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아야 평화를 지킨다!
입력 2013.12.21 (08:18)
수정 2013.12.2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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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이슬기 앵커, 난징 대학살 들어보셨죠?
일본이 과거 중국 난징을 함락하면서 30만명을 학살한 대참극 이었죠!
일본 일각에선 군 위안부 부인과 같이 여전히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난 13일이 난징 대학살 76주년이었습니다.
현장을 취재했던 저희 특파원은 '그 날을 잊지 않아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목소리를 절실히 들었다고 합니다.
상하이 손관수 특파원 안녕하십니까?
<질문> 그야말로 대 비극이었는데요, 먼저 사건 내용을 대략 짚어보고 가죠.
<답변>
네, 76년 전이죠.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됐습니다.
당시 난징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죠.
그래서 상하이를 점령한 뒤 난징까지 점령하는데 일본이 혈안이 됐었는데요, 전투 단 사흘 만에 함락됐고, 그 뒤로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일본군은 달아난 중국군을 찾는다며 젊은 청년들은 닥치는 대로 살해했고, 여성들은 능욕한 뒤 살해하고, 불에 태우거나, 암매장했습니다.
그 잔혹한 살상의 증거가 최근에도 계속 나오고 있는데요, 지금 화면이 만인갱으로 불리는 곳인데, 1997년 이곳에서 208구의 집단 매장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질문> 단 6주 만에 그 많은 희생이 있었다면 정말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 같아요, 혹시 생존자들은 만나보셨습니까?
<답변>
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당시 열 서너 살, 이제 아흔이 다 되신 두 할머니신데요.
당시의 공포 분위기, 참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터뷰> 천지아샹(생존자/90세/당시 14세) : "일본군이 왔다. 이게 뭔 뜻이냐? 방화, 살인, 약탈, 강간 딱 이 네 글자예요. 난징에 불을 질러 도시가 불바다였어요. 사람만 보면 바로 죽였죠.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인터뷰> 양췌이잉(89세/당시13세) : "둑 아래 엄청나게 큰 물고기 양식장이 있었는데 그곳이 시체로 모두 채워졌어요. 이렇게 솟아올라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질문> 추모식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답변>
이런 대규모 추모제가 시작된 건 지난 94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가 19번째죠.
올해엔 학생, 군인, 일반 시민 등 5천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또 하루 전날 열린 위령제도 종교 의식과 함께 경건하게 치러졌습니다.
추모제 기간 동안에는 역사를 부인하고 있는 일본을 향한 난징 시민 평화 선언도 발표됐습니다.
<인터뷰> 주청산(난징 대학살 기념관 관장) : "평화선언은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리려는 겁니다. 또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적 생존과 발전을 위한 기본이란 걸 설명하기 위한 겁니다."
<질문> 일본이 어떻게 보나 이게 관심인데, 혹시 일본 측 참석자도 있었나요?
<답변>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눈에 띄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주로 일본의 종교계, 또 노동계 대표단들이었습니다.
일본 대표단들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미래가 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참석 했는데 난징 대학살에 대한 사과와 유감, 또 중일간의 우의를 표현하기 위한 걸로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난징 기념관과 교류 중인 4.3 평화재단에서 참석했습니다.
<인터뷰> 마추오카 타마키(일본 종교계 대표) : "여기서 본 것들을 일본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얘기해 줄 겁니다."
<인터뷰> 김영훈(이사장/제주 4.3 평화재단) : "후손들에게 교훈을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기억을 전해주고 교육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반면에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답변>
주로 일본 우익들의 주장인데요! 영상을 하나 보실까요?
이게 바로 일본 우익들이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난징은 조작된 것이다'라는 영상인데요, 난징을 고발한 한 프로그램의 일부 화면이 조작됐다는 걸 내세워 전체 난징 사건이 조작된 것인 양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격다짐 침소봉대죠.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72권으로 출간된 난징 대학살 자료집에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 스스로, 그것도 당시 외무상이 보낸 비밀 전문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1938년 1월 당시 일본의 히로다 외상이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적어도 30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들 사료 편찬을 주관한 난징대 교수의 얘길 들어보실까요.
<인터뷰> 장시앤원 교수(난징대) : "이 자료가 정식으로 나온 뒤부터,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난징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 일본의 우경화 경향과도 무관치 않겠군요?
<답변>
그렇게 보입니다.
일본의 최근 여러 우경화 조치가 '전후 체제를 탈피 하겠다'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우선이겠죠.
또 사과를 하려면 역사적 과오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겠다, 안하겠다라고 한다면 결국 '전후 체제 탈피'는 탈피가 아니라 다시 '전시 체제'로 가겠다는, 군국주의의 길로 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보여 집니다.
