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리포트] ‘마오’ 120주년…‘홍색 관광’

입력 2013.12.21 (08:25) 수정 2013.12.21 (09:1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멘트>

25일이 성탄절인데, 중국에서는 그 다음날이 매우 의미 있는 날이라고 합니다.

신 중국 건설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마오쩌둥의 생일이기 때문인데요, 지금 중국에선 탄생 120주년을 맞아 추모 열풍과 함께 공산 혁명의 성지를 찾는
이른바 '홍색 관광' 붐이 일고 있습니다.

좋던 싫던 한반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죠?

중국 후난성 생가와 혁명 성지를 취재했습니다.

박정호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중국 최대 담수호 둥팅호 남쪽에 있는 후난성, 후난성 수도 창사는 3천 년 역사를 지닌 문화 도시이자 내륙 개발의 핵심 기지입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건 신 중국 건설의 아버지 마오쩌둥 주석입니다.

<인터뷰> "창사는 마오 주석의 두 번째 고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오 주석의 학창 시절과 결혼, 혁명을 길 모두 창사에서 시작됐습니다."

창사를 가로지르는 샹강 귤섬에 세워진 마오의 흉상은 지역의 명물입니다.

83살에 숨진 생애를 기려 너비는 83미터 32살의 청년 시절을 보여준다는 뜻에서 높이는 32미터입니다.

학창 시절 마오는 샹강에서 수영을 즐기며 귤섬에 자주 올랐다고 할 만큼 마오와는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1903년 설립된 후난 제 1 사범학교 유럽풍의 학교 건물은 1938년 창사 대화재 때 불탔지만 예전 모습을 본떠 재건 됐습니다.

<인터뷰> 후난 제1사범 대학생 : "백년전 마오쩌둥이 이 곳에 공부하러 와 은사인 양창지를 만나서 교류.학습.시사 문제를 토론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열고 산책도 했습니다."

창사에서 10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샤오산의 농촌 주택은 120년 전 마오쩌둥이 태어난 곳입니다.

470제곱미터 규모의 생가는 13칸의 방이 있는 '디귿' 자형 건물로 뒤로는 산이 앞에는 연못이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입니다.

샤오산 마오쩌둥 생가는 많은 중국인들이 일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이 곳에서 마오쩌둥은 인간인 아닌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리잉(마오쩌둥 시서화 연구소장) : "개인적으로 마오 주석을 숭배합니다. 마오 주석은 중화 민족의 영웅이자 사상 유례가 없는 그런 영웅입니다."

생가 옆 마오 광장을 찾은 군인들 동상에 화환을 바치고, 세 번의 절을 올리며 절대적인 존경심을 표합니다.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모습도 이 곳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인터뷰> "저희들은 지금 결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곳에 소원을 빌러 왔습니다. 마오 주석은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샤오산의 또 다른 명소인 마오지아 판디엔 생가 주변의 이 식당은 마오 기념관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동상과 사진 등 기념품들이 즐비합니다.

생가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1959년 마오의 고향 방문 사진 속 주인공인 탕루이런 회장 마오의 손님 접대를 위해 식당을 차렸지만 지금은 체인점이 380개나 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터뷰> 탕루이런(마오지아판디엔 회장) : "홍샤오러우는 마오 주석 집에서 만드는 방식. 먹는 방식에 따라 만든 것입니다. 마오 주석은 홍샤오러우를 먹으면 뇌에 도움이 되고 미용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어요."

후난성과 장시성 경계에 있는 징강산.

인민 해방군의 전신인 홍군이 처음 해방구를 설치한 혁명 성지입니다.

마오쩌둥은 바로 이곳 징강산에서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작은 불꽃 하나가 초원을 불태울 수 있다고 언급하며 무장 혁명 전략을 강조했습니다.

징강산 기념비는 가까이에서는 여러 개의 총구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산과 불꽃이 모양으로 마오의 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오는 징강산에서 1927년 10월부터 1년 4개월을 지내며 농촌이 도시를 포위해야 한다는 중국 특유의 혁명 전략도 제시했습니다.

<인터뷰> 관광객 : "징강산은 중국 혁명의 발원지이자 중국 혁명의 요람입니다. 공산당은 이곳에서 국민당과 첫 전투를 치른 다음 반동 세력을 무너뜨리고 신중국을 세웠습니다."

마오쩌둥의 오류에 대한 비판 의식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 중국 성립 이후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 대혁명이라는 혼란을 야기한 책임이 있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분위기입니다.

<인터뷰> "마오 주석은 현재 우리의 삶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과실이 있다 해도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로가 더 크다는 겁니다."

추모 열풍은 중국의 현실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개혁 개방 과정에서 드러난 극심한 빈부 격차와 고질적인 부정부패 현상이 마오 시절 평등했던 사회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는 겁니다.

이를 의식한 듯 시진핑 국가 주석은 장중하면서도 소박하게 기념식을 치르라고 지시했습니다.

<인터뷰> 라오다오량(징간산 기념관 연구원) : "만약 마오 주석이 살아있다면 지금처럼 전면적 개혁 조치를 했을 것입니다. 마오 주석이 혁명을 치르고 중화인민 공화국을 세운 최종 목표는 인민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중국 건설의 아버지이자 영원한 주석으로 불리는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을 맞아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 추모 열풍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현실의 모순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현상인지 속단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하지만 추모 열풍의 폭발력이 중국 사회에서 어떤 압력으로 작용할지 전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월드 리포트] ‘마오’ 120주년…‘홍색 관광’
    • 입력 2013-12-21 08:23:41
    • 수정2013-12-21 09:13:22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25일이 성탄절인데, 중국에서는 그 다음날이 매우 의미 있는 날이라고 합니다.

