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정치 개입’, 언제까지?

입력 2013.06.14 (22:50) 수정 2013.06.1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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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문 열어! 비켜!"

<녹취> 진성준(당시 민주통합당 선대위 대변인/12월12일 오후 브리핑) : "국가정보원이 불법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면 전모를 밝히고, 책임을 엄중하게 물을 것입니다."

<녹취> 이광석(서울 수서경찰서장) : "통신자료 제공 요청 등 수사를 하고 있으나 현재까지는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녹취> 이진한(서울중앙지방검찰청 차장검사) : "불법적인 지시를 수시로 반복하여 온 것으로 확인되어 공직선거법 위반 및 국가정보원법 위반으로 불구속기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

퇴임한 원장이 또 법정에 서는 치욕을 안게 됐습니다.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한 것입니다.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면 어김없이 조사받고 처벌받는 악순환이 왜 이렇게 반복돼야 하는 것인지 국민은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 그 어두운 역사를 짚어봅니다.

대통령 선거를 이레 앞둔 지난해 12월 11일 밤.

서울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이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바로 그 안에서 국정원 직원 김모 씨가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 활동을 하고 있다며 민주당 관계자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국정원은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의혹을 부인했지만, 민주당의 고발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경찰은, 대선을 이틀 앞두고 김 씨의 혐의를 찾을 수 없다는 중간 수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녹취> 수사 결과 발표 : "다른 PC를 이용해서 올린 부분은 확인이 안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후 계속된 수사에서 김 씨의 대선 관련 인터넷 게시글이 확인됐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의 이런 활동이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란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녹취> 진선미 민주당 의원(3.18) : "원세훈 국정원장 재임기간 중 국정원이 불법적으로 국내정치에 개입하고 여론 조작을 시도하며 사실상 MB 정권의 전위 부대 역할을 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자료가 입수됐습니다."

2009년부터 국정원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이른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선거가 끝나면 결과를 뒤바꿀 수 없기 때문에 국정원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 종북 세력에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지시에 따라 국정원 대북심리전단이 조직적으로 국내 정치 현안에 개입하고 선거 과정에서 댓글을 달며 여론 조작을 시도했다는 겁니다.

경찰에 이어 검찰이 나섰습니다.

원세훈 전 원장을 출국 금지하고 특별수사팀을 꾸려 국정원을 압수 수색하며 수사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검찰은 국정원 옛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활동한 인터넷 사이트 15개에서 정치 현안에 대한 게시글과 댓글 수백 개를 찾아냈습니다.

직원들이 올린 글들과 그 활동에 원 전 원장이 관여했다는 진술과 물증도 확보했습니다.

혐의 적용을 놓고 잡음이 있었지만 검찰은 결국 원 전 원장에게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적용했습니다.

불구속 기소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 나왔습니다.

<녹취> 조해진(새누리당 의원) : "야당이 스스로 고발한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대놓고 수사 개입하고 압력 넣고 수사 지시를 하고 심지어 구속 여부까지 이렇게 하는 것은 이건 도를 넘은 행동입니다."

<녹취> 신경민(민주당 의원) : "검찰이 원 전 원장을 구속하지 못한 이유는 현 정권이 MB 정권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의혹과 평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를 씻기 위해서라도 검찰은 구속 수사에 단호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관철시켜야만 했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집을 찾았습니다.

<녹취> "계신가요? 원장님 안 계신가요?"

오랫동안 집을 비운 듯 신문과 고지서들이 쌓여 있습니다.

<녹취> 관할경찰서 정보과 형사 : "단체로 민원인들이 올까 봐 대비해서 나와있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더라고요. 언제 들어올 지 장담 못하니까."

인터뷰를 신청했더니 변호인 측에선 "원 전 원장이 오히려 직원들에게 선거 개입이나 정치 관여를 금지하도록 지시했었다."는 입장만 전해왔습니다.

국정원도 "정당한 국가심리전 활동을 선거법 위반으로까지 처리하는 데 유감"이라는 반응을 내놨습니다.

원 전 원장은 비록 불구속 상태지만 조만간 법정에 서서 처벌을 기다리게 됐습니다.

만약 재판에서 혐의가 확정된다면 국정원은, 또다시 정보기관이 부당하게 국내 정치에 개입했다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인터뷰> 이석범(대한변협 인권위원/전 국정원 법제관) : "이 정부에 이런 일을 하고 싶진 않다. 국내 정치 개입을 해서 국민 지탄을 받는 정보기관이 되어서는 자기 자식들에게 볼 면목이 없다며 굉장히 마음을 아파하는 그런 모습을 여러 직원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정원의 뿌리는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중앙정보부입니다.

대공업무는 물론 범죄 수사와 정보 업무를 두루 담당하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기관이었습니다.