지금까지 상하이였습니다.
이슬기 앵커, 난징 대학살 들어보셨죠?
일본이 과거 중국 난징을 함락하면서 30만명을 학살한 대참극 이었죠!
일본 일각에선 군 위안부 부인과 같이 여전히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난 13일이 난징 대학살 76주년이었습니다.
현장을 취재했던 저희 특파원은 '그 날을 잊지 않아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목소리를 절실히 들었다고 합니다.
상하이 손관수 특파원 안녕하십니까?
<질문> 그야말로 대 비극이었는데요, 먼저 사건 내용을 대략 짚어보고 가죠.
<답변>
네, 76년 전이죠.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됐습니다.
당시 난징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죠.
그래서 상하이를 점령한 뒤 난징까지 점령하는데 일본이 혈안이 됐었는데요, 전투 단 사흘 만에 함락됐고, 그 뒤로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일본군은 달아난 중국군을 찾는다며 젊은 청년들은 닥치는 대로 살해했고, 여성들은 능욕한 뒤 살해하고, 불에 태우거나, 암매장했습니다.
그 잔혹한 살상의 증거가 최근에도 계속 나오고 있는데요, 지금 화면이 만인갱으로 불리는 곳인데, 1997년 이곳에서 208구의 집단 매장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질문> 단 6주 만에 그 많은 희생이 있었다면 정말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 같아요, 혹시 생존자들은 만나보셨습니까?
<답변>
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당시 열 서너 살, 이제 아흔이 다 되신 두 할머니신데요.
당시의 공포 분위기, 참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터뷰> 천지아샹(생존자/90세/당시 14세) : "일본군이 왔다. 이게 뭔 뜻이냐? 방화, 살인, 약탈, 강간 딱 이 네 글자예요. 난징에 불을 질러 도시가 불바다였어요. 사람만 보면 바로 죽였죠.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인터뷰> 양췌이잉(89세/당시13세) : "둑 아래 엄청나게 큰 물고기 양식장이 있었는데 그곳이 시체로 모두 채워졌어요. 이렇게 솟아올라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질문> 추모식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답변>
이런 대규모 추모제가 시작된 건 지난 94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가 19번째죠.
올해엔 학생, 군인, 일반 시민 등 5천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또 하루 전날 열린 위령제도 종교 의식과 함께 경건하게 치러졌습니다.
추모제 기간 동안에는 역사를 부인하고 있는 일본을 향한 난징 시민 평화 선언도 발표됐습니다.
<인터뷰> 주청산(난징 대학살 기념관 관장) : "평화선언은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리려는 겁니다. 또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적 생존과 발전을 위한 기본이란 걸 설명하기 위한 겁니다."
<질문> 일본이 어떻게 보나 이게 관심인데, 혹시 일본 측 참석자도 있었나요?
<답변>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눈에 띄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주로 일본의 종교계, 또 노동계 대표단들이었습니다.
일본 대표단들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미래가 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참석 했는데 난징 대학살에 대한 사과와 유감, 또 중일간의 우의를 표현하기 위한 걸로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난징 기념관과 교류 중인 4.3 평화재단에서 참석했습니다.
<인터뷰> 마추오카 타마키(일본 종교계 대표) : "여기서 본 것들을 일본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얘기해 줄 겁니다."
<인터뷰> 김영훈(이사장/제주 4.3 평화재단) : "후손들에게 교훈을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기억을 전해주고 교육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반면에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답변>
주로 일본 우익들의 주장인데요! 영상을 하나 보실까요?
이게 바로 일본 우익들이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난징은 조작된 것이다'라는 영상인데요, 난징을 고발한 한 프로그램의 일부 화면이 조작됐다는 걸 내세워 전체 난징 사건이 조작된 것인 양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격다짐 침소봉대죠.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72권으로 출간된 난징 대학살 자료집에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 스스로, 그것도 당시 외무상이 보낸 비밀 전문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1938년 1월 당시 일본의 히로다 외상이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적어도 30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들 사료 편찬을 주관한 난징대 교수의 얘길 들어보실까요.
<인터뷰> 장시앤원 교수(난징대) : "이 자료가 정식으로 나온 뒤부터,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난징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 일본의 우경화 경향과도 무관치 않겠군요?
<답변>
그렇게 보입니다.
일본의 최근 여러 우경화 조치가 '전후 체제를 탈피 하겠다'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우선이겠죠.
또 사과를 하려면 역사적 과오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겠다, 안하겠다라고 한다면 결국 '전후 체제 탈피'는 탈피가 아니라 다시 '전시 체제'로 가겠다는, 군국주의의 길로 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보여 집니다.
