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한 길…주현미 노래 인생 30년

입력 2014.09.24 (16:02) 수정 2014.09.2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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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이승현입니다.

오늘 시사진단에서 만나볼 화제의 인물.

촉촉히 가을비만큼 우리 감성을 적셔온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가수 주현미 씨입니다.

온국민이 사랑하는 트로트의 명맥을 굳건히 지켜온 가수 주현미 씨 지금 만나보시죠.

-주현미 씨 저희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저도 방송생활 한 24년째인데 이렇게 연예인을 직접 옆에서 뵙기가 처음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저도 사실 황상무 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요.

이렇게 직접 뵙기는 처음이네요.

-아니, 뭐 저는 기자여서 저는 잘 모르시지 않겠나.

-저는 많이 들었어요.

오늘 여기 나온다고, 출연한다고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해 주시던데요.

-저희 회사 직원들이니까 얘기를 했겠죠.

-직위가 영원한 상무님이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저는 입사 때부터 상무였습니다.

방금 나왔던 곡이 이번에 데뷔 30주년 기념앨범에 수록된 최고의 사랑.

-네.

이거 그래서 CD 사인해서 드리려고 제가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이름까지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벌써 30년이 됐나 싶어요.

처음 데뷔하셨을 때 모습이 기억이 나는데.

-네, 30년 됐네요.

저도 안 믿겨져요.

-정식 데뷔가 그러니까 84년이었죠?

-84년도 딱 이맘때예요.

쌍쌍파티라는 메들리 음반이 사랑을 받으면서.

-그때 그게 얼마나 팔렸습니까?

-공식 집계는 안 됐지만 그냥 뭐 500만장이다, 심지어는.

그게 공식 집계가 아니니까 1000만장이다.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죠.

-제가 어디서 잠깐 봤더니 2000만개가 팔렸다고 나왔던데.

-왜냐하면 그때는 불법 그런 게 많았으니까요.

-2000만개가 사실은 정식으로 했으면 죄송한 표현입니다마는 떼돈을 버셨어야 했는데 그건 아니었고.

그래도 하여튼 대단하십니다.

-그럼요.

그래도 저는 혜택은 많이 받았다고 생각을 해요.

-정식 음반 취입하신 건 중학교 2학년 때라면서요.

-네.

-그런데 그 전에 초등학생 때도 이미 무슨 노래를 해서 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정아버지께서 제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저를 담임선생님하고 두 분이서 얘기를 하더니 책가방을 들고 집에 가래요, 아빠 따라서.

갔는데 그때 정동 MBC 시절이었죠.

이미자 스페셜 아워라는 프로그램에 아마추어들이 이미자 선배님의 노래를 누가 제일 잘 부르나 하는 경연대회였어요.

거기에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간 거예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네.

그래서 저는 거기서 시키는 대로 노래만 했는데 그때 제가 대상을 받았어요.

-1등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네.

-초등학교 4학년 때?

-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원래부터 노래를 잘했군요.

-어른들이, 그러니까 아버지가 시키면 곧잘했네요, 유행가를.

-곧잘했대요가 아니라 본인 기억이 선명하게 날 거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내가 노래만큼은 내가 잘했다.

그랬던 건가요?

-글쎄 말이에요.

그런 자신감이나 그런 건.

그렇지는 않았어요.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더 수줍어하고 좀 그래서 누가 노래 시키거나 그러면 안 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원래 무대 체질은 아닙니까?

-네.

아버지가 무서워서 시키면 친척들 앞에서 아니면 아버지 지인분들 앞에서 노래를 하긴 했지만 많이 부끄러워했어요.

-그렇게 해도 하여튼 실력은 1등이셨군요.

그런데 원래 강변가요제 출신이시라면서요?

-81년도에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여름 계절학기를 들었는데 도서관에서 내려오면서 이렇게 들으니까 약대 밴드가 있는데요.

가요제에 출전한다고 연습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저는 그 팀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구경하고 따라부르고 하다가 거기 선배 형이 같이 나가보자 그래서 81년도 강변가요제에 출전을 해서 우리 중앙대 약대 그때 인삼뿌리.

진생 라딕스였는데요.

그 밴드가 장려상을 받았어요.

-장려상.

단독으로 나가셨으면 대상을 받으셨을 텐데.

-아마 그때도 저더러 혼자 단독으로 나가라고 했으면 못 나갔을 거예요.

-그때도 트로트였지는 않았죠?

-그때는 밴드니까 록발라드였어요.

-그런데 아까 처음에 84년도 데뷔하실 때 쌍쌍파티 카세트테이프 얘기를 했는데.

원래는 주현미 씨가 녹음할 예정이 아니었다면서요.

-네.

작년에 돌아가셨죠.

조미미 선배님.

-가수 조미미 씨.

-녹음 스케줄이었어요.

-지금 저기 화면에 나오네요.

그러면 저 사진이 테이프 앞에 붙었고.

-처음 저게 쌍쌍파티로 나왔을 때는 제 사진도 없었어요.

그냥 그림으로 그려서.

무도회장의 무슨 그림으로 나왔었는데.

저건 훗날 나중에 제가 최근에 제품으로 나온 것 같아요.

-저 옆에 남자가수는.

-김준규 씨라고 작곡가 선생님이세요.

그날 녹음을 해 주셨던 분이에요.

-아, 그래요?

-네.

-그러니까 그게 일설에 의하면 2000만장이 팔렸다는 건데 소위 얼굴도 없이 일약 톱스타가 되신 거네요.

