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현장 발굴 ‘연해주 독립운동’

입력 2015.01.10 (08:16) 수정 2015.01.1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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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남북통일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통일로 미래로입니다.

광복 70년을 맞아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져왔던 연해주 독립운동의 실상을 현지 취재로 살펴봤습니다.

이현정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건물입니다.

1908년 중국을 거쳐 넘어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곳입니다.

<녹취> “(이 (교육청) 건물이 언제 지어졌나요) 1902년 쯤 지어졌습니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중요한 거사를 설계합니다.

바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작전입니다.

당시 작전을 주도한 인물은 최재형 선생이었습니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1869년 열 살 때 연해주로 이주해 갑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인터뷰>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최재형 선생 없이는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 운동을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분의 활동은 대단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최재형 선생은 상당한 부호였던, 재산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안 의사는 거사를 위해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까지 최 선생의 집에 머물면서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최재형 선생의 딸이 남긴 기록에도 등장합니다.

<인터뷰> 최 발렌찐(최재형 선생 후손) : “내 자매 소냐와 함께 마당에서 놀고 있을 때 그것을 봤다. 안응칠(안중근 의사의 또다른 이름)은 하얼빈으로 떠났고 거기서 일본 관리(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러시아 극동 문서 보관소입니다.

이곳에서 취재진은 의미 있는 문서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1908년 작성된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보고서입니다.

당시 무장투쟁을 이끌던 이범윤 장군이 의병 4~50명과 함께 중국 훈춘으로 넘어갔고, 최재형 선생이 만 루블, 지금 가치로 수억 원을 군자금으로 제공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범윤 장군의 무장투쟁 동선과 최재형 선생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첫 사료입니다.

<인터뷰>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그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던 이범윤 장군에게 얼마의 돈을 구체적으로 지원해줬는가 이런 부분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떤 구체적인 자금 부분이 알려졌다는 사실은 보다 항일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면모를 하나하나 파악해나가는데 굉장히 귀중한 부분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최재형 선생은 1920년 국경을 넘어온 일본 군인들에 의해 연해주 자택에서 체포됐습니다.

<인터뷰> 김 발렌티나(문화센터 부회장) : “선생님은 내가 도망치면 너희들이 안 좋게 된다. 나쁘게 된다. 이렇게 말하고 혼자 이 문으로 나갔어요. 나가신 다음에 바로 잡혔어요, 일본 군인들한테.”

최근 확인된 최 선생의 처형 장소에서 후손이 제사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친 이상설 선생, 홍범도 장군의 항일 무장투쟁 역시 연해주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1920년 '4월 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독립운동가 색출 작전으로 항일 투쟁의 주 무대는 중국으로 옮겨갔고, 연해주의 독립 투쟁은 점차 잊혀졌습니다.

이 지역의 독립 운동이 주목받지 못한 데는 남북 분단도 한몫을 했습니다.

남한에선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사회주의 성향 탓에 소홀히 취급됐습니다.

<인터뷰>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 운동 세력은 일반적으로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대한민국은 대체적으로 민족주의 세력이 건국한 그런 나라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그동안 약간 주목을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북한 역시 김일성 중심으로 기술하다 보니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은 소외됐습니다.

이런 흐름은 최근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 대학교.

지난 2002년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가 세워졌던 곳이지만 그것을 아는 직원은 거의 없습니다.

<녹취> “(기념비가 있는 장소 아세요?) 아니요. 잘 모릅니다.”

물어물어 찾아가봤더니 기념비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3년 전 새로 부임한 대학 총장이 그 의미를 몰라 철거한 겁니다.

기념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동차로 2시간 떨어진 고려인 문화센터 뒷마당에 보관돼있습니다.

시청 창고에 방치돼있던 걸 그나마 교민들이 지난해 옮겨온 겁니다.

<인터뷰> 가리빅 블라디미르(문화센터 직원) : “차로 실어왔고 내리는 것을 제가 도왔습니다. 여기에 놓고 천막으로 덮었습니다.”

1909년 2월 안중근 의사가 11명의 동료들과 손가락을 자르며 독립의지를 다졌던 단지 동맹...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은 두 번이나 장소를 옮긴 끝에 별 의미도 없는 벌판에 자릴 잡았습니다.

그나마도 국내 한 기업체가 땅을 내주고 관리까지 맡으면서 이 정도라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비석에 적힌 날짜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음력 2월 7일, 양력으로는 26일이 정설이지만 비석에는 3월 5일로 새겨져 있습니다.

<녹취> 000대학교 사학과 교수 : “그 (보훈처) 담당자도 뭐가 뭔지 모르더라고요. KBS에서 저거 취재하니까 아마 위에서 ‘야 이거 어떻게 된거냐?’ 그래서 이제 저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담당자들 자체가 뭐가 뭔지 몰라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의 자택은 지난해 정부가 뒤늦게 매입에 나섰지만, 예산 문제로 잔금이 치러지지 않아 소유권 잡음이 일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변두리의 한 주택 단지입니다.

