했고, 어머니도 3년 뒤 실종됐습니다.

보육원에서 생활하던 몰리나 씨는 다섯 살 때 입양됐습니다.

양아버지는 군사 정부를 적극 지지하고 협조했던 건축 기술자였습니다.

<인터뷰> 몰리나 : "만감이 교차했죠. 모든 감정이 뒤섞여 있다고 할까요. 증오의 감정이 들 때도 있었고...많이 힘들었죠."

70~8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가 폭압 통치를 하던 시절, 최대 3만 명이 실종됐거나 살해당한 걸로 추정됩니다.

언론과 인권단체들은 이런 잔인함에 '더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군사 정부는 부모가 숨졌거나 실종돼 홀로 남은 어린 아이들을 군 간부나 관련 기업인에게 입양 보냈습니다.

친부모와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갖도록 만들자는 게 그 목적이었습니다.

<인터뷰> 에스텔라 카롤레테 : "수용소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빼앗고 어머니는 죽였지요. 그 아이도 일종의 전리품 같은 것이었고, 군사 정부는 아이들을 친부모의 이념과 전혀 다르게 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입양돼 흩어진 아이들은 모두 5백여 명.

이 가운데 백여 명은 성인이 되고 나서 뒤늦게나마 친 가족과 상봉했지만, 나머지 4백 명은 아직도 가족이 어디 살고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인권단체들은 이들이 입양된 게 아니라 사실상 '납치'된 거라고 표현합니다.

<인터뷰> 에스텔라 카롤레테 : "이제 우리는 많이 늙었어요. 그러나 아직 손주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도 찾고 싶어 합니다. 결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다."

이제는 민주 기념관으로 모습을 바꾼 이곳, 70년대 당시엔 온갖 고문이 자행돼 악명이 높았던 수용소였습니다.

군사 정부는 아르헨티나 전국 곳곳에 이런 수용소를 6백 개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잡아 가뒀습니다.

"전시장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얼굴들. 이곳에서 또는 다른 수용소에서 고문 받고 학대받다가 결국 실종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행방을 확인하기 전까진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빅토르 바스테라(생존자 할아버지) : "그들은 수용자들을 항상 때렸습니다. 전기 고문도 했지요. 수용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과거 군사 정부의 대통령들이 인권 탄압과 강제 입양 혐의로 줄줄이 수감되는 등, 아르헨티나는 이제 과거사 청산에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교황 프란치스코 1세가 군사 정부에 협조한 과거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최근 뜨거운 논란이 일었던 것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신도 찾지 못한 수많은 실종자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들의 아이들...

여전히 미흡하기만 한 처벌.

'더러운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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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리포트] “양아버지가 원수였다!”
    • 입력 2013-05-11 08:29:30
    • 수정2013-05-11 09:05:55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바람직한 입양 문화를 장려하기 위한 '입양의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한 가정이 한 명을 입양해 새 가정이 된다는 의미로 가정의 달 5월의 11일로 정했답니다.

가슴으로 낳은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찡하고 훈훈해지는데요.

그런데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선 자신을 지금껏 키워준 아버지가 알고 보니 생부의 원수라는 안타까운 사연이 많답니다.

1970~80년대 군사 정부 시절, 기구한 운명이 시작됐다고 하는데요.

좀 짐작이 갑니다! 어떤 사연인지, 이재석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

그 앞에는 아르헨티나 민주주의의 성지와도 같은 '5월 광장'이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이면 광장은 이 어머니들, 아니 이젠 백발이 된 할머니들의 외침으로 가득합니다.

머리에 두른 하얀색 스카프. 70~80년대 군사 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숨졌거나 실종된 자식 이름을 새긴 스카프가 어머니들의 상징입니다.

어머니들은 실종된 자식들을 찾고, 관련자들 처벌이 완료될 때까지 끝낼 수 없는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군사 정권이 물러난 지 올해로 30년이 됩니다.

그동안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나름대로 진행돼 왔지만 아직도 그 상처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들 가운데엔 성인이 되고 나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심란해질 때마다 이 기념 공원을 찾는다는 35살 페레즈 씨.

긴 벽면 모양의 조형물에는 군 당국에 희생된 사람들 중 신원이 확인된 9천 명의 명단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페레즈 씨의 친부모 이름도 여기 있습니다.