그렇죠?

-네.

정말 그때는 그렇게 많은 호응을 얻을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저도 녹음을 해 놓고 잊어버렸거든요.

잠시 그냥 약국에.

그때 제가 약국을 경영을 했어요.

-그때 대학 졸업하시고 약사 하시다가.

-네.

조그마한 약국을 제가 직접 했는데.

좀 무료하고 그래서 녹음.

노래를 좀 해 보지 않겠느냐는 작곡가 정종택 씨의 권유로 그냥 가서 녹음 어떻게 하다가 조미미 선배님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그날 안 나오셨어요, 그 녹음실에.

그래서 제가 대신 그 노래들을 부른 거예요.

그래서 나왔는데.

-그러면 정식으로 누구한테 노래를 배운 건 아니죠?-정식으로 트레이닝은 받았어요.

-트레이닝은 받으셨고.

-정종택 선생님한테 받았어요.

어렸을 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친정아버지가 엄청 딸이 노래를 곧잘한다고 생각하셔서 자랑거리셨어요.

그래서 정식으로 트레이닝도 받고 하기를 원하셔서 받았습니다.

-그러면 트로트.

저희들이 얘기하는 특유의 떨림과 트로트의 꺾기 그런 건 다 트레이닝을 통해서 닦아진 거죠?

-그런데 그 부분은 그런 테크닉이나 바이브레이션은 사실 트레이닝을 통해서 되지는 않아요.

저는 어떻게 보면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소리는 제가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러다가 85년도에 저희들이 다 기억하는 본인의 첫 노래 비 내리는 영동교.

얼굴 없는 가수로 있다가 막상 무대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했을 때 폭발적인 반응을 보고 어떠셨어요?

-그때는 TV 방송국마다 쇼프로그램이 많았어요.

가수들 노래하고 그런 프로그램이 많아서 정말 일주일 내내 방송국에서 살았죠.

월요일이면 가요무대, 화요일이면 다른 방송국의 오락프로그램.

계속 노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많았는데요.

쭉 그렇게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80년대 중반에 그러니까 새로운 트로트시대를 주현미 씨가 열었다.

그래서 다란 가요 평론가 얘기를 보니까 주현미 씨 덕택에 현철 씨, 설운도 씨, 김지애, 문희옥 씨도 동시다발로 방송계에 데뷔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줬다.

-그렇게 말씀하세요?

저는 글쎄요.

그게 제가 스타트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뭐든지 약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무렵 너무 우리 전통가요가 외면당하던 그 시기여서 어쩌면 우리 대중들이 그런 걸 갈망하고 있지 않았었나.

그런데 저는 그때 때를 잘 만나서 그게 제가 어떻게 문을 처음 열지 않았나 싶어요.

-누가 이런 얘기까지 했더라고요.

당시 외국에 나가 있던 태진아 씨, 송대관 씨도 주현미 씨가 트로트 시장을 새롭게 문을 여니까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잘됐네요, 그러면.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 좋은 일이었는데요.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대학교 다닐 때는 발라드로 강변가요제에 나가셨잖아요.

-네.

-왜 트로트를 하시게 됐습니까?

-비 내리는 영동교가 전통가요고요.

또 쌍쌍파티라는 그 메들리 테이프 안에 수록된 노래가 전부 우리 옛 노래, 선배님들의 노래예요.

그리고 또 제가 처음 듣고 배우고 따라했던 노래가 트로트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미자 선생님의 동백아가씨가 제가 4살 때 1964년도에 정말 전국을 휩쓸었대요.

그런데 제가 그때 그 이미자 선배님의 동백아가씨를 듣고 따라 부르고 친정엄마한테 가르쳐드렸대요.

아기가.

모르겠어요, 이건 엄마 얘기니까.

-어릴 때는 그랬다고 치고.

대학생 때는 록발라드를 가지고 나가셨는데 혹시나.

저희보다 연배.

저희보다 조금 위시기는 한데 트로트는 뭔가 조금 저급하다, 뽕짝이다.

그런 게 좀 있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망설임 같은 게 없었습니까?

-네, 저는 그런 건 없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저한테 가르쳐준 노래들도 목포의 눈물이나 이런 노래들이어서 많이 친숙했고요.

글쎄요, 어떻게 보면 우리 트로트가 좀 저급하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어떤 작은 일부분일 수도 있고요.

정말 깊이 우리 서민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함께할 수 있는 노래는 우리 옛 가요들 아닐까 저는 생각을 해요.

-한국민의 정서와 국민들의 애환이라든가 그런 것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게 트로트다.

그 평가에는 동의를 하시는 겁니까?

-네.

그리고 제 목소리랑 제일 잘 맞는 장르 같아요.

-그렇죠.

음색이 뛰어나신데 본인이 제일 잘하는 게 트로트가수로서, 전통가요 얘기를 하시는데 전통가요에서 가장 잘 맞는 게 음색이라고 보세요.

아니면 특유의 아까 얘기했던 어떤 떨림,바이브레이션 또는 우리가 얘기하는 꺾기.

어떤 겁니까?

-그런데 어떤 것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 없는 것 같아요.

전부 다 같이 그게 조화롭게 소리도 그렇고 또 가지고 있는 그런 바이브레이션도 그렇고 또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감정 그런 것들도 함께 그게 섞여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대가수한테 이런 질문 드리는 게 좀 죄송스럽습니다마는.

오늘 모신다고 해서 월요일 날 우리 가요무대 나오시는 걸 제가 자세히 봤어요.