부엌 달린 방 하나가 전부인 아파트...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최재형 선생...

그 손자가 사는 곳입니다.

침대도 없이 소파에서 잠을 잘 정도로, 생활은 넉넉치 않아 보입니다.

<인터뷰> 최 발렌찐(최재형 선생 손자) : “인생의 막바지에서 결국 깨달은 것은 생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게 없습니다.”

최 선생이 일본군에게 총살된 뒤 자녀 11명 가운데 5명도 피살되거나 수용소 생활을 했을 정도로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 여파는 손자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 발렌찐 씨가 한 달여 전 국가보훈처에 보낸 서류입니다.

그동안 받아온 정부 지원금이 지난해 6월부터 갑자기 끊겨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호소문입니다.

해당되는 후손이 4명입니다.

<인터뷰> 최 발렌찐(최재형 선생 손자) : “생활비가 부족합니다. 지금 연금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훈처는 지연됐던 보상금이 최근 지급됐다면서도 제출서류 미비 탓으로 돌렸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5시간을 달려 도착한 오지 마을,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 얄라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홍범도 장군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합니다.

<인터뷰> 김얄라 할머니(홍범도 장군 외손녀) : “남의 떡을 얻어먹지 않겠다며 (생계를 위해) 현지 학교에서 야간 경비를 섰었지. 어느날 나를 안고 낮잠 주무시다가 그렇게 돌아가셨지.”

1960년 다시 연해주로 돌아온 김 할머니는 가축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 할머니는 남북으로 나뉜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습니다.

<인터뷰> 김얄라 할머니(홍범도 장군 외손녀) : “홍범도 장군이 북한과 남한을 서로 나누지 않고 한국 우리 한국 민족을 사랑했었고. 그렇게 한국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모두 한국을 위해서였습니다. 홍 장군은 항상 한국이 하나이길 원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으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은 후손들.

문제는 상당수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터뷰>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지금 현재 러시아,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이런 독립국가연합의 어떤 지역에 많이 살고 계십니다만 일단은 후손 파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아울러 그러한 어떤 장애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적절한 후원과 지원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광복 70년...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발굴하고 그 후손들에게 조국의 존재를 보여주는 일은 분단을 넘어 통일시대를 여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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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현장 발굴 ‘연해주 독립운동’
    • 입력 2015-01-10 07:50:54
    • 수정2015-01-10 08: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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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통일로 미래로입니다.

광복 70년을 맞아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져왔던 연해주 독립운동의 실상을 현지 취재로 살펴봤습니다.

이현정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건물입니다.

1908년 중국을 거쳐 넘어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곳입니다.

<녹취> “(이 (교육청) 건물이 언제 지어졌나요) 1902년 쯤 지어졌습니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중요한 거사를 설계합니다.

바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작전입니다.

당시 작전을 주도한 인물은 최재형 선생이었습니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1869년 열 살 때 연해주로 이주해 갑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인터뷰>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최재형 선생 없이는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 운동을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분의 활동은 대단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최재형 선생은 상당한 부호였던, 재산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안 의사는 거사를 위해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까지 최 선생의 집에 머물면서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최재형 선생의 딸이 남긴 기록에도 등장합니다.

<인터뷰> 최 발렌찐(최재형 선생 후손) : “내 자매 소냐와 함께 마당에서 놀고 있을 때 그것을 봤다. 안응칠(안중근 의사의 또다른 이름)은 하얼빈으로 떠났고 거기서 일본 관리(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러시아 극동 문서 보관소입니다.

이곳에서 취재진은 의미 있는 문서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1908년 작성된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보고서입니다.

당시 무장투쟁을 이끌던 이범윤 장군이 의병 4~50명과 함께 중국 훈춘으로 넘어갔고, 최재형 선생이 만 루블, 지금 가치로 수억 원을 군자금으로 제공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범윤 장군의 무장투쟁 동선과 최재형 선생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첫 사료입니다.

<인터뷰>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그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던 이범윤 장군에게 얼마의 돈을 구체적으로 지원해줬는가 이런 부분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떤 구체적인 자금 부분이 알려졌다는 사실은 보다 항일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면모를 하나하나 파악해나가는데 굉장히 귀중한 부분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최재형 선생은 1920년 국경을 넘어온 일본 군인들에 의해 연해주 자택에서 체포됐습니다.

<인터뷰> 김 발렌티나(문화센터 부회장) : “선생님은 내가 도망치면 너희들이 안 좋게 된다. 나쁘게 된다. 이렇게 말하고 혼자 이 문으로 나갔어요. 나가신 다음에 바로 잡혔어요, 일본 군인들한테.”