지금까지 상하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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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3-12-21 08: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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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 앵커, 난징 대학살 들어보셨죠?
일본이 과거 중국 난징을 함락하면서 30만명을 학살한 대참극 이었죠!
일본 일각에선 군 위안부 부인과 같이 여전히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난 13일이 난징 대학살 76주년이었습니다.
현장을 취재했던 저희 특파원은 '그 날을 잊지 않아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목소리를 절실히 들었다고 합니다.
상하이 손관수 특파원 안녕하십니까?
<질문> 그야말로 대 비극이었는데요, 먼저 사건 내용을 대략 짚어보고 가죠.
<답변>
네, 76년 전이죠.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됐습니다.
당시 난징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죠.
그래서 상하이를 점령한 뒤 난징까지 점령하는데 일본이 혈안이 됐었는데요, 전투 단 사흘 만에 함락됐고, 그 뒤로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일본군은 달아난 중국군을 찾는다며 젊은 청년들은 닥치는 대로 살해했고, 여성들은 능욕한 뒤 살해하고, 불에 태우거나, 암매장했습니다.
그 잔혹한 살상의 증거가 최근에도 계속 나오고 있는데요, 지금 화면이 만인갱으로 불리는 곳인데, 1997년 이곳에서 208구의 집단 매장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질문> 단 6주 만에 그 많은 희생이 있었다면 정말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 같아요, 혹시 생존자들은 만나보셨습니까?
<답변>
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당시 열 서너 살, 이제 아흔이 다 되신 두 할머니신데요.
당시의 공포 분위기, 참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터뷰> 천지아샹(생존자/90세/당시 14세) : "일본군이 왔다. 이게 뭔 뜻이냐? 방화, 살인, 약탈, 강간 딱 이 네 글자예요. 난징에 불을 질러 도시가 불바다였어요. 사람만 보면 바로 죽였죠.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인터뷰> 양췌이잉(89세/당시13세) : "둑 아래 엄청나게 큰 물고기 양식장이 있었는데 그곳이 시체로 모두 채워졌어요. 이렇게 솟아올라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질문> 추모식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답변>
이런 대규모 추모제가 시작된 건 지난 94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가 19번째죠.
올해엔 학생, 군인, 일반 시민 등 5천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또 하루 전날 열린 위령제도 종교 의식과 함께 경건하게 치러졌습니다.
추모제 기간 동안에는 역사를 부인하고 있는 일본을 향한 난징 시민 평화 선언도 발표됐습니다.
<인터뷰> 주청산(난징 대학살 기념관 관장) : "평화선언은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리려는 겁니다. 또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적 생존과 발전을 위한 기본이란 걸 설명하기 위한 겁니다."
<질문> 일본이 어떻게 보나 이게 관심인데, 혹시 일본 측 참석자도 있었나요?
<답변>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눈에 띄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주로 일본의 종교계, 또 노동계 대표단들이었습니다.
일본 대표단들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미래가 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참석 했는데 난징 대학살에 대한 사과와 유감, 또 중일간의 우의를 표현하기 위한 걸로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난징 기념관과 교류 중인 4.3 평화재단에서 참석했습니다.
<인터뷰> 마추오카 타마키(일본 종교계 대표) : "여기서 본 것들을 일본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얘기해 줄 겁니다."
<인터뷰> 김영훈(이사장/제주 4.3 평화재단) : "후손들에게 교훈을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기억을 전해주고 교육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반면에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답변>
주로 일본 우익들의 주장인데요! 영상을 하나 보실까요?
이게 바로 일본 우익들이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난징은 조작된 것이다'라는 영상인데요, 난징을 고발한 한 프로그램의 일부 화면이 조작됐다는 걸 내세워 전체 난징 사건이 조작된 것인 양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격다짐 침소봉대죠.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72권으로 출간된 난징 대학살 자료집에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 스스로, 그것도 당시 외무상이 보낸 비밀 전문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1938년 1월 당시 일본의 히로다 외상이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적어도 30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들 사료 편찬을 주관한 난징대 교수의 얘길 들어보실까요.
<인터뷰> 장시앤원 교수(난징대) : "이 자료가 정식으로 나온 뒤부터,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난징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 일본의 우경화 경향과도 무관치 않겠군요?
<답변>
그렇게 보입니다.
일본의 최근 여러 우경화 조치가 '전후 체제를 탈피 하겠다'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우선이겠죠.
또 사과를 하려면 역사적 과오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겠다, 안하겠다라고 한다면 결국 '전후 체제 탈피'는 탈피가 아니라 다시 '전시 체제'로 가겠다는, 군국주의의 길로 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보여 집니다.