보면서 꺾기가, 소위 기교가 혹시나 죄송스러운 말씀인데 좀 지나친 게 아닌가, 노래를 담백하게 부르시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좀 가졌는데 어떻습니까?

-그런데 제 노래를 만약에 자세히 들어본다면 악보상에 없는 그런 테크닉은 정말 한두 군데예요.

그래서 정석으로 불러야지 된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이미지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요.

-저도 이미자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게 가슴에 와닿더라고요.

-맞아요.

너무 테크닉을 부리면, 노래를 듣는 사람도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래서 저는 어떻게 보면 그런 쪽으로 약간 억울한 게 제 목소리가 좀 약간 그렇게 좀 화려하다고 표현할까요.

그렇게 해서 기교같이 들리지만 그 음을 많이 꾸미지는 않거든요.

-일부러 기교를 부리시는 건 아니다.

-네.

그런 면에서는 조금.

맞아요, 깊이 생각할 부분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하셨던 수많은 히트곡들 잠깐 저희들이 들어보고 나서 말씀 좀 이어가도록 하시죠.

85년도 곡이죠.

-네, 신인상 받을 때예요.

-제가 옛날에 기억하기로는 좀 촌스러웠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지금 보니까 촌스럽다기보다는 아주독특한데요.

-감사합니다.

-이제 좀 세련돼지셨고.

-점점.

-그야말로 우리 한시대를 아주 풍미했던 노래들을 전부 쭉 해 오셨는데.

국민가수라는 별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아주 자연스러운, 그렇게 되셨어요.

그런데 저희가 기억하기로 처음 데뷔하실 때 초반에도 잠깐 얘기했습니다마는 약사 출신 가수다, 또 화교다.

그래 가지고 더 관심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런 수식어가 앞에 붙었었죠.

-지금 저 화면에 나오는 게 약사 하실 때.

-네, 맞아요.

-실제로 약국을 운영하셨죠?

-네.

-얼마나 하셨습니까?

-졸업하고 바로, 졸업하던 해에 84년도에 약국을 개업을 해서 비 내리는 영동교를 발표하고도 계속 했었어요, 9월달 정도까지.

-그랬습니까?돈은 좀 버셨습니까?

-약국 해서는 돈을 못 벌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약사가 가장 잘나가던 직업 중에 하나인데.

-맞아요.

그런데 저는 졸업하자마자 약국을 개업해서요.

그것도 경영인데 그 부분을 좀 못했어요.

-조금 전에 우리가 들었던 노래 중에 신사동 그 사람, 비 내리는 영동교.

-짝사랑도 들었어요.

-보면 당시에 영동 개발, 강남 개발 붐 이런 걸 탔던 시대상을 반영한 듯한 그런 분위기인데 혹시 그런 걸 의도하고 작사가 돼 있었던 걸까요?-아니요.

저는.

그러니까 저는 요즘 DJ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가요 평론가나 전문가 분들하고 인터뷰를 할 기회도 있고 그런데.

최근에 알았어요.

우리 가요가 시대를 반영하는 제일 어떻게 보면 그런 증거라고 할 수 있다고.

그래서 80년대 중반에 강남 개발 붐을 타고 그때 그래서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그 노래가 히트가 됐다고 그렇게들 풀이를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알았어요.

아, 그래서 시대를 참 잘 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작품을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하죠.

-말씀을 들어보면 참 하여튼 제가 말씀을 나누면서 조금 뭐라 그럴까, 제가 감동을 받았다 그럴까.

왜 이렇게 겸손하실까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데.

요즘 트로트 인기가 전과 같지 않아요.

그렇죠?

-맞아요.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는 정말 대단했었는데.

예를 들면 지역축제 같은 데도 여전히 주현미 씨는 바쁘시고 많이 가시겠지만 지역축제 같은 데서도 요즘은 아이돌그룹, 걸그룹들을 부른다.

최근에 들으니까 무슨 트로트 전문으로 하는 기획사가 문을 닫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랬어요.

-어떻게 보세요?이 분야를 어떻게 보면 중흥기를 새로 열었던 분으로서.

-안타깝죠.

그리고 사실 가요계 시장이 엄청 빨라졌어요, 텀이.

그러니까 신곡이 나오고 하루, 이틀 만에 음원차트를 점령을 해야지, 그래야지만 주목을 받고.

그러니까 후배들이 사실 활동하기가 더 각박해지고 경쟁도 더 많아진 거죠.

거기에 우리 트로트는 서민의 가요다 그래서 뭔가 주목도 덜 받게 되고 작품성 이런 것들도 아무튼 밀려나고 그러는데.

그러다 보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후배들이 발표하는 노래는 더 자극적이 되고 더 정말 말초적이게 되고 악순환인 것 같아요.

정말 안타까운 게 우리 선배님들이 남겨놓은 그런 아름다운 노래 그런 노래들이 점점 잊혀지고 세대가 변하면서 그런 정서도 공유할 수 없고.

세대간의 그런 벽 같은 게 느껴지면서 이건 정말 전할 수 없는 건가.

저도 사실 노래를 하면서 막막함이 있어요.

음악을 실제로 지금 하고 있는 후배들도 트로트는 어려워요, 선배님.

이렇게 얘기하는 후배들도 있어요.

-어렵습니까, 트로트가?

-저는 안 어렵죠.

저는 정말 공기처럼, 숨쉬는 것처럼쉽고 너무 정겹고 편안하고 한데.

그게 벌써 음악적으로도 세대하고의그런 단절이 오는 거 아닌가 아쉬워요.