반정부세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의 수장들은, 물러난 뒤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4대 김형욱 부장은 퇴임 뒤 미국에 망명했다가 실종됐고, 6대 이후락 부장도 김대중 납치사건 등 이른바 공작정치를 주도했습니다.

5공화국에서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꿨지만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속성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희성, 유학성, 장세동, 안무혁, 이현우 부장은 훗날 줄줄이 형사처벌을 받았습니다.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이었습니다.

<인터뷰> 오시영(숭실대 법학과 교수) : "국가 안보라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정보기관인데 국가에 대한 충성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에 대한 충성을 하다 보니까 그 정권에 대한 충성이 오히려 탈법이나 불법을 조장하게 되는"

문민정부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안기부는 1997년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가 북한의 돈을 받았다는 기자회견을 열게 하는 등 이른바 '북풍' 공작을 일으켰습니다.

노골적인 정치 개입.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은 대선자금 불법 모금 혐의까지 더해져 네 차례 기소됐고 5년형을 받았습니다.

1999년,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또 이름을 바꾸고 정보기관 본연의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녹취> KBS 9시 뉴스 (1999.4.25) : "국가안전기획부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부 명칭을 국가정보원으로 바뀌고..."

그러나 2005년 임동원, 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한꺼번에 구속됐습니다.

정치인과 기업인을 광범위하게 도청한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터뷰> 김기삼(전 국정원 직원) : "그때 당시에 과학보안국이라고 하는 도청만 전담하는 수백 명이 있는 큰 부서가 있었어요. 그 부서에서 매일 도청하는 자료를 정리해서 저한테 보내주죠. 필사한 보고서를 제가 유통 관리 파기까지 제가 맡아서 했죠.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 일은 제가 잘 아는 편이죠."

이번 원세훈 전 원장까지, 통치권자의 최측근이었던 정보기관 수장들은 이렇게 정권만 바뀌면 줄줄이 파국을 맞았습니다.

<취재파일K>는 최근 문건 하나를 입수했습니다.

지난 2006년 당시 국정원 직원이 작성한 이른바 '이명박 X파일'.

이명박 서울시장이 퇴임한 직후인 2006년 8월부터 11월까지 사찰한 내용입니다.

부인 김윤옥 씨 등 이명박 전 시장의 친인척과 주변 인물 132명의 주민번호와 함께 호적과 땅문서인 지적, 범죄 기록 등을 조회한 것입니다.

또 이들 사찰 대상자는 물론, 이 전 시장과 관계한 회사들의 부동산 등 재산 흐름이 낱낱이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국정원 5급 직원 고모 씨가 유력 대권 후보였던 이 전 시장을 불법 사찰한 겁니다.

<녹취> 강재섭(당시 한나라당 대표/2007년 7월) : "검찰은 철저히 수사해서 모든 것을 밝혀줄 것을 요구합니다."

당시 행정자치부와 건설교통부, 국세청 등을 통해 무차별로 뒷조사한 횟수가 석 달새 무려 560여 차례나 됩니다.

이 같은 사찰은 국정원의 통상 업무로 가장했습니다.

국정원 직원 고 씨는 재판에서 "공직자의 비리 정보 수집은 국정원의 정당한 직무"라고 주장했지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인터뷰> 박주민(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 : "국가정보원법은 국정원의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고, 특히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통상 업무라는 핑계를 대면서 여러가지 비리 정보라든지 국내 정치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 모두가 금지되어 있는 행위입니다."

국정원의 이런 정치 개입 악순환은 왜 끊이지 않는 것일까?

먼저, 최고 권력자와 정보기관의 특수한 이해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이호중(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권력을 가장 비밀스럽게 가장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관이 바로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이거든요.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비밀 정보기관을 활용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연과 성향에 따라 휘둘리는 인사 관행도 국정원 구성원들이 정권의 안위에 매달리게 되는 한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인터뷰> 이석범(대한변협 인권위원/전 국정원 법제관) : "지역적인 그런 이기주의로 인해서 일부 직원들이 자기의 어떤 출세욕이나 공명심을 따라 가지고 업무를 국가기관을 사유화하고 사물화하다 보니까, 거기에 소외되는 직원들 같은 경우는 자긍심을 잃게 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거죠."

정보기관의 특수성으로 감시와 견제, 통제를 제대로 받지 않아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인터뷰> 오시영(숭실대 법학과 교수) : "국정원장 후보추천(위원)회를 만들어서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후보를 국정원장으로 임명할 필요성이 있고요. 또 국회에서 예산과 인사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정원의 권력 통제 방안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0년 넘게 되풀이되어 온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의혹과 논란, 그리고 수장의 구속이나 기소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정치공작, 정치개입. 이제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게 이 시대 명제처럼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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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원 ‘정치 개입’, 언제까지?
    • 입력 2013-06-14 22:26:01
    • 수정2013-06-14 23:05:20
    취재파일K
<녹취> "문 열어! 비켜!"

