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따라잡기] ‘세월호 의인’ 김동수 씨 자해…왜?

입력 2015.03.24 (08:10) 수정 2015.03.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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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멘트>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소방호수를 몸에 묶고 10여 명을 구조해 낸 화물차 운전기사 김동수 씨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려 애쓰던 모습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런 김 씨가 며칠 전 자신의 집에서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년을 끔찍한 고통에 속에 살아왔다는 김 씨.

오늘 뉴스따라잡기는 세월호 1주년을 앞두고, 여전히 진행 중인 생존자들의 고통과 사회적 무관심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취재팀이 소식을 듣고 달려간 곳은 제주도의 한 바닷가 마을입니다.

세월호 의인으로 불렸던 김동수 씨의 집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긴 건, 지난 19일 저녁.

<녹취> 김동수 씨 아내 (음성변조) : "(일 끝나고) 만나기로 했었거든요. 안 오니까 (전화했는데) (딸이) 아빠가 휴대전화 놓고 갔다고. 그런데 남편이 제 앞에다 (써 놓고) 보내지 않은 문자가 있었나 봐요. ‘사랑하는 가족들 미안하다’. 그때 이제 제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아빠 찾아봐라."

다행히 딸에 의해 집안 화장실에서 발견된 김 씨.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녹취> 소방 관계자 (음성변조) : "(신고 내용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흉기로 손목하고 팔뚝을 자해 하셨다."

김 씨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

하지만 가장의 이런 극단적인 행동에 가족들은 받은 충격은 컸습니다.

<녹취> 김동수 씨 아내(음성변조) :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본인이 종교도 있고, 어떤 그런 목숨에 대해서 이런 것을 섣불리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김 씨는 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을까.

지난해 4월 16일... 검푸른 바닷속으로 하염없이 침몰해가던 세월호.

소방호수를 몸에 감은 채 안간힘을 쓰며 홀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이 사람.

바로 김동수 씹니다.

선체 대부분이 물에 잠긴 상황에서도 탈출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끝까지 구조에 앞장섰던 김씨.

사람들은 그런 김 씨를 ‘파란바지의 의인’ ‘구조영웅’으로 불렀습니다.

생존학생들은 물론 멀리 미국에서도 김 씨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녹취> 김동수 씨 아내(음성변조) : "남편이 호스 잡아당기는 영상을 보면서 자랑스럽죠. 솔직히 자랑스럽죠. 뉴스에 나왔을 때도 정말 자랑스럽고, 기분도 정말 좋았고, 사람들이 알아봐 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정작 김 씨는 그날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누구보다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던 김 씨였지만, 갑자기 몸 곳곳에 이유 없는 통증을 호소하고, 간단한 일을 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마음도 약해졌습니다.

<녹취> 김동수씨 아내 (음성변조) : "주전자 물을 따르는데, 물을 못 따르는 거예요. 물을 쏟아가지고 덜덜덜. 손 마디마디, 머리가 아프다고. 자기는 온 몸이 아파 죽겠는데, X-ray 찍고, MRI 찍어 봐도 아무 이상이 없잖아요. 제가 참 답답한 것이 이것이 어디 몸이 부러진 것이면 가서 치료하면 좋겠는데, 남 보기엔 멀쩡해 보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온종일 집에서만 머무는 날도 많아진 김 씨.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녹취> 김동수 씨 아내(음성변조) : "잠깐이더라고요. 의인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은요. 집에 와서 일상으로 돌아오니까 그때부터 이제 현실에 부딪히는 것이죠. 하나하나씩."

빠듯한 월급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아내.

그나마, 세월호 긴급생계비로 지원되던 100여만 원의 지원금마저 지난해 12월에 끊기면서, 큰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녹취> 김동수 씨 아내(음성변조) : "아이들 커가니까 빨리 (돈 벌어서) 빚도 갚고, (화물차) 할부금도 갚고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면 누구보다 든든한 가장이었던 김 씨가 왜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걸까?