-저도 팬의 한 명으로서 생각을 좀 해 보면 죄송한 말씀인데 바로 그 얘기를 하셨어요.

말초적으로, 성급하다 보니까 좀 더 자극적으로 다가가려고 하는데.

뭔가 감정을 표현을 할 때 좀 포장을 아름답게 해야 되는데 바로 다가가야 되고 뭘 하려다 보니까 자극적으로 하려다 보니까 포장을 다 벗기고 너무 원색적으로 단세포적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러면 오히려 더 말씀하신 대로 악순환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렇죠?

-네.

그래서 몇몇 후배들도 그렇게 안 가려고 노력을 많이 하죠.

문희옥 씨나 또 심지어는 장윤정 씨 같은 경우도 노래를 많이 가려서 발표를 하고 그런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후배가수 중에 신유 씨나 박구윤 씨 이런 분들.

그러니까 신인, 후배들한테 기대를 많이 해요.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우리의 정서를 좀 많이 반영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불러줬으면 하는 바람이죠.

-최근에 주현미 씨가 후배들하고 협업작업들을 많이 하시잖아요.

그렇죠?

-네.

-그런 것도 그런 일환의 하나죠?

-그랬어요.

음악 안에서마저 단절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후배들이 같이 작업을 하자고 그러면 장르를 불문하고 하겠다고 그러고 최선을 다해서 해 보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30주년 앨범은 사실 후배 작곡가들이 많이 도와줘서 그렇게 콜라보를 많이 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누가 이런 얘기까지 하더라고요.

너무 제가 좋은 얘기만 해 드려서 조금 저도 그렇기는 한데, 좋은 얘기니까 소개를 해 드리는 건데.

우리 사회에 어떻게 보면 세대간의 갈등도 심각한데 그런 면에서 바로 이런 후배가수들과 협업작업을 하면서 세대갈등 치유에도 앞장서고 계시다.

-저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간절해요.

어떤 때는 같은 공연을 하는데 후배들은 어려워하고 또 우리도 보면 뭔가 멋쩍고 괜히 고리타분해 보이는 것 같고.

그런데 무대에서만큼은 그런 단절이 없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런 어떤 그야말로 대중문화예술인의 최고 정상의 자리로서 영향력이 큰데 최근에는 다문화가정,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하나의 문제 부분들, 그 부분도 치유에 앞장서신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제가 솔선수범해서라기보다 저는 많이 좋은 이끌림을 받은 것 같아요.

라디오프로그램을 진행을 했었어요.

요즘 하고 있어요.

-요즘 하고 계시죠?

-네.

-KBS에서?

-해피FM인데요.

수도권 주파수는 106.1입니다.

-오전.

-11시부터.

-제목이?

-주현미의 러브레터예요.

-주현미의 러브레터.

-매일매일 만나고 있는데요.

-지금 나가고 있는 화면이네요.

오늘 오전에 방송했던 장면인가요?

-네, 맞아요.

매일매일 생방송 하려고 노력을 하고요.

오늘 오전에도.

-이 방송 이런 걸 통해서도 다문화가정을.

-네.

그래서 프로젝트 음반을 하나 발표를 했어요.

작곡가 열 분에게,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열 분에게 열 곡을 받아서 음반을 제작을 해서 그 음반 판매 수익금을 모두 다문화가정에게 기부하는 그런 앨범을 발표하고 될 수 있으면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데 성과는 많지는 않지만 그렇게 조금만 누구든지 시작을 조금조금씩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좋은 일 많이 하셨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 하나 좀 더 여쭤보겠습니다.

원래 화교시잖아요.

-네.

-귀화는 하셨습니까?

-그럼요.

결혼을 하면서 대한민국 국적 주민등록증 받았어요.

-저희들이 주현미 씨를 좋아하는 게 무대에서는 화려한 톱스타지만 가정을 아주 모범적으로 잘 꾸리신다고 해서 특히 칭송들이 자자한데.

-저는 그 얘기 나오면 부끄러운데.

-무대의 화려한 삶과 또 가정에서의 평범한 주부의 삶을 어떻게 조화하고 계세요?

-조화라기보다요.

-자연스러운 겁니까, 그냥?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정말 제가 가수이고 팬들의 사랑을 받은, 거기에 보답을 하는, 최선을 다하는 그런 노래하는 가수지만 무대가 끝나고 계단이 있잖아요.

무대 계단을 내려온 순간부터 저는 그냥 한 남자의 마누라고 아이들의 엄마고.

그러고 싶어요, 또.

-앞으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으세요?여전히 현역이시고 한창이신데.

-아무래도 대중가요 가수니까 계속 고전처럼 내려오는 우리 선배님들의 노래는 지킬 거고요.

또 이렇게 후배들하고 함께하는.

지금 이 노래는 빗속에서인데 역시 30주년 앨범에 수록된 노래인데 이렇게 후배 작곡가들, 음악 하는 친구들하고도 요즘 변하는.

유행가잖아요, 어차피 우리가 부르는 이 노래들이.

그래서 유행하는 그런 음악 패턴 이런 것도 불러보고요.

그럼으로써 제 노래를 사랑해 주시는 팬분들에게 이런 음악도 있다고 또 제가 중간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데뷔 30년 동안 정상의 자리에서 국민가수로서 여전히 현역으로서 정상을 꿋꿋이 지켜오고 있는 주현미 씨 모시고 여러 가지 말씀 재미있게 들어봤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음반 감사합니다.