<녹취> 진성준(당시 민주통합당 선대위 대변인/12월12일 오후 브리핑) : "국가정보원이 불법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면 전모를 밝히고, 책임을 엄중하게 물을 것입니다."

<녹취> 이광석(서울 수서경찰서장) : "통신자료 제공 요청 등 수사를 하고 있으나 현재까지는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녹취> 이진한(서울중앙지방검찰청 차장검사) : "불법적인 지시를 수시로 반복하여 온 것으로 확인되어 공직선거법 위반 및 국가정보원법 위반으로 불구속기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

퇴임한 원장이 또 법정에 서는 치욕을 안게 됐습니다.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한 것입니다.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면 어김없이 조사받고 처벌받는 악순환이 왜 이렇게 반복돼야 하는 것인지 국민은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 그 어두운 역사를 짚어봅니다.

대통령 선거를 이레 앞둔 지난해 12월 11일 밤.

서울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이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바로 그 안에서 국정원 직원 김모 씨가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 활동을 하고 있다며 민주당 관계자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국정원은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의혹을 부인했지만, 민주당의 고발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경찰은, 대선을 이틀 앞두고 김 씨의 혐의를 찾을 수 없다는 중간 수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녹취> 수사 결과 발표 : "다른 PC를 이용해서 올린 부분은 확인이 안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후 계속된 수사에서 김 씨의 대선 관련 인터넷 게시글이 확인됐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의 이런 활동이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란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녹취> 진선미 민주당 의원(3.18) : "원세훈 국정원장 재임기간 중 국정원이 불법적으로 국내정치에 개입하고 여론 조작을 시도하며 사실상 MB 정권의 전위 부대 역할을 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자료가 입수됐습니다."

2009년부터 국정원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이른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선거가 끝나면 결과를 뒤바꿀 수 없기 때문에 국정원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 종북 세력에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지시에 따라 국정원 대북심리전단이 조직적으로 국내 정치 현안에 개입하고 선거 과정에서 댓글을 달며 여론 조작을 시도했다는 겁니다.

경찰에 이어 검찰이 나섰습니다.

원세훈 전 원장을 출국 금지하고 특별수사팀을 꾸려 국정원을 압수 수색하며 수사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검찰은 국정원 옛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활동한 인터넷 사이트 15개에서 정치 현안에 대한 게시글과 댓글 수백 개를 찾아냈습니다.

직원들이 올린 글들과 그 활동에 원 전 원장이 관여했다는 진술과 물증도 확보했습니다.

혐의 적용을 놓고 잡음이 있었지만 검찰은 결국 원 전 원장에게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적용했습니다.

불구속 기소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 나왔습니다.

<녹취> 조해진(새누리당 의원) : "야당이 스스로 고발한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대놓고 수사 개입하고 압력 넣고 수사 지시를 하고 심지어 구속 여부까지 이렇게 하는 것은 이건 도를 넘은 행동입니다."

<녹취> 신경민(민주당 의원) : "검찰이 원 전 원장을 구속하지 못한 이유는 현 정권이 MB 정권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의혹과 평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를 씻기 위해서라도 검찰은 구속 수사에 단호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관철시켜야만 했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집을 찾았습니다.

<녹취> "계신가요? 원장님 안 계신가요?"

오랫동안 집을 비운 듯 신문과 고지서들이 쌓여 있습니다.

<녹취> 관할경찰서 정보과 형사 : "단체로 민원인들이 올까 봐 대비해서 나와있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더라고요. 언제 들어올 지 장담 못하니까."

인터뷰를 신청했더니 변호인 측에선 "원 전 원장이 오히려 직원들에게 선거 개입이나 정치 관여를 금지하도록 지시했었다."는 입장만 전해왔습니다.

국정원도 "정당한 국가심리전 활동을 선거법 위반으로까지 처리하는 데 유감"이라는 반응을 내놨습니다.

원 전 원장은 비록 불구속 상태지만 조만간 법정에 서서 처벌을 기다리게 됐습니다.

만약 재판에서 혐의가 확정된다면 국정원은, 또다시 정보기관이 부당하게 국내 정치에 개입했다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인터뷰> 이석범(대한변협 인권위원/전 국정원 법제관) : "이 정부에 이런 일을 하고 싶진 않다. 국내 정치 개입을 해서 국민 지탄을 받는 정보기관이 되어서는 자기 자식들에게 볼 면목이 없다며 굉장히 마음을 아파하는 그런 모습을 여러 직원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정원의 뿌리는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중앙정보부입니다.

대공업무는 물론 범죄 수사와 정보 업무를 두루 담당하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기관이었습니다.