<인터뷰> 기셰르모 페레즈 : "제가 태어난 지 3~4일 만에 어머니랑 떨어졌기 때문에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죠. 부모님의 빈자리를 많이 느낍니다."

페레즈 씨는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스물 한 살 때의 어느 날, 인권단체 사람들이 찾아와 보여준 한 장의 흑백 사진.

거기엔 자신과 꼭 닮은 어떤 남성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친아버지일 거라는 인권단체의 설명을 믿을 수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할머니와 친누나라고 소개받은 사람들과 DNA 검사를 해봤습니다.

친 가족 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페레즈 씨의 친부모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1978년 군 당국에 체포됐습니다.

이때 어머니 뱃속에는 페레즈 씨가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아이를 낳았고 이후 친부모는 실종돼 버렸습니다.

<인터뷰> 페레즈 : "사실을 알고 나서 많이 울었어요. 잠을 자려면 신경 안정제를 복용해야 할 정도였죠."

군사 정부는 갓난아기였던 페레즈 씨를 다름 아닌 군 장교에게 입양 보냈습니다.

자기 친부모가 군사 정부 때문에 희생됐는데, 그 정부의 책임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새 아버지가 된 겁니다.

<인터뷰> 페레즈 : "3년 전쯤 양아버지가 친부모 실종에 관여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가 그 일에 책임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세 아이의 엄마인 40살 몰리나 씨.

자신이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예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몰리나 씨도 자기 친부모의 사연을 스무 살 넘어서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1974년 사형 당했고, 어머니도 3년 뒤 실종됐습니다.

보육원에서 생활하던 몰리나 씨는 다섯 살 때 입양됐습니다.

양아버지는 군사 정부를 적극 지지하고 협조했던 건축 기술자였습니다.

<인터뷰> 몰리나 : "만감이 교차했죠. 모든 감정이 뒤섞여 있다고 할까요. 증오의 감정이 들 때도 있었고...많이 힘들었죠."

70~8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가 폭압 통치를 하던 시절, 최대 3만 명이 실종됐거나 살해당한 걸로 추정됩니다.

언론과 인권단체들은 이런 잔인함에 '더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군사 정부는 부모가 숨졌거나 실종돼 홀로 남은 어린 아이들을 군 간부나 관련 기업인에게 입양 보냈습니다.

친부모와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갖도록 만들자는 게 그 목적이었습니다.

<인터뷰> 에스텔라 카롤레테 : "수용소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빼앗고 어머니는 죽였지요. 그 아이도 일종의 전리품 같은 것이었고, 군사 정부는 아이들을 친부모의 이념과 전혀 다르게 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입양돼 흩어진 아이들은 모두 5백여 명.

이 가운데 백여 명은 성인이 되고 나서 뒤늦게나마 친 가족과 상봉했지만, 나머지 4백 명은 아직도 가족이 어디 살고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인권단체들은 이들이 입양된 게 아니라 사실상 '납치'된 거라고 표현합니다.

<인터뷰> 에스텔라 카롤레테 : "이제 우리는 많이 늙었어요. 그러나 아직 손주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도 찾고 싶어 합니다. 결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다."

이제는 민주 기념관으로 모습을 바꾼 이곳, 70년대 당시엔 온갖 고문이 자행돼 악명이 높았던 수용소였습니다.

군사 정부는 아르헨티나 전국 곳곳에 이런 수용소를 6백 개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잡아 가뒀습니다.

"전시장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얼굴들. 이곳에서 또는 다른 수용소에서 고문 받고 학대받다가 결국 실종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행방을 확인하기 전까진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빅토르 바스테라(생존자 할아버지) : "그들은 수용자들을 항상 때렸습니다. 전기 고문도 했지요. 수용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과거 군사 정부의 대통령들이 인권 탄압과 강제 입양 혐의로 줄줄이 수감되는 등, 아르헨티나는 이제 과거사 청산에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교황 프란치스코 1세가 군사 정부에 협조한 과거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최근 뜨거운 논란이 일었던 것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신도 찾지 못한 수많은 실종자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들의 아이들...

여전히 미흡하기만 한 처벌.

'더러운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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