최근 확인된 최 선생의 처형 장소에서 후손이 제사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친 이상설 선생, 홍범도 장군의 항일 무장투쟁 역시 연해주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1920년 '4월 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독립운동가 색출 작전으로 항일 투쟁의 주 무대는 중국으로 옮겨갔고, 연해주의 독립 투쟁은 점차 잊혀졌습니다.

이 지역의 독립 운동이 주목받지 못한 데는 남북 분단도 한몫을 했습니다.

남한에선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사회주의 성향 탓에 소홀히 취급됐습니다.

<인터뷰>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 운동 세력은 일반적으로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대한민국은 대체적으로 민족주의 세력이 건국한 그런 나라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그동안 약간 주목을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북한 역시 김일성 중심으로 기술하다 보니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은 소외됐습니다.

이런 흐름은 최근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 대학교.

지난 2002년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가 세워졌던 곳이지만 그것을 아는 직원은 거의 없습니다.

<녹취> “(기념비가 있는 장소 아세요?) 아니요. 잘 모릅니다.”

물어물어 찾아가봤더니 기념비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3년 전 새로 부임한 대학 총장이 그 의미를 몰라 철거한 겁니다.

기념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동차로 2시간 떨어진 고려인 문화센터 뒷마당에 보관돼있습니다.

시청 창고에 방치돼있던 걸 그나마 교민들이 지난해 옮겨온 겁니다.

<인터뷰> 가리빅 블라디미르(문화센터 직원) : “차로 실어왔고 내리는 것을 제가 도왔습니다. 여기에 놓고 천막으로 덮었습니다.”

1909년 2월 안중근 의사가 11명의 동료들과 손가락을 자르며 독립의지를 다졌던 단지 동맹...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은 두 번이나 장소를 옮긴 끝에 별 의미도 없는 벌판에 자릴 잡았습니다.

그나마도 국내 한 기업체가 땅을 내주고 관리까지 맡으면서 이 정도라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비석에 적힌 날짜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음력 2월 7일, 양력으로는 26일이 정설이지만 비석에는 3월 5일로 새겨져 있습니다.

<녹취> 000대학교 사학과 교수 : “그 (보훈처) 담당자도 뭐가 뭔지 모르더라고요. KBS에서 저거 취재하니까 아마 위에서 ‘야 이거 어떻게 된거냐?’ 그래서 이제 저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담당자들 자체가 뭐가 뭔지 몰라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의 자택은 지난해 정부가 뒤늦게 매입에 나섰지만, 예산 문제로 잔금이 치러지지 않아 소유권 잡음이 일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변두리의 한 주택 단지입니다.

부엌 달린 방 하나가 전부인 아파트...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최재형 선생...

그 손자가 사는 곳입니다.

침대도 없이 소파에서 잠을 잘 정도로, 생활은 넉넉치 않아 보입니다.

<인터뷰> 최 발렌찐(최재형 선생 손자) : “인생의 막바지에서 결국 깨달은 것은 생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게 없습니다.”

최 선생이 일본군에게 총살된 뒤 자녀 11명 가운데 5명도 피살되거나 수용소 생활을 했을 정도로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 여파는 손자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 발렌찐 씨가 한 달여 전 국가보훈처에 보낸 서류입니다.

그동안 받아온 정부 지원금이 지난해 6월부터 갑자기 끊겨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호소문입니다.

해당되는 후손이 4명입니다.

<인터뷰> 최 발렌찐(최재형 선생 손자) : “생활비가 부족합니다. 지금 연금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훈처는 지연됐던 보상금이 최근 지급됐다면서도 제출서류 미비 탓으로 돌렸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5시간을 달려 도착한 오지 마을,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 얄라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홍범도 장군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합니다.

<인터뷰> 김얄라 할머니(홍범도 장군 외손녀) : “남의 떡을 얻어먹지 않겠다며 (생계를 위해) 현지 학교에서 야간 경비를 섰었지. 어느날 나를 안고 낮잠 주무시다가 그렇게 돌아가셨지.”

1960년 다시 연해주로 돌아온 김 할머니는 가축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 할머니는 남북으로 나뉜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습니다.

<인터뷰> 김얄라 할머니(홍범도 장군 외손녀) : “홍범도 장군이 북한과 남한을 서로 나누지 않고 한국 우리 한국 민족을 사랑했었고. 그렇게 한국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모두 한국을 위해서였습니다. 홍 장군은 항상 한국이 하나이길 원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으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은 후손들.

문제는 상당수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터뷰>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지금 현재 러시아,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이런 독립국가연합의 어떤 지역에 많이 살고 계십니다만 일단은 후손 파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아울러 그러한 어떤 장애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적절한 후원과 지원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광복 70년...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발굴하고 그 후손들에게 조국의 존재를 보여주는 일은 분단을 넘어 통일시대를 여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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