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내호리의 ‘특별한 이장님’

입력 2015.02.14 (08:19) 수정 2015.02.1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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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남북통일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통일로 미래로 ]입니다.

전남 신안의 한 섬마을에 가면 귀농 7년차의 탈북여성이 살고 있습니다.

탈북민 최초의 이장님이 밝힌 ‘북한여성 농촌 정착 이야기’... 이현정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1004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어 ‘천사의 섬’이라 불린다는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로 30분, 안좌면 내호리로 향하는데요.

이곳엔 조금 특별한 이장님이 살고 있습니다.

바쁜 농사철을 보내고 맞은 농한기지만, 이장님은 오늘도 출동인데요.

<녹취> "큰 엄마 빨리 나와, 형님은 할 필요 없고. 큰 엄마는 화투 쳐, 화투 치고..."

첫 일과는 폐가에 남겨진 이불이나 헌옷을 수거하는 겁니다.

<녹취> "노인네들 정신없어 이런데다 돈 넣을 수도 있어."

<녹취> "아이들이 다 봤을 거예요, 엄마."

수거가 끝나자 바로 이동, 맛있게 익어가는 두부와 간장이 잘 배어가는 메추리알 조림까지.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식사 준비로 엉덩이를 붙일 시간도 없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을 위해 준비한 도시락은 40개.

이렇게 4가지 반찬을 준비해 매주 부녀회원들과 함께 혼자 사는 노인들을 찾아갑니다.

발걸음 재촉하는 최초의 탈북민 이장 이정옥 씨.

올해로 농촌생활 7년차인 그녀는 남한 사람도 어렵다는 귀농 성공에 이어, 지난해부터는 내호리를 대표하는 이장으로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나도 북에 있을 때 엄마, 아버지한테 못하고 엄마, 아버지를 보낸 것. 그 아쉬움 때문에라도 솔직히 노인네들한테 더 잘해주고 싶고."

도시락을 기다릴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습니다.

<인터뷰> 이금례(안좌면 주민 72세) : "우리는 그냥 먹는 거 영양 가치 제대로 못 챙겨 먹어요. 근데 가끔 이렇게 해서 가져오면 영양 가치가 되잖아요. 중간 중간에 찾아 주셔서."

<녹취> “왜 그래”

머리를 내밀며 주인을 반기는 한우 50여 마리.

봉사를 마치고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들을 챙기는 것인데요.

비싼 비료 대신 퇴비를 얻기 위해 시작한 소 사육은 다섯 마리로 시작해 이젠 대식구를 이뤘습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송아지가 낳아서 그 송아지가 커서 새끼를 또 낳고, 또 낳고 해서. 봄에 한 20마리를 냈어(팔았어)."

사료 값 대기가 만만찮은 부담이지만 늘어나는 소 식구들을 보면 마음만은 든든하다는 이장님.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금방 낳았을 땐 엄청 예쁜데. 조금 크게 되면 또 엄청 못생겨져, 얘들은.”

소들이 못생겼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한 마리, 한 마리 손길이 닿지 않은 녀석이 없습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머리 내놓고 이렇게 (사료) 먹을 때는 딱 군대 같지. 모든 것을 난 군대(용어)로 표현한다고 우리 신랑이 우습다고 그래.”

북한군에서 대대장에 올라 외화벌이까지 나섰던 엘리트 출신 이장님.

지금은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영락없는 농사꾼이 되었지만 언제나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장님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농기계 운전.

키 보다 훨씬 높은 트랙터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데요.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신랑이 하는 거 보고 조금 했더니 이제 신랑이 막 부려먹는다고. 트랙터 이런 거랑 싹 다하지."

농한기에도 농사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일등농군의 자세, 틈틈이 농기계를 운행함으로써 고장을 미리 방지합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그런 (농사용) 기계는 다 운전해야 해. 그러니까 운전 안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지금 같은 일등 농군, 만능 이장님이 되기까지 고충도 적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이장을 처음 할 때부터 북한 사람이라는 문제 앞에서, 이것은 사실 병원에 가서 어디 아파서 약을 처방해 먹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다시 남한의 대도시에서 농촌으로.

