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부치지 못한 편지…“죽어서라도”

입력 2015.07.11 (07:49) 수정 2015.07.1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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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남북 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입니다.

남북 경색이 길어지면서 누구보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북녘의 가족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고령의 이산가족들인데요,

최근에 기다리다 못해 가족들에게 영상편지를 쓰거나, 사후에 대비해 자신의 유전자를 채취해 남기시는 분들이 크게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슈앤 한반도>, 이번 주에는 송지현 리포터가 고령의 이산가족들을 만나 이산가족 문제 해법 들어봤습니다.

<리포트>

<녹취> 조병일(82/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 "네가 이북에서 아들딸 남매 셋 모두 낳았다고 하는데 얼마나 부모 없이 고생이 많았겠는지 상상이 되는구나."

<녹취> 최기호(80/황해도 서흥군 출신) : "어디에 묻혀있는지 그거만이라도 좀 알아서 한번, 묘가 있으면 묘를 봐서라도 제 소원이 풀어질 것 같습니다."

북녘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이산가족들의 영상편집니다.

언제 부쳐질지 기약조차 없지만 헤어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절함이 가득합니다.

1.4 후퇴 때 홀로 황해도 고향을 떠나온 84살 변연숙 할머니.

64년 전, 동생들의 손을 놓아야만 했던 그 순간이 지금도 평생의 한으로 맺혔습니다.

<녹취> 변연숙(84/황해도 출신) : "쫓아 나간다고 막 그러더라고. 그 때 그럴 때 그냥 같이 데리고 나왔으면, 내가 나왔으니까 그게 막 후회가 되더라고. 그나마도 하나 데리고 나왔으면 좋을 텐데."

죽은 뒤라도 혹시 동생이 볼 수 있지 않을까, 간절한 마음으로 영상편지를 보내봅니다.

<녹취> "경숙아! 순식아! 너희들도 살아있겠지? 이렇게 보고 싶어 죽겠다..."

적십자사는 이산가족 고령화에 따라 올해 말까지 이산가족 만 명을 상대로 영상 편지를 추가로 제작합니다.

<녹취> 김성근(대한적십자사 국제남북국장) : "가능한 북쪽하고 협의가 잘 돼서 많은 분들의 영상편지가 전달될 수 있게끔 하겠다는 게 저희 목표이고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나중에 돌아가시더라도 그 가족 분들에게 통일 이후에라도 전달할 수 있게끔 하자라는 게 저희 목표입니다."

이른 아침, 서울의 한 주택가.

강진선 할아버지 댁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녹취> 적십자사 관계자이산가족 : "유전자 검사 신청하셔서 유전자 검사하러 왔습니다."

강 할아버지가 유전자 검사를 신청한 건 북에 두고 온 아들과 여동생 때문입니다.

<녹취> 적십자사 관계자 : "지금 바로 검사 하실 텐데요. 처음 하실 검사는 모발 검사고요."

채취된 유전자 정보는 이산가족 1세대가 숨진 뒤에도 헤어진 가족을 찾고, 상속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게 됩니다.

지난해 처음 천2백 명에 이어, 올해 추가로 만 명의 유전자 정보를 채취해 보관할 예정입니다.

<녹취> 정재은(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 과장) : "이렇게 채취된 시료하고 그리고 여기서 추출한 DNA 정보를 같이 통일부 유전자 정보 데이터베이스에 보관을 하고요."

어느덧 구순을 넘긴 나이, 여전히 풀지 못한 이산의 한은 할아버지의 가장 큰 고통으로 남아있습니다.

<녹취> 강진선(92/유전자 검사 신청자 어머니) : "생전에 풀 한포기 뜯어주지 못하는 심정이야 먹고살고 목숨이 붙어서 숨을 쉬니까 사는 거지, 그 마음 비할 데가 없습니다."

이산가족의 고령화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2만 9천여 명, 해마다 평균 3천8백여명이 세상을 뜨고 있고 생존자는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나마 생존자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70대 이상의 고령자들입니다.