지금까지 상하이였습니다.
이슬기 앵커, 난징 대학살 들어보셨죠?
일본이 과거 중국 난징을 함락하면서 30만명을 학살한 대참극 이었죠!
일본 일각에선 군 위안부 부인과 같이 여전히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난 13일이 난징 대학살 76주년이었습니다.
현장을 취재했던 저희 특파원은 '그 날을 잊지 않아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목소리를 절실히 들었다고 합니다.
상하이 손관수 특파원 안녕하십니까?
<질문> 그야말로 대 비극이었는데요, 먼저 사건 내용을 대략 짚어보고 가죠.
<답변>
네, 76년 전이죠.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됐습니다.
당시 난징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죠.
그래서 상하이를 점령한 뒤 난징까지 점령하는데 일본이 혈안이 됐었는데요, 전투 단 사흘 만에 함락됐고, 그 뒤로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일본군은 달아난 중국군을 찾는다며 젊은 청년들은 닥치는 대로 살해했고, 여성들은 능욕한 뒤 살해하고, 불에 태우거나, 암매장했습니다.
그 잔혹한 살상의 증거가 최근에도 계속 나오고 있는데요, 지금 화면이 만인갱으로 불리는 곳인데, 1997년 이곳에서 208구의 집단 매장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질문> 단 6주 만에 그 많은 희생이 있었다면 정말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 같아요, 혹시 생존자들은 만나보셨습니까?
<답변>
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당시 열 서너 살, 이제 아흔이 다 되신 두 할머니신데요.
당시의 공포 분위기, 참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터뷰> 천지아샹(생존자/90세/당시 14세) : "일본군이 왔다. 이게 뭔 뜻이냐? 방화, 살인, 약탈, 강간 딱 이 네 글자예요. 난징에 불을 질러 도시가 불바다였어요. 사람만 보면 바로 죽였죠.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인터뷰> 양췌이잉(89세/당시13세) : "둑 아래 엄청나게 큰 물고기 양식장이 있었는데 그곳이 시체로 모두 채워졌어요. 이렇게 솟아올라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질문> 추모식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답변>
이런 대규모 추모제가 시작된 건 지난 94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가 19번째죠.
올해엔 학생, 군인, 일반 시민 등 5천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또 하루 전날 열린 위령제도 종교 의식과 함께 경건하게 치러졌습니다.
추모제 기간 동안에는 역사를 부인하고 있는 일본을 향한 난징 시민 평화 선언도 발표됐습니다.
<인터뷰> 주청산(난징 대학살 기념관 관장) : "평화선언은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리려는 겁니다. 또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적 생존과 발전을 위한 기본이란 걸 설명하기 위한 겁니다."
<질문> 일본이 어떻게 보나 이게 관심인데, 혹시 일본 측 참석자도 있었나요?
<답변>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눈에 띄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주로 일본의 종교계, 또 노동계 대표단들이었습니다.
일본 대표단들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미래가 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참석 했는데 난징 대학살에 대한 사과와 유감, 또 중일간의 우의를 표현하기 위한 걸로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난징 기념관과 교류 중인 4.3 평화재단에서 참석했습니다.
<인터뷰> 마추오카 타마키(일본 종교계 대표) : "여기서 본 것들을 일본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얘기해 줄 겁니다."
<인터뷰> 김영훈(이사장/제주 4.3 평화재단) : "후손들에게 교훈을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기억을 전해주고 교육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반면에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답변>
주로 일본 우익들의 주장인데요! 영상을 하나 보실까요?
이게 바로 일본 우익들이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난징은 조작된 것이다'라는 영상인데요, 난징을 고발한 한 프로그램의 일부 화면이 조작됐다는 걸 내세워 전체 난징 사건이 조작된 것인 양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격다짐 침소봉대죠.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72권으로 출간된 난징 대학살 자료집에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 스스로, 그것도 당시 외무상이 보낸 비밀 전문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1938년 1월 당시 일본의 히로다 외상이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적어도 30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들 사료 편찬을 주관한 난징대 교수의 얘길 들어보실까요.
<인터뷰> 장시앤원 교수(난징대) : "이 자료가 정식으로 나온 뒤부터,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난징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 일본의 우경화 경향과도 무관치 않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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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입니다.
일본의 최근 여러 우경화 조치가 '전후 체제를 탈피 하겠다'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우선이겠죠.
또 사과를 하려면 역사적 과오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겠다, 안하겠다라고 한다면 결국 '전후 체제 탈피'는 탈피가 아니라 다시 '전시 체제'로 가겠다는, 군국주의의 길로 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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