탈북자라는 꼬리표는 떨어질 줄 모르고 이장님을 괴롭혔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힘든 장벽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지금은 다른 탈북자들의 귀농 준비까지 돕고 있습니다.

<녹취> “왔네요.” “반갑습니다.”

살기 위해 남한으로 왔다가 귀농을 선택한 또 한 명의 농사꾼, 임철익 씨가 이장님을 찾았습니다.

그 역시 실패를 거듭하며 애지중지 키운 작물들을 숱하게 버리기도 했는데요.

<녹취> "(이거 좋다.) 이건 선별했단 말이에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요.

임씨는 끈질긴 도전 끝에 드디어 첫 결실을 얻었습니다.

농사 시작 3년 만에 첫 수확을 본 콩.

오늘은 그 귀한 콩으로 메주를 쑤는 날입니다.

<녹취> "다 됐어, 저거 한 번 저어놔. (저것만 저어 놓으면 될까요?) 아, 이거 멋있네."

작물과 땅 선정을 잘못해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녹취> "지금 또 다른 것을 배웠어. 콩 심어서 어떻게 할까하고 고민하다가 메주가 됐고, 메주를 쑤어 놓고 나면 된장이 되고. (그렇지.)"

남한 생활에 적응하랴 농사일을 배우랴 정신없던 날들도 이젠 옛 일이 됐습니다.

<인터뷰> 임철익(탈북 농민) : "아무래도 농사도 사업이니까요. 하면서 모르는, 우리는 잘 모르지만 미리 전에 했던 사람들은 하우가 있으니까. 많이 공유가 되니까, 많이 도움이 되죠."

지난해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탈북민을 위한 다양한 영농정착 지원을 추진하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는데요.

도시 대신 농촌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 탈북민들.

농한기가 지나고 맞이할 올해 농사철에는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이제 설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는데요.

북한에서도 설은 성대한 민속명절로 꼽히고 있습니다.

평양의 세쌍둥이가 부르는 ‘설날은 좋아’라는 동요 화면을 보면서 오늘 남북의 창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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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내호리의 ‘특별한 이장님’
    • 입력 2015-02-14 08:37:58
    • 수정2015-02-14 08: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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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남북통일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통일로 미래로 ]입니다.

전남 신안의 한 섬마을에 가면 귀농 7년차의 탈북여성이 살고 있습니다.

탈북민 최초의 이장님이 밝힌 ‘북한여성 농촌 정착 이야기’... 이현정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1004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어 ‘천사의 섬’이라 불린다는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로 30분, 안좌면 내호리로 향하는데요.

이곳엔 조금 특별한 이장님이 살고 있습니다.

바쁜 농사철을 보내고 맞은 농한기지만, 이장님은 오늘도 출동인데요.

<녹취> "큰 엄마 빨리 나와, 형님은 할 필요 없고. 큰 엄마는 화투 쳐, 화투 치고..."

첫 일과는 폐가에 남겨진 이불이나 헌옷을 수거하는 겁니다.

<녹취> "노인네들 정신없어 이런데다 돈 넣을 수도 있어."

<녹취> "아이들이 다 봤을 거예요, 엄마."

수거가 끝나자 바로 이동, 맛있게 익어가는 두부와 간장이 잘 배어가는 메추리알 조림까지.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식사 준비로 엉덩이를 붙일 시간도 없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을 위해 준비한 도시락은 40개.

이렇게 4가지 반찬을 준비해 매주 부녀회원들과 함께 혼자 사는 노인들을 찾아갑니다.

발걸음 재촉하는 최초의 탈북민 이장 이정옥 씨.

올해로 농촌생활 7년차인 그녀는 남한 사람도 어렵다는 귀농 성공에 이어, 지난해부터는 내호리를 대표하는 이장으로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나도 북에 있을 때 엄마, 아버지한테 못하고 엄마, 아버지를 보낸 것. 그 아쉬움 때문에라도 솔직히 노인네들한테 더 잘해주고 싶고."

도시락을 기다릴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습니다.