반정부세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의 수장들은, 물러난 뒤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4대 김형욱 부장은 퇴임 뒤 미국에 망명했다가 실종됐고, 6대 이후락 부장도 김대중 납치사건 등 이른바 공작정치를 주도했습니다.

5공화국에서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꿨지만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속성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희성, 유학성, 장세동, 안무혁, 이현우 부장은 훗날 줄줄이 형사처벌을 받았습니다.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이었습니다.

<인터뷰> 오시영(숭실대 법학과 교수) : "국가 안보라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정보기관인데 국가에 대한 충성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에 대한 충성을 하다 보니까 그 정권에 대한 충성이 오히려 탈법이나 불법을 조장하게 되는"

문민정부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안기부는 1997년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가 북한의 돈을 받았다는 기자회견을 열게 하는 등 이른바 '북풍' 공작을 일으켰습니다.

노골적인 정치 개입.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은 대선자금 불법 모금 혐의까지 더해져 네 차례 기소됐고 5년형을 받았습니다.

1999년,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또 이름을 바꾸고 정보기관 본연의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녹취> KBS 9시 뉴스 (1999.4.25) : "국가안전기획부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부 명칭을 국가정보원으로 바뀌고..."

그러나 2005년 임동원, 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한꺼번에 구속됐습니다.

정치인과 기업인을 광범위하게 도청한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터뷰> 김기삼(전 국정원 직원) : "그때 당시에 과학보안국이라고 하는 도청만 전담하는 수백 명이 있는 큰 부서가 있었어요. 그 부서에서 매일 도청하는 자료를 정리해서 저한테 보내주죠. 필사한 보고서를 제가 유통 관리 파기까지 제가 맡아서 했죠.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 일은 제가 잘 아는 편이죠."

이번 원세훈 전 원장까지, 통치권자의 최측근이었던 정보기관 수장들은 이렇게 정권만 바뀌면 줄줄이 파국을 맞았습니다.

<취재파일K>는 최근 문건 하나를 입수했습니다.

지난 2006년 당시 국정원 직원이 작성한 이른바 '이명박 X파일'.

이명박 서울시장이 퇴임한 직후인 2006년 8월부터 11월까지 사찰한 내용입니다.

부인 김윤옥 씨 등 이명박 전 시장의 친인척과 주변 인물 132명의 주민번호와 함께 호적과 땅문서인 지적, 범죄 기록 등을 조회한 것입니다.

또 이들 사찰 대상자는 물론, 이 전 시장과 관계한 회사들의 부동산 등 재산 흐름이 낱낱이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국정원 5급 직원 고모 씨가 유력 대권 후보였던 이 전 시장을 불법 사찰한 겁니다.

<녹취> 강재섭(당시 한나라당 대표/2007년 7월) : "검찰은 철저히 수사해서 모든 것을 밝혀줄 것을 요구합니다."

당시 행정자치부와 건설교통부, 국세청 등을 통해 무차별로 뒷조사한 횟수가 석 달새 무려 560여 차례나 됩니다.

이 같은 사찰은 국정원의 통상 업무로 가장했습니다.

국정원 직원 고 씨는 재판에서 "공직자의 비리 정보 수집은 국정원의 정당한 직무"라고 주장했지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인터뷰> 박주민(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 : "국가정보원법은 국정원의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고, 특히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통상 업무라는 핑계를 대면서 여러가지 비리 정보라든지 국내 정치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 모두가 금지되어 있는 행위입니다."

국정원의 이런 정치 개입 악순환은 왜 끊이지 않는 것일까?

먼저, 최고 권력자와 정보기관의 특수한 이해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이호중(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권력을 가장 비밀스럽게 가장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관이 바로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이거든요.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비밀 정보기관을 활용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연과 성향에 따라 휘둘리는 인사 관행도 국정원 구성원들이 정권의 안위에 매달리게 되는 한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인터뷰> 이석범(대한변협 인권위원/전 국정원 법제관) : "지역적인 그런 이기주의로 인해서 일부 직원들이 자기의 어떤 출세욕이나 공명심을 따라 가지고 업무를 국가기관을 사유화하고 사물화하다 보니까, 거기에 소외되는 직원들 같은 경우는 자긍심을 잃게 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거죠."

정보기관의 특수성으로 감시와 견제, 통제를 제대로 받지 않아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인터뷰> 오시영(숭실대 법학과 교수) : "국정원장 후보추천(위원)회를 만들어서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후보를 국정원장으로 임명할 필요성이 있고요. 또 국회에서 예산과 인사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정원의 권력 통제 방안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0년 넘게 되풀이되어 온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의혹과 논란, 그리고 수장의 구속이나 기소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정치공작, 정치개입. 이제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게 이 시대 명제처럼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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