잘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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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로트 한 길…주현미 노래 인생 30년
    • 입력 2014-09-24 16:13:01
    • 수정2014-09-24 17:47:58
    시사진단
-안녕하십니까?이승현입니다.

오늘 시사진단에서 만나볼 화제의 인물.

촉촉히 가을비만큼 우리 감성을 적셔온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가수 주현미 씨입니다.

온국민이 사랑하는 트로트의 명맥을 굳건히 지켜온 가수 주현미 씨 지금 만나보시죠.

-주현미 씨 저희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저도 방송생활 한 24년째인데 이렇게 연예인을 직접 옆에서 뵙기가 처음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저도 사실 황상무 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요.

이렇게 직접 뵙기는 처음이네요.

-아니, 뭐 저는 기자여서 저는 잘 모르시지 않겠나.

-저는 많이 들었어요.

오늘 여기 나온다고, 출연한다고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해 주시던데요.

-저희 회사 직원들이니까 얘기를 했겠죠.

-직위가 영원한 상무님이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저는 입사 때부터 상무였습니다.

방금 나왔던 곡이 이번에 데뷔 30주년 기념앨범에 수록된 최고의 사랑.

-네.

이거 그래서 CD 사인해서 드리려고 제가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이름까지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벌써 30년이 됐나 싶어요.

처음 데뷔하셨을 때 모습이 기억이 나는데.

-네, 30년 됐네요.

저도 안 믿겨져요.

-정식 데뷔가 그러니까 84년이었죠?

-84년도 딱 이맘때예요.

쌍쌍파티라는 메들리 음반이 사랑을 받으면서.

-그때 그게 얼마나 팔렸습니까?

-공식 집계는 안 됐지만 그냥 뭐 500만장이다, 심지어는.

그게 공식 집계가 아니니까 1000만장이다.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죠.

-제가 어디서 잠깐 봤더니 2000만개가 팔렸다고 나왔던데.

-왜냐하면 그때는 불법 그런 게 많았으니까요.

-2000만개가 사실은 정식으로 했으면 죄송한 표현입니다마는 떼돈을 버셨어야 했는데 그건 아니었고.

그래도 하여튼 대단하십니다.

-그럼요.

그래도 저는 혜택은 많이 받았다고 생각을 해요.

-정식 음반 취입하신 건 중학교 2학년 때라면서요.

-네.

-그런데 그 전에 초등학생 때도 이미 무슨 노래를 해서 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정아버지께서 제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저를 담임선생님하고 두 분이서 얘기를 하더니 책가방을 들고 집에 가래요, 아빠 따라서.

갔는데 그때 정동 MBC 시절이었죠.

이미자 스페셜 아워라는 프로그램에 아마추어들이 이미자 선배님의 노래를 누가 제일 잘 부르나 하는 경연대회였어요.

거기에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간 거예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네.

그래서 저는 거기서 시키는 대로 노래만 했는데 그때 제가 대상을 받았어요.

-1등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네.

-초등학교 4학년 때?

-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원래부터 노래를 잘했군요.

-어른들이, 그러니까 아버지가 시키면 곧잘했네요, 유행가를.

-곧잘했대요가 아니라 본인 기억이 선명하게 날 거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내가 노래만큼은 내가 잘했다.

그랬던 건가요?

-글쎄 말이에요.

그런 자신감이나 그런 건.

그렇지는 않았어요.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더 수줍어하고 좀 그래서 누가 노래 시키거나 그러면 안 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원래 무대 체질은 아닙니까?

-네.

아버지가 무서워서 시키면 친척들 앞에서 아니면 아버지 지인분들 앞에서 노래를 하긴 했지만 많이 부끄러워했어요.

-그렇게 해도 하여튼 실력은 1등이셨군요.

그런데 원래 강변가요제 출신이시라면서요?

-81년도에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여름 계절학기를 들었는데 도서관에서 내려오면서 이렇게 들으니까 약대 밴드가 있는데요.

가요제에 출전한다고 연습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저는 그 팀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구경하고 따라부르고 하다가 거기 선배 형이 같이 나가보자 그래서 81년도 강변가요제에 출전을 해서 우리 중앙대 약대 그때 인삼뿌리.

진생 라딕스였는데요.

그 밴드가 장려상을 받았어요.

-장려상.

단독으로 나가셨으면 대상을 받으셨을 텐데.

-아마 그때도 저더러 혼자 단독으로 나가라고 했으면 못 나갔을 거예요.

-그때도 트로트였지는 않았죠?

-그때는 밴드니까 록발라드였어요.

-그런데 아까 처음에 84년도 데뷔하실 때 쌍쌍파티 카세트테이프 얘기를 했는데.

원래는 주현미 씨가 녹음할 예정이 아니었다면서요.

-네.

작년에 돌아가셨죠.

조미미 선배님.

-가수 조미미 씨.

-녹음 스케줄이었어요.

-지금 저기 화면에 나오네요.

그러면 저 사진이 테이프 앞에 붙었고.

-처음 저게 쌍쌍파티로 나왔을 때는 제 사진도 없었어요.

그냥 그림으로 그려서.

무도회장의 무슨 그림으로 나왔었는데.

저건 훗날 나중에 제가 최근에 제품으로 나온 것 같아요.

-저 옆에 남자가수는.

-김준규 씨라고 작곡가 선생님이세요.

그날 녹음을 해 주셨던 분이에요.

-아, 그래요?

-네.

-그러니까 그게 일설에 의하면 2000만장이 팔렸다는 건데 소위 얼굴도 없이 일약 톱스타가 되신 거네요.