김옥희 할머니는 요즘도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가슴이 뜁니다.

혹시 북에 두고 온 딸 소식은 아닐까, 기다리고 실망하길 수십 년 쨉니다.

<녹취> 김옥희(88/황해도 용천면 출신) : "전화해 봐도 (이산가족 상봉) 차례가 안 온다길래 기다리고 있는 거지. 맨날 이날저날 기다리기만 하는 거지."

어릴 때 유난히 예쁘고 하얬던 큰딸 순복이.

네 살 때 본 게 마지막이지만 그래도 다시 만나기만 하면 금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녹취> 김옥희(88)/황해도 용천면 출신) : "피난 나와서 10년 그렇게 될 때는 만나기만 하면 그저 얼굴도 생생하고 딱 안다 했는데, 이젠 얼굴까지 희미해지고. 만나면 그래도 아는 거야, 만나면. 자기 자식이고 부모니까 다 만나면 알 수가 있는데..."

언니와 떨어져 엄마 등에 업혀 내려온 순애 씨는 언니를 생각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녹취>김순애(67/김옥희 할머니 둘째 딸) : "언니는 나 때문에 못 나온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나까지도 못 만나고 죽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요. 그래서 엄마 살아있을 때, 엄마가 건강하니까 만났으면 좋겠어요."

<녹취> 김옥희(88/황해도 용천면 출신) : "한 번이라도 죽기 전에 만나서 고생한 얘기 다 들어보고 만났으면 죽어도 한이 없는데 이제 뭐, 언제 만날 수는 없는 거고 죽은 다음에라도 다 형제들 간은 만나서 찾아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점차 실망에서 절망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까지의 방식이 계속될 경우 전체 이산가족 상봉에 무려 520년이 걸릴 거라는 끔찍한 계산도 가능한데요,

이산가족 문제 해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윱니다.

남북의 이산가족 상봉이 본격화된 건 지난 2000년부텁니다.

그동안 총 19차례의 대면상봉, 그리고 7차례의 화상상봉이 진행돼 2만 2천여 명이 헤어진 혈육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가족 기준으로는 2천 2백여 가족, 상봉 신청자의 불과 1.5%만이 재회의 꿈을 이뤘을 뿐입니다.

잘 돼야 일 년에 한 두 차례, 그것도 한 번에 고작 100명 정도씩만 만나는 방식으로는 언제 기회가 올 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나마 남북관계 악화로 2010년 11월 이후엔 단 한 차례만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인터뷰> 김수암(통일연구원 연구위원) : "부분적인 어떤 횟수를 제한한 형태의 상봉이나 서신교환으로서는 이산가족 분들의 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최우선적인 방법은 전면적인 생사확인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면적인 생사확인이 이뤄진다고 한다 그러면 그 전면적인 생사확인을 토대로 해서 수시로 서신교환을 할 수 있고 또 수시로 상봉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산가족 분들의 어떤 한을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팔순의 홍종호 할아버지는 아래윗집에서 친형제처럼 지냈던 세 조카를 찾고 있습니다.

<녹취> 홍종호(80/황해도 개풍군 출신) : "만나고 싶은 사람은 홍용희, 홍순부, 홍순모입니다."

<녹취> 홍종호(80/황해도 개풍군 출신) : "인사도 없고, 할 겨를도 없고 포탄 소리 막 나지 기차는 그게 마지막 기차라지, 그러니까 뭐 그냥 허겁지겁 나오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헤어진 거죠."

행여 기회가 올까, 가족들의 이름을 다 넣어 상봉 신청을 했지만 한 번도 추첨 명단에 들지 못했습니다.

<녹취> 홍종호(80/황해도 개풍군 출신) : "죽기 전에 한번 꼭 만나서 하고 싶은 말 하고, 사람 하나 만나서 그동안 한평생을 피난민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는데 마지막으로 핏줄이라곤 그 사람밖에, 그 저기밖에 없어."