<인터뷰> 이금례(안좌면 주민 72세) : "우리는 그냥 먹는 거 영양 가치 제대로 못 챙겨 먹어요. 근데 가끔 이렇게 해서 가져오면 영양 가치가 되잖아요. 중간 중간에 찾아 주셔서."

<녹취> “왜 그래”

머리를 내밀며 주인을 반기는 한우 50여 마리.

봉사를 마치고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들을 챙기는 것인데요.

비싼 비료 대신 퇴비를 얻기 위해 시작한 소 사육은 다섯 마리로 시작해 이젠 대식구를 이뤘습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송아지가 낳아서 그 송아지가 커서 새끼를 또 낳고, 또 낳고 해서. 봄에 한 20마리를 냈어(팔았어)."

사료 값 대기가 만만찮은 부담이지만 늘어나는 소 식구들을 보면 마음만은 든든하다는 이장님.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금방 낳았을 땐 엄청 예쁜데. 조금 크게 되면 또 엄청 못생겨져, 얘들은.”

소들이 못생겼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한 마리, 한 마리 손길이 닿지 않은 녀석이 없습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머리 내놓고 이렇게 (사료) 먹을 때는 딱 군대 같지. 모든 것을 난 군대(용어)로 표현한다고 우리 신랑이 우습다고 그래.”

북한군에서 대대장에 올라 외화벌이까지 나섰던 엘리트 출신 이장님.

지금은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영락없는 농사꾼이 되었지만 언제나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장님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농기계 운전.

키 보다 훨씬 높은 트랙터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데요.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신랑이 하는 거 보고 조금 했더니 이제 신랑이 막 부려먹는다고. 트랙터 이런 거랑 싹 다하지."

농한기에도 농사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일등농군의 자세, 틈틈이 농기계를 운행함으로써 고장을 미리 방지합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그런 (농사용) 기계는 다 운전해야 해. 그러니까 운전 안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지금 같은 일등 농군, 만능 이장님이 되기까지 고충도 적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정옥(탈북 이장님) : "이장을 처음 할 때부터 북한 사람이라는 문제 앞에서, 이것은 사실 병원에 가서 어디 아파서 약을 처방해 먹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다시 남한의 대도시에서 농촌으로.

탈북자라는 꼬리표는 떨어질 줄 모르고 이장님을 괴롭혔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힘든 장벽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지금은 다른 탈북자들의 귀농 준비까지 돕고 있습니다.

<녹취> “왔네요.” “반갑습니다.”

살기 위해 남한으로 왔다가 귀농을 선택한 또 한 명의 농사꾼, 임철익 씨가 이장님을 찾았습니다.

그 역시 실패를 거듭하며 애지중지 키운 작물들을 숱하게 버리기도 했는데요.

<녹취> "(이거 좋다.) 이건 선별했단 말이에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요.

임씨는 끈질긴 도전 끝에 드디어 첫 결실을 얻었습니다.

농사 시작 3년 만에 첫 수확을 본 콩.

오늘은 그 귀한 콩으로 메주를 쑤는 날입니다.

<녹취> "다 됐어, 저거 한 번 저어놔. (저것만 저어 놓으면 될까요?) 아, 이거 멋있네."

작물과 땅 선정을 잘못해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녹취> "지금 또 다른 것을 배웠어. 콩 심어서 어떻게 할까하고 고민하다가 메주가 됐고, 메주를 쑤어 놓고 나면 된장이 되고. (그렇지.)"

남한 생활에 적응하랴 농사일을 배우랴 정신없던 날들도 이젠 옛 일이 됐습니다.

<인터뷰> 임철익(탈북 농민) : "아무래도 농사도 사업이니까요. 하면서 모르는, 우리는 잘 모르지만 미리 전에 했던 사람들은 하우가 있으니까. 많이 공유가 되니까, 많이 도움이 되죠."

지난해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탈북민을 위한 다양한 영농정착 지원을 추진하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는데요.

도시 대신 농촌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 탈북민들.

농한기가 지나고 맞이할 올해 농사철에는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이제 설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는데요.

북한에서도 설은 성대한 민속명절로 꼽히고 있습니다.

평양의 세쌍둥이가 부르는 ‘설날은 좋아’라는 동요 화면을 보면서 오늘 남북의 창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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