그렇죠?

-네.

정말 그때는 그렇게 많은 호응을 얻을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저도 녹음을 해 놓고 잊어버렸거든요.

잠시 그냥 약국에.

그때 제가 약국을 경영을 했어요.

-그때 대학 졸업하시고 약사 하시다가.

-네.

조그마한 약국을 제가 직접 했는데.

좀 무료하고 그래서 녹음.

노래를 좀 해 보지 않겠느냐는 작곡가 정종택 씨의 권유로 그냥 가서 녹음 어떻게 하다가 조미미 선배님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그날 안 나오셨어요, 그 녹음실에.

그래서 제가 대신 그 노래들을 부른 거예요.

그래서 나왔는데.

-그러면 정식으로 누구한테 노래를 배운 건 아니죠?-정식으로 트레이닝은 받았어요.

-트레이닝은 받으셨고.

-정종택 선생님한테 받았어요.

어렸을 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친정아버지가 엄청 딸이 노래를 곧잘한다고 생각하셔서 자랑거리셨어요.

그래서 정식으로 트레이닝도 받고 하기를 원하셔서 받았습니다.

-그러면 트로트.

저희들이 얘기하는 특유의 떨림과 트로트의 꺾기 그런 건 다 트레이닝을 통해서 닦아진 거죠?

-그런데 그 부분은 그런 테크닉이나 바이브레이션은 사실 트레이닝을 통해서 되지는 않아요.

저는 어떻게 보면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소리는 제가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러다가 85년도에 저희들이 다 기억하는 본인의 첫 노래 비 내리는 영동교.

얼굴 없는 가수로 있다가 막상 무대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했을 때 폭발적인 반응을 보고 어떠셨어요?

-그때는 TV 방송국마다 쇼프로그램이 많았어요.

가수들 노래하고 그런 프로그램이 많아서 정말 일주일 내내 방송국에서 살았죠.

월요일이면 가요무대, 화요일이면 다른 방송국의 오락프로그램.

계속 노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많았는데요.

쭉 그렇게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80년대 중반에 그러니까 새로운 트로트시대를 주현미 씨가 열었다.

그래서 다란 가요 평론가 얘기를 보니까 주현미 씨 덕택에 현철 씨, 설운도 씨, 김지애, 문희옥 씨도 동시다발로 방송계에 데뷔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줬다.

-그렇게 말씀하세요?

저는 글쎄요.

그게 제가 스타트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뭐든지 약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무렵 너무 우리 전통가요가 외면당하던 그 시기여서 어쩌면 우리 대중들이 그런 걸 갈망하고 있지 않았었나.

그런데 저는 그때 때를 잘 만나서 그게 제가 어떻게 문을 처음 열지 않았나 싶어요.

-누가 이런 얘기까지 했더라고요.

당시 외국에 나가 있던 태진아 씨, 송대관 씨도 주현미 씨가 트로트 시장을 새롭게 문을 여니까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잘됐네요, 그러면.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 좋은 일이었는데요.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대학교 다닐 때는 발라드로 강변가요제에 나가셨잖아요.

-네.

-왜 트로트를 하시게 됐습니까?

-비 내리는 영동교가 전통가요고요.

또 쌍쌍파티라는 그 메들리 테이프 안에 수록된 노래가 전부 우리 옛 노래, 선배님들의 노래예요.

그리고 또 제가 처음 듣고 배우고 따라했던 노래가 트로트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미자 선생님의 동백아가씨가 제가 4살 때 1964년도에 정말 전국을 휩쓸었대요.

그런데 제가 그때 그 이미자 선배님의 동백아가씨를 듣고 따라 부르고 친정엄마한테 가르쳐드렸대요.

아기가.

모르겠어요, 이건 엄마 얘기니까.

-어릴 때는 그랬다고 치고.

대학생 때는 록발라드를 가지고 나가셨는데 혹시나.

저희보다 연배.

저희보다 조금 위시기는 한데 트로트는 뭔가 조금 저급하다, 뽕짝이다.

그런 게 좀 있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망설임 같은 게 없었습니까?

-네, 저는 그런 건 없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저한테 가르쳐준 노래들도 목포의 눈물이나 이런 노래들이어서 많이 친숙했고요.

글쎄요, 어떻게 보면 우리 트로트가 좀 저급하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어떤 작은 일부분일 수도 있고요.

정말 깊이 우리 서민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함께할 수 있는 노래는 우리 옛 가요들 아닐까 저는 생각을 해요.

-한국민의 정서와 국민들의 애환이라든가 그런 것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게 트로트다.

그 평가에는 동의를 하시는 겁니까?

-네.

그리고 제 목소리랑 제일 잘 맞는 장르 같아요.

-그렇죠.

음색이 뛰어나신데 본인이 제일 잘하는 게 트로트가수로서, 전통가요 얘기를 하시는데 전통가요에서 가장 잘 맞는 게 음색이라고 보세요.

아니면 특유의 아까 얘기했던 어떤 떨림,바이브레이션 또는 우리가 얘기하는 꺾기.

어떤 겁니까?

-그런데 어떤 것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 없는 것 같아요.

전부 다 같이 그게 조화롭게 소리도 그렇고 또 가지고 있는 그런 바이브레이션도 그렇고 또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감정 그런 것들도 함께 그게 섞여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대가수한테 이런 질문 드리는 게 좀 죄송스럽습니다마는.

오늘 모신다고 해서 월요일 날 우리 가요무대 나오시는 걸 제가 자세히 봤어요.