최병현 씨 부부의 하루 일과는 사진으로나마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걸로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65년 전,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됐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보지 못한 채 5년 전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녹취> 최병현(70/이산가족) : "저희도 네 번을 신청했어요. 처음에 경찰에 했다가 그 다음에 통일부에 했다가 그 다음에 배우자가 신청하는 게 우선이라고 그래서 우리 어머니 이름으로 또 했다가 어머니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또 이제 제 이름으로 신청해서 네 번을 신청을 했죠."

얼마 전에는 유전자 검사도 신청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통일이 되면 자식들이라도 할아버지를 찾으라는 바람 때문입니다.

<녹취> 최병현(70/이산가족) : "거기서 또 자손을 뒀다면 그 자손들은 그래도 살아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렇게 연결이 되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디 뭐 묻히신 것도 알 테고. 거기서 유전자가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틀림없다는 증명이 될 게 아니겠어요."

어느덧 분단의 세월도 70년, 이산가족 상봉은 이제 어떤 이유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천륜의 문제가 됐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남북 모두의 특단의 조치, 결단이 필요합니다.

<녹취> 홍종호(80/황해도 개풍군 출신) : "이제는 그립고 보고 싶고 그 한 밖에 안 남았어요. 그러면 우리 여기에서도 한은 풀어줘야 할 거 아니냐 이거에요. 뭐 다른 걸로 자꾸 (남과 북이) 싸우지 말고.. 그래도 보고 싶은 사람이나 볼 수 있게 그거는 최소한 해줘야 되지 않겠냐 이 얘기에요."

<녹취> 최병현(70/이산가족) : "아버님, 제가 생전 처음 인사를 올립니다. 다섯 살 때 헤어진 아들이 지금 70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어디서 어떻게 사셨는지 참 궁금하지만 어떻게 찾아뵐 방법이 없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생존해 계신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부디 부디 강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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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한반도] 부치지 못한 편지…“죽어서라도”
    • 입력 2015-07-11 08:17:29
    • 수정2015-07-14 19:08:06
    남북의 창
<앵커 멘트>

남북 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입니다.

남북 경색이 길어지면서 누구보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북녘의 가족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고령의 이산가족들인데요,

최근에 기다리다 못해 가족들에게 영상편지를 쓰거나, 사후에 대비해 자신의 유전자를 채취해 남기시는 분들이 크게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슈앤 한반도>, 이번 주에는 송지현 리포터가 고령의 이산가족들을 만나 이산가족 문제 해법 들어봤습니다.

<리포트>

<녹취> 조병일(82/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 "네가 이북에서 아들딸 남매 셋 모두 낳았다고 하는데 얼마나 부모 없이 고생이 많았겠는지 상상이 되는구나."

<녹취> 최기호(80/황해도 서흥군 출신) : "어디에 묻혀있는지 그거만이라도 좀 알아서 한번, 묘가 있으면 묘를 봐서라도 제 소원이 풀어질 것 같습니다."

북녘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이산가족들의 영상편집니다.

언제 부쳐질지 기약조차 없지만 헤어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절함이 가득합니다.

1.4 후퇴 때 홀로 황해도 고향을 떠나온 84살 변연숙 할머니.

64년 전, 동생들의 손을 놓아야만 했던 그 순간이 지금도 평생의 한으로 맺혔습니다.

<녹취> 변연숙(84/황해도 출신) : "쫓아 나간다고 막 그러더라고. 그 때 그럴 때 그냥 같이 데리고 나왔으면, 내가 나왔으니까 그게 막 후회가 되더라고. 그나마도 하나 데리고 나왔으면 좋을 텐데."

죽은 뒤라도 혹시 동생이 볼 수 있지 않을까, 간절한 마음으로 영상편지를 보내봅니다.

<녹취> "경숙아! 순식아! 너희들도 살아있겠지? 이렇게 보고 싶어 죽겠다..."