신 중국 건설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마오쩌둥의 생일이기 때문인데요, 지금 중국에선 탄생 120주년을 맞아 추모 열풍과 함께 공산 혁명의 성지를 찾는
이른바 '홍색 관광' 붐이 일고 있습니다.

좋던 싫던 한반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죠?

중국 후난성 생가와 혁명 성지를 취재했습니다.

박정호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중국 최대 담수호 둥팅호 남쪽에 있는 후난성, 후난성 수도 창사는 3천 년 역사를 지닌 문화 도시이자 내륙 개발의 핵심 기지입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건 신 중국 건설의 아버지 마오쩌둥 주석입니다.

<인터뷰> "창사는 마오 주석의 두 번째 고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오 주석의 학창 시절과 결혼, 혁명을 길 모두 창사에서 시작됐습니다."

창사를 가로지르는 샹강 귤섬에 세워진 마오의 흉상은 지역의 명물입니다.

83살에 숨진 생애를 기려 너비는 83미터 32살의 청년 시절을 보여준다는 뜻에서 높이는 32미터입니다.

학창 시절 마오는 샹강에서 수영을 즐기며 귤섬에 자주 올랐다고 할 만큼 마오와는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1903년 설립된 후난 제 1 사범학교 유럽풍의 학교 건물은 1938년 창사 대화재 때 불탔지만 예전 모습을 본떠 재건 됐습니다.

<인터뷰> 후난 제1사범 대학생 : "백년전 마오쩌둥이 이 곳에 공부하러 와 은사인 양창지를 만나서 교류.학습.시사 문제를 토론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열고 산책도 했습니다."

창사에서 10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샤오산의 농촌 주택은 120년 전 마오쩌둥이 태어난 곳입니다.

470제곱미터 규모의 생가는 13칸의 방이 있는 '디귿' 자형 건물로 뒤로는 산이 앞에는 연못이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입니다.

샤오산 마오쩌둥 생가는 많은 중국인들이 일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이 곳에서 마오쩌둥은 인간인 아닌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리잉(마오쩌둥 시서화 연구소장) : "개인적으로 마오 주석을 숭배합니다. 마오 주석은 중화 민족의 영웅이자 사상 유례가 없는 그런 영웅입니다."

생가 옆 마오 광장을 찾은 군인들 동상에 화환을 바치고, 세 번의 절을 올리며 절대적인 존경심을 표합니다.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모습도 이 곳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인터뷰> "저희들은 지금 결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곳에 소원을 빌러 왔습니다. 마오 주석은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샤오산의 또 다른 명소인 마오지아 판디엔 생가 주변의 이 식당은 마오 기념관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동상과 사진 등 기념품들이 즐비합니다.

생가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1959년 마오의 고향 방문 사진 속 주인공인 탕루이런 회장 마오의 손님 접대를 위해 식당을 차렸지만 지금은 체인점이 380개나 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터뷰> 탕루이런(마오지아판디엔 회장) : "홍샤오러우는 마오 주석 집에서 만드는 방식. 먹는 방식에 따라 만든 것입니다. 마오 주석은 홍샤오러우를 먹으면 뇌에 도움이 되고 미용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어요."

후난성과 장시성 경계에 있는 징강산.

인민 해방군의 전신인 홍군이 처음 해방구를 설치한 혁명 성지입니다.

마오쩌둥은 바로 이곳 징강산에서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작은 불꽃 하나가 초원을 불태울 수 있다고 언급하며 무장 혁명 전략을 강조했습니다.

징강산 기념비는 가까이에서는 여러 개의 총구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산과 불꽃이 모양으로 마오의 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오는 징강산에서 1927년 10월부터 1년 4개월을 지내며 농촌이 도시를 포위해야 한다는 중국 특유의 혁명 전략도 제시했습니다.

<인터뷰> 관광객 : "징강산은 중국 혁명의 발원지이자 중국 혁명의 요람입니다. 공산당은 이곳에서 국민당과 첫 전투를 치른 다음 반동 세력을 무너뜨리고 신중국을 세웠습니다."

마오쩌둥의 오류에 대한 비판 의식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 중국 성립 이후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 대혁명이라는 혼란을 야기한 책임이 있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분위기입니다.

<인터뷰> "마오 주석은 현재 우리의 삶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과실이 있다 해도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로가 더 크다는 겁니다."

추모 열풍은 중국의 현실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개혁 개방 과정에서 드러난 극심한 빈부 격차와 고질적인 부정부패 현상이 마오 시절 평등했던 사회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는 겁니다.

이를 의식한 듯 시진핑 국가 주석은 장중하면서도 소박하게 기념식을 치르라고 지시했습니다.

<인터뷰> 라오다오량(징간산 기념관 연구원) : "만약 마오 주석이 살아있다면 지금처럼 전면적 개혁 조치를 했을 것입니다. 마오 주석이 혁명을 치르고 중화인민 공화국을 세운 최종 목표는 인민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중국 건설의 아버지이자 영원한 주석으로 불리는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을 맞아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 추모 열풍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현실의 모순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현상인지 속단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하지만 추모 열풍의 폭발력이 중국 사회에서 어떤 압력으로 작용할지 전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