보면서 꺾기가, 소위 기교가 혹시나 죄송스러운 말씀인데 좀 지나친 게 아닌가, 노래를 담백하게 부르시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좀 가졌는데 어떻습니까?

-그런데 제 노래를 만약에 자세히 들어본다면 악보상에 없는 그런 테크닉은 정말 한두 군데예요.

그래서 정석으로 불러야지 된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이미지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요.

-저도 이미자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게 가슴에 와닿더라고요.

-맞아요.

너무 테크닉을 부리면, 노래를 듣는 사람도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래서 저는 어떻게 보면 그런 쪽으로 약간 억울한 게 제 목소리가 좀 약간 그렇게 좀 화려하다고 표현할까요.

그렇게 해서 기교같이 들리지만 그 음을 많이 꾸미지는 않거든요.

-일부러 기교를 부리시는 건 아니다.

-네.

그런 면에서는 조금.

맞아요, 깊이 생각할 부분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하셨던 수많은 히트곡들 잠깐 저희들이 들어보고 나서 말씀 좀 이어가도록 하시죠.

85년도 곡이죠.

-네, 신인상 받을 때예요.

-제가 옛날에 기억하기로는 좀 촌스러웠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지금 보니까 촌스럽다기보다는 아주독특한데요.

-감사합니다.

-이제 좀 세련돼지셨고.

-점점.

-그야말로 우리 한시대를 아주 풍미했던 노래들을 전부 쭉 해 오셨는데.

국민가수라는 별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아주 자연스러운, 그렇게 되셨어요.

그런데 저희가 기억하기로 처음 데뷔하실 때 초반에도 잠깐 얘기했습니다마는 약사 출신 가수다, 또 화교다.

그래 가지고 더 관심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런 수식어가 앞에 붙었었죠.

-지금 저 화면에 나오는 게 약사 하실 때.

-네, 맞아요.

-실제로 약국을 운영하셨죠?

-네.

-얼마나 하셨습니까?

-졸업하고 바로, 졸업하던 해에 84년도에 약국을 개업을 해서 비 내리는 영동교를 발표하고도 계속 했었어요, 9월달 정도까지.

-그랬습니까?돈은 좀 버셨습니까?

-약국 해서는 돈을 못 벌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약사가 가장 잘나가던 직업 중에 하나인데.

-맞아요.

그런데 저는 졸업하자마자 약국을 개업해서요.

그것도 경영인데 그 부분을 좀 못했어요.

-조금 전에 우리가 들었던 노래 중에 신사동 그 사람, 비 내리는 영동교.

-짝사랑도 들었어요.

-보면 당시에 영동 개발, 강남 개발 붐 이런 걸 탔던 시대상을 반영한 듯한 그런 분위기인데 혹시 그런 걸 의도하고 작사가 돼 있었던 걸까요?-아니요.

저는.

그러니까 저는 요즘 DJ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가요 평론가나 전문가 분들하고 인터뷰를 할 기회도 있고 그런데.

최근에 알았어요.

우리 가요가 시대를 반영하는 제일 어떻게 보면 그런 증거라고 할 수 있다고.

그래서 80년대 중반에 강남 개발 붐을 타고 그때 그래서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그 노래가 히트가 됐다고 그렇게들 풀이를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알았어요.

아, 그래서 시대를 참 잘 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작품을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하죠.

-말씀을 들어보면 참 하여튼 제가 말씀을 나누면서 조금 뭐라 그럴까, 제가 감동을 받았다 그럴까.

왜 이렇게 겸손하실까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데.

요즘 트로트 인기가 전과 같지 않아요.

그렇죠?

-맞아요.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는 정말 대단했었는데.

예를 들면 지역축제 같은 데도 여전히 주현미 씨는 바쁘시고 많이 가시겠지만 지역축제 같은 데서도 요즘은 아이돌그룹, 걸그룹들을 부른다.

최근에 들으니까 무슨 트로트 전문으로 하는 기획사가 문을 닫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랬어요.

-어떻게 보세요?이 분야를 어떻게 보면 중흥기를 새로 열었던 분으로서.

-안타깝죠.

그리고 사실 가요계 시장이 엄청 빨라졌어요, 텀이.

그러니까 신곡이 나오고 하루, 이틀 만에 음원차트를 점령을 해야지, 그래야지만 주목을 받고.

그러니까 후배들이 사실 활동하기가 더 각박해지고 경쟁도 더 많아진 거죠.

거기에 우리 트로트는 서민의 가요다 그래서 뭔가 주목도 덜 받게 되고 작품성 이런 것들도 아무튼 밀려나고 그러는데.

그러다 보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후배들이 발표하는 노래는 더 자극적이 되고 더 정말 말초적이게 되고 악순환인 것 같아요.

정말 안타까운 게 우리 선배님들이 남겨놓은 그런 아름다운 노래 그런 노래들이 점점 잊혀지고 세대가 변하면서 그런 정서도 공유할 수 없고.

세대간의 그런 벽 같은 게 느껴지면서 이건 정말 전할 수 없는 건가.

저도 사실 노래를 하면서 막막함이 있어요.

음악을 실제로 지금 하고 있는 후배들도 트로트는 어려워요, 선배님.

이렇게 얘기하는 후배들도 있어요.

-어렵습니까, 트로트가?

-저는 안 어렵죠.

저는 정말 공기처럼, 숨쉬는 것처럼쉽고 너무 정겹고 편안하고 한데.

그게 벌써 음악적으로도 세대하고의그런 단절이 오는 거 아닌가 아쉬워요.