적십자사는 이산가족 고령화에 따라 올해 말까지 이산가족 만 명을 상대로 영상 편지를 추가로 제작합니다.

<녹취> 김성근(대한적십자사 국제남북국장) : "가능한 북쪽하고 협의가 잘 돼서 많은 분들의 영상편지가 전달될 수 있게끔 하겠다는 게 저희 목표이고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나중에 돌아가시더라도 그 가족 분들에게 통일 이후에라도 전달할 수 있게끔 하자라는 게 저희 목표입니다."

이른 아침, 서울의 한 주택가.

강진선 할아버지 댁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녹취> 적십자사 관계자이산가족 : "유전자 검사 신청하셔서 유전자 검사하러 왔습니다."

강 할아버지가 유전자 검사를 신청한 건 북에 두고 온 아들과 여동생 때문입니다.

<녹취> 적십자사 관계자 : "지금 바로 검사 하실 텐데요. 처음 하실 검사는 모발 검사고요."

채취된 유전자 정보는 이산가족 1세대가 숨진 뒤에도 헤어진 가족을 찾고, 상속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게 됩니다.

지난해 처음 천2백 명에 이어, 올해 추가로 만 명의 유전자 정보를 채취해 보관할 예정입니다.

<녹취> 정재은(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 과장) : "이렇게 채취된 시료하고 그리고 여기서 추출한 DNA 정보를 같이 통일부 유전자 정보 데이터베이스에 보관을 하고요."

어느덧 구순을 넘긴 나이, 여전히 풀지 못한 이산의 한은 할아버지의 가장 큰 고통으로 남아있습니다.

<녹취> 강진선(92/유전자 검사 신청자 어머니) : "생전에 풀 한포기 뜯어주지 못하는 심정이야 먹고살고 목숨이 붙어서 숨을 쉬니까 사는 거지, 그 마음 비할 데가 없습니다."

이산가족의 고령화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2만 9천여 명, 해마다 평균 3천8백여명이 세상을 뜨고 있고 생존자는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나마 생존자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70대 이상의 고령자들입니다.

김옥희 할머니는 요즘도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가슴이 뜁니다.

혹시 북에 두고 온 딸 소식은 아닐까, 기다리고 실망하길 수십 년 쨉니다.

<녹취> 김옥희(88/황해도 용천면 출신) : "전화해 봐도 (이산가족 상봉) 차례가 안 온다길래 기다리고 있는 거지. 맨날 이날저날 기다리기만 하는 거지."

어릴 때 유난히 예쁘고 하얬던 큰딸 순복이.

네 살 때 본 게 마지막이지만 그래도 다시 만나기만 하면 금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녹취> 김옥희(88)/황해도 용천면 출신) : "피난 나와서 10년 그렇게 될 때는 만나기만 하면 그저 얼굴도 생생하고 딱 안다 했는데, 이젠 얼굴까지 희미해지고. 만나면 그래도 아는 거야, 만나면. 자기 자식이고 부모니까 다 만나면 알 수가 있는데..."

언니와 떨어져 엄마 등에 업혀 내려온 순애 씨는 언니를 생각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녹취>김순애(67/김옥희 할머니 둘째 딸) : "언니는 나 때문에 못 나온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나까지도 못 만나고 죽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요. 그래서 엄마 살아있을 때, 엄마가 건강하니까 만났으면 좋겠어요."

<녹취> 김옥희(88/황해도 용천면 출신) : "한 번이라도 죽기 전에 만나서 고생한 얘기 다 들어보고 만났으면 죽어도 한이 없는데 이제 뭐, 언제 만날 수는 없는 거고 죽은 다음에라도 다 형제들 간은 만나서 찾아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점차 실망에서 절망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까지의 방식이 계속될 경우 전체 이산가족 상봉에 무려 520년이 걸릴 거라는 끔찍한 계산도 가능한데요,

이산가족 문제 해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윱니다.