취재팀은 오랜 기다림 끝에, 김 씨를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김 씨는 많이 안정을 찾은 듯 했는데요,

자신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며, 말문을 열기 시작한 김 씨.

김 씨의 머릿속을 여전히 가득 채우고 있던 건, 세월호 참사 그날의 악몽이었습니다.

<인터뷰> 김동수 씨 : "(세월호 참사) 그것을 어떻게 잊습니까. 잊을 수가 없죠. 당연히 죄인이죠. 저는 거기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저만 빠져나온 거잖아요. 살아나온 거잖아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겪은 정신적 충격과 눈앞에서 구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그래도 가장이기 때문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려 애써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김동수 씨 : "(예전에는) 아빠로든 떳떳한 남편으로든 부끄럽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몸도 말을 안 듣고, 그냥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하고, 아무것도 솔직히 못하고요."

정신적 혼란과 함께 찾아온 경제적 어려움은 김 씨 가족을 더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생계수단이었던 화물차는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빠져버렸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상황.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돌아온 답은 ...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인터뷰> 김동수 씨 : "국회도 갔다 왔었고, 해수부에도 계속 전화했고, (나중에) 보상이 나올 거니까 (우리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라도 주라고 (했는데) 안 된다."

생계가 달린 절박한 문제였지만, 오히려 '세월호 의인'이 돈을 바란다는 악성 댓글에까지 시달려야했습니다.

<녹취> 김동수 씨 아내 (음성변조) : "가족이 살아갈만한 것을 해달라는 것인데, 마치 그것이 무슨 의로운 일을 해서 나라에 바라는 것처럼 비추어지는 그런 것이 제일 속상해요."

우왕좌왕 하기만 했던, 최악의 참사 현장에서 10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의인.

하지만 그 의인이 지금 정신적 충격과 생활고, 그리고 악성 댓글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1주년. 우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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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따라잡기] ‘세월호 의인’ 김동수 씨 자해…왜?
    • 입력 2015-03-24 08:17:34
    • 수정2015-03-24 09: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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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소방호수를 몸에 묶고 10여 명을 구조해 낸 화물차 운전기사 김동수 씨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려 애쓰던 모습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런 김 씨가 며칠 전 자신의 집에서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년을 끔찍한 고통에 속에 살아왔다는 김 씨.

오늘 뉴스따라잡기는 세월호 1주년을 앞두고, 여전히 진행 중인 생존자들의 고통과 사회적 무관심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취재팀이 소식을 듣고 달려간 곳은 제주도의 한 바닷가 마을입니다.

세월호 의인으로 불렸던 김동수 씨의 집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긴 건, 지난 19일 저녁.

<녹취> 김동수 씨 아내 (음성변조) : "(일 끝나고) 만나기로 했었거든요. 안 오니까 (전화했는데) (딸이) 아빠가 휴대전화 놓고 갔다고. 그런데 남편이 제 앞에다 (써 놓고) 보내지 않은 문자가 있었나 봐요. ‘사랑하는 가족들 미안하다’. 그때 이제 제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아빠 찾아봐라."

다행히 딸에 의해 집안 화장실에서 발견된 김 씨.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녹취> 소방 관계자 (음성변조) : "(신고 내용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흉기로 손목하고 팔뚝을 자해 하셨다."

김 씨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

하지만 가장의 이런 극단적인 행동에 가족들은 받은 충격은 컸습니다.

<녹취> 김동수 씨 아내(음성변조) :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본인이 종교도 있고, 어떤 그런 목숨에 대해서 이런 것을 섣불리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김 씨는 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을까.

지난해 4월 16일... 검푸른 바닷속으로 하염없이 침몰해가던 세월호.

소방호수를 몸에 감은 채 안간힘을 쓰며 홀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이 사람.

바로 김동수 씹니다.