-저도 팬의 한 명으로서 생각을 좀 해 보면 죄송한 말씀인데 바로 그 얘기를 하셨어요.

말초적으로, 성급하다 보니까 좀 더 자극적으로 다가가려고 하는데.

뭔가 감정을 표현을 할 때 좀 포장을 아름답게 해야 되는데 바로 다가가야 되고 뭘 하려다 보니까 자극적으로 하려다 보니까 포장을 다 벗기고 너무 원색적으로 단세포적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러면 오히려 더 말씀하신 대로 악순환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렇죠?

-네.

그래서 몇몇 후배들도 그렇게 안 가려고 노력을 많이 하죠.

문희옥 씨나 또 심지어는 장윤정 씨 같은 경우도 노래를 많이 가려서 발표를 하고 그런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후배가수 중에 신유 씨나 박구윤 씨 이런 분들.

그러니까 신인, 후배들한테 기대를 많이 해요.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우리의 정서를 좀 많이 반영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불러줬으면 하는 바람이죠.

-최근에 주현미 씨가 후배들하고 협업작업들을 많이 하시잖아요.

그렇죠?

-네.

-그런 것도 그런 일환의 하나죠?

-그랬어요.

음악 안에서마저 단절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후배들이 같이 작업을 하자고 그러면 장르를 불문하고 하겠다고 그러고 최선을 다해서 해 보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30주년 앨범은 사실 후배 작곡가들이 많이 도와줘서 그렇게 콜라보를 많이 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누가 이런 얘기까지 하더라고요.

너무 제가 좋은 얘기만 해 드려서 조금 저도 그렇기는 한데, 좋은 얘기니까 소개를 해 드리는 건데.

우리 사회에 어떻게 보면 세대간의 갈등도 심각한데 그런 면에서 바로 이런 후배가수들과 협업작업을 하면서 세대갈등 치유에도 앞장서고 계시다.

-저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간절해요.

어떤 때는 같은 공연을 하는데 후배들은 어려워하고 또 우리도 보면 뭔가 멋쩍고 괜히 고리타분해 보이는 것 같고.

그런데 무대에서만큼은 그런 단절이 없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런 어떤 그야말로 대중문화예술인의 최고 정상의 자리로서 영향력이 큰데 최근에는 다문화가정,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하나의 문제 부분들, 그 부분도 치유에 앞장서신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제가 솔선수범해서라기보다 저는 많이 좋은 이끌림을 받은 것 같아요.

라디오프로그램을 진행을 했었어요.

요즘 하고 있어요.

-요즘 하고 계시죠?

-네.

-KBS에서?

-해피FM인데요.

수도권 주파수는 106.1입니다.

-오전.

-11시부터.

-제목이?

-주현미의 러브레터예요.

-주현미의 러브레터.

-매일매일 만나고 있는데요.

-지금 나가고 있는 화면이네요.

오늘 오전에 방송했던 장면인가요?

-네, 맞아요.

매일매일 생방송 하려고 노력을 하고요.

오늘 오전에도.

-이 방송 이런 걸 통해서도 다문화가정을.

-네.

그래서 프로젝트 음반을 하나 발표를 했어요.

작곡가 열 분에게,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열 분에게 열 곡을 받아서 음반을 제작을 해서 그 음반 판매 수익금을 모두 다문화가정에게 기부하는 그런 앨범을 발표하고 될 수 있으면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데 성과는 많지는 않지만 그렇게 조금만 누구든지 시작을 조금조금씩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좋은 일 많이 하셨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 하나 좀 더 여쭤보겠습니다.

원래 화교시잖아요.

-네.

-귀화는 하셨습니까?

-그럼요.

결혼을 하면서 대한민국 국적 주민등록증 받았어요.

-저희들이 주현미 씨를 좋아하는 게 무대에서는 화려한 톱스타지만 가정을 아주 모범적으로 잘 꾸리신다고 해서 특히 칭송들이 자자한데.

-저는 그 얘기 나오면 부끄러운데.

-무대의 화려한 삶과 또 가정에서의 평범한 주부의 삶을 어떻게 조화하고 계세요?

-조화라기보다요.

-자연스러운 겁니까, 그냥?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정말 제가 가수이고 팬들의 사랑을 받은, 거기에 보답을 하는, 최선을 다하는 그런 노래하는 가수지만 무대가 끝나고 계단이 있잖아요.

무대 계단을 내려온 순간부터 저는 그냥 한 남자의 마누라고 아이들의 엄마고.

그러고 싶어요, 또.

-앞으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으세요?여전히 현역이시고 한창이신데.

-아무래도 대중가요 가수니까 계속 고전처럼 내려오는 우리 선배님들의 노래는 지킬 거고요.

또 이렇게 후배들하고 함께하는.

지금 이 노래는 빗속에서인데 역시 30주년 앨범에 수록된 노래인데 이렇게 후배 작곡가들, 음악 하는 친구들하고도 요즘 변하는.

유행가잖아요, 어차피 우리가 부르는 이 노래들이.

그래서 유행하는 그런 음악 패턴 이런 것도 불러보고요.

그럼으로써 제 노래를 사랑해 주시는 팬분들에게 이런 음악도 있다고 또 제가 중간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데뷔 30년 동안 정상의 자리에서 국민가수로서 여전히 현역으로서 정상을 꿋꿋이 지켜오고 있는 주현미 씨 모시고 여러 가지 말씀 재미있게 들어봤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음반 감사합니다.

잘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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