남북의 이산가족 상봉이 본격화된 건 지난 2000년부텁니다.

그동안 총 19차례의 대면상봉, 그리고 7차례의 화상상봉이 진행돼 2만 2천여 명이 헤어진 혈육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가족 기준으로는 2천 2백여 가족, 상봉 신청자의 불과 1.5%만이 재회의 꿈을 이뤘을 뿐입니다.

잘 돼야 일 년에 한 두 차례, 그것도 한 번에 고작 100명 정도씩만 만나는 방식으로는 언제 기회가 올 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나마 남북관계 악화로 2010년 11월 이후엔 단 한 차례만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인터뷰> 김수암(통일연구원 연구위원) : "부분적인 어떤 횟수를 제한한 형태의 상봉이나 서신교환으로서는 이산가족 분들의 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최우선적인 방법은 전면적인 생사확인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면적인 생사확인이 이뤄진다고 한다 그러면 그 전면적인 생사확인을 토대로 해서 수시로 서신교환을 할 수 있고 또 수시로 상봉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산가족 분들의 어떤 한을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팔순의 홍종호 할아버지는 아래윗집에서 친형제처럼 지냈던 세 조카를 찾고 있습니다.

<녹취> 홍종호(80/황해도 개풍군 출신) : "만나고 싶은 사람은 홍용희, 홍순부, 홍순모입니다."

<녹취> 홍종호(80/황해도 개풍군 출신) : "인사도 없고, 할 겨를도 없고 포탄 소리 막 나지 기차는 그게 마지막 기차라지, 그러니까 뭐 그냥 허겁지겁 나오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헤어진 거죠."

행여 기회가 올까, 가족들의 이름을 다 넣어 상봉 신청을 했지만 한 번도 추첨 명단에 들지 못했습니다.

<녹취> 홍종호(80/황해도 개풍군 출신) : "죽기 전에 한번 꼭 만나서 하고 싶은 말 하고, 사람 하나 만나서 그동안 한평생을 피난민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는데 마지막으로 핏줄이라곤 그 사람밖에, 그 저기밖에 없어."

최병현 씨 부부의 하루 일과는 사진으로나마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걸로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65년 전,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됐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보지 못한 채 5년 전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녹취> 최병현(70/이산가족) : "저희도 네 번을 신청했어요. 처음에 경찰에 했다가 그 다음에 통일부에 했다가 그 다음에 배우자가 신청하는 게 우선이라고 그래서 우리 어머니 이름으로 또 했다가 어머니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또 이제 제 이름으로 신청해서 네 번을 신청을 했죠."

얼마 전에는 유전자 검사도 신청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통일이 되면 자식들이라도 할아버지를 찾으라는 바람 때문입니다.

<녹취> 최병현(70/이산가족) : "거기서 또 자손을 뒀다면 그 자손들은 그래도 살아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렇게 연결이 되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디 뭐 묻히신 것도 알 테고. 거기서 유전자가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틀림없다는 증명이 될 게 아니겠어요."

어느덧 분단의 세월도 70년, 이산가족 상봉은 이제 어떤 이유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천륜의 문제가 됐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남북 모두의 특단의 조치, 결단이 필요합니다.

<녹취> 홍종호(80/황해도 개풍군 출신) : "이제는 그립고 보고 싶고 그 한 밖에 안 남았어요. 그러면 우리 여기에서도 한은 풀어줘야 할 거 아니냐 이거에요. 뭐 다른 걸로 자꾸 (남과 북이) 싸우지 말고.. 그래도 보고 싶은 사람이나 볼 수 있게 그거는 최소한 해줘야 되지 않겠냐 이 얘기에요."

<녹취> 최병현(70/이산가족) : "아버님, 제가 생전 처음 인사를 올립니다. 다섯 살 때 헤어진 아들이 지금 70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어디서 어떻게 사셨는지 참 궁금하지만 어떻게 찾아뵐 방법이 없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생존해 계신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부디 부디 강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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