선체 대부분이 물에 잠긴 상황에서도 탈출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끝까지 구조에 앞장섰던 김씨.

사람들은 그런 김 씨를 ‘파란바지의 의인’ ‘구조영웅’으로 불렀습니다.

생존학생들은 물론 멀리 미국에서도 김 씨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녹취> 김동수 씨 아내(음성변조) : "남편이 호스 잡아당기는 영상을 보면서 자랑스럽죠. 솔직히 자랑스럽죠. 뉴스에 나왔을 때도 정말 자랑스럽고, 기분도 정말 좋았고, 사람들이 알아봐 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정작 김 씨는 그날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누구보다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던 김 씨였지만, 갑자기 몸 곳곳에 이유 없는 통증을 호소하고, 간단한 일을 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마음도 약해졌습니다.

<녹취> 김동수씨 아내 (음성변조) : "주전자 물을 따르는데, 물을 못 따르는 거예요. 물을 쏟아가지고 덜덜덜. 손 마디마디, 머리가 아프다고. 자기는 온 몸이 아파 죽겠는데, X-ray 찍고, MRI 찍어 봐도 아무 이상이 없잖아요. 제가 참 답답한 것이 이것이 어디 몸이 부러진 것이면 가서 치료하면 좋겠는데, 남 보기엔 멀쩡해 보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온종일 집에서만 머무는 날도 많아진 김 씨.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녹취> 김동수 씨 아내(음성변조) : "잠깐이더라고요. 의인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은요. 집에 와서 일상으로 돌아오니까 그때부터 이제 현실에 부딪히는 것이죠. 하나하나씩."

빠듯한 월급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아내.

그나마, 세월호 긴급생계비로 지원되던 100여만 원의 지원금마저 지난해 12월에 끊기면서, 큰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녹취> 김동수 씨 아내(음성변조) : "아이들 커가니까 빨리 (돈 벌어서) 빚도 갚고, (화물차) 할부금도 갚고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면 누구보다 든든한 가장이었던 김 씨가 왜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걸까?

취재팀은 오랜 기다림 끝에, 김 씨를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김 씨는 많이 안정을 찾은 듯 했는데요,

자신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며, 말문을 열기 시작한 김 씨.

김 씨의 머릿속을 여전히 가득 채우고 있던 건, 세월호 참사 그날의 악몽이었습니다.

<인터뷰> 김동수 씨 : "(세월호 참사) 그것을 어떻게 잊습니까. 잊을 수가 없죠. 당연히 죄인이죠. 저는 거기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저만 빠져나온 거잖아요. 살아나온 거잖아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겪은 정신적 충격과 눈앞에서 구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그래도 가장이기 때문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려 애써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김동수 씨 : "(예전에는) 아빠로든 떳떳한 남편으로든 부끄럽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몸도 말을 안 듣고, 그냥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하고, 아무것도 솔직히 못하고요."

정신적 혼란과 함께 찾아온 경제적 어려움은 김 씨 가족을 더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생계수단이었던 화물차는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빠져버렸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상황.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돌아온 답은 ...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인터뷰> 김동수 씨 : "국회도 갔다 왔었고, 해수부에도 계속 전화했고, (나중에) 보상이 나올 거니까 (우리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라도 주라고 (했는데) 안 된다."

생계가 달린 절박한 문제였지만, 오히려 '세월호 의인'이 돈을 바란다는 악성 댓글에까지 시달려야했습니다.

<녹취> 김동수 씨 아내 (음성변조) : "가족이 살아갈만한 것을 해달라는 것인데, 마치 그것이 무슨 의로운 일을 해서 나라에 바라는 것처럼 비추어지는 그런 것이 제일 속상해요."

우왕좌왕 하기만 했던, 최악의 참사 현장에서 10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의인.

하지만 그 의인이 지금 정신적 충격과 생활고, 그리고 악성 댓글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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