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간 소녀들 어디로?…위안부 포로 명부 발굴

입력 2015.08.10 (17:45) 수정 2015.08.10 (20:3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위안부의 강제동원 증거는 없다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지만 진실은 끝내는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최근 비밀이 해제된 태국의 정부 문서에서 400여 명의 한인 위안부 포로 명단이 확인됐다는 뉴스 보셨죠.

현지를 취재하고 돌아온 노윤정 기자 나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다녀오신 것이 요즘 미얀마라고 부르는 버마쪽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일본이 동남아에서 인도쪽으로 진출하면서 미얀마에서도 격전이 벌어지고 했는데 거기까지 우리 위안부들이 있었다 이런 얘기신 거죠?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버마, 지금의 미얀마가 2차대전 당시에 연합군하고 일본군 사이에서 격전이 벌어졌던 곳인데요.

▼국내 최초 ‘버마 전선’ 위안부 취재▼

인도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그다음에 연합군이 중국군을 지원하는 보급로, 그러니까 버마루트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치열했던 만큼 그곳으로 동원됐던 위안부들에게도 굉장히 고통의 현장이었을 텐데요.

미얀마는 특히 또 국내의 위안부 문제 연구자들 사이에서 특히 관심을 끌었던 지역이기도 한데.

한 수백명의 조선인 위안부, 4차 조선인 위안단이라고 부르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됐다는 구체적인 사료들이 발견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미얀마에서 현지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었는데요.

50여 년간 군부독재 때문에 취재 환경이 좋지가 않아서 접근이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좀 상황이 풀리고 있어서 저희 탐사보도팀에서 처음으로 현지에 다녀오게 됐습니다.

-이번에 태국 비밀 문서가 공개가 되면서 직접 지금 태국에 가서 확인하고 오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태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자료인데요.

▼비밀 해제된 태국 문서에서 발굴된 ‘위안부 명부’▼

태국어와 영어로 각각 작성된 2개의 명부를 저희가 발굴을 했는데 종전 이후인 1945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태국 남부의 아유타야라는 곳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여성 포로들의 명단이었습니다.

태국 군부가 작성한 기밀 문서여서 촬영이나 복사는 금지가 돼 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원본 내용을 손으로 적어 나와서 일일이 복원을 했는데요.

양쪽 명부에 적힌 이름이 모두 580명 정도인데 같은 수용소 기록이고 시기만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중복으로 적힌 이름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 포로는 463명으로 집계가 됐습니다.

또 명부에서는 여성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런 기록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는데요.

태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위안부, 고 노수복 할머니를 연상하게 하는 기록입니다.

노수복 할머니는 태국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아버지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화낼 게 두려워서 포로수용소를 탈출해서 42년 동안 연락이 두절됐던 경우였는데요.

1984년도에 KBS 이산가족찾기에 나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 이렇게 신청을 해서 42년 만에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화면 잠깐 보시겠습니다.

-노수복 할머니한테 말이죠.

동생들 이름이 기억나시는지 여쭤봐주세요.

-노수만이, 노순음이, 노국현이.

-아이고, 노수복이 아이래요? 아이고, 우리 언니래.

-이역만리에 끌려가서 정말 말도 못할 고초를 겪으신 경우인데.

▼위안부 자녀 명단도 발견▼

그런데 위안부로 추정되는 명단 말고 아이들도 있었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예요?

-그렇습니다.

취재팀도 이 아이 포로 명단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여성 포로명단 맨 마지막 페이지에다가 아이들의 명부, 아이들의 이름만 따로 적은 페이지가 첨부가 돼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명단을 발견하고 위안부들의 삶에 말 못할 사연들이 정말 많았다 이런 소회가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인지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생년월일이 나와 있어요?

-나이가 적혀 있는데요.

1살부터 6살까지 그 정도 나이대는 분포가 돼 있었고.

-엄마 밑에 이렇게 엄마의 성을 딴 아이의 이름도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영어 명부에는 엄마 이름 밑에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엄마의 성을 그대로 쓰고 있는 아이들이 한 6명 정도가 발견이 됐습니다.

-일본이 지금까지도 발뺌을 하고 있죠, 이렇게 여러 가지 증거들이 있고 살아 있는 증거들이 많은데도요.

그런데 이 배경에는 종군위안부다라고 기재된 어떤 그런 확실한 증거가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여기에서는 위안부라고 확실히 기재가 되어 있습니까?아니면 또 다른 간호조무사라든지 다른 업종으로 기재돼 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떤지 궁금하네요.

▼명단 내 이름…위안부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들의 직업을 위안부로 적시해 놓은 자료는 거의 발견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간호조무사로 기록돼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날 무렵에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모두 간호조무사로 변경 등록해라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패전이 될 줄 알고 범죄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이른바 세탁을 한 거네요, 그러니까.

-그런 피해자들의 증언, 구체적인 증언들이 경험했다는 증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사료 증거로도 발견된 바가 있습니다.

8년 전에 발굴된 일본군의 비밀전보문인데요.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던 해군부대 등에 전달된 전보인데 위안소 여성들을 간호조무사로 고용해라.

그리고 또 원래 위안부였던 것처럼 조치를 하고 전보문을 소각해라 이런 내용들이 담겨 있는 전보문입니다.

-원래 간호사였던 것처럼 조치하라.

-그렇습니다.

이 비밀전보문을 직접 발견했던 전문가의 분석을 직접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곳곳의 일본군에게 전보로 지령이 전달됐죠.

왜 그런 지령을 내렸는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위안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하여튼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주 지능적으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것이 태국에서 우리가 어떻게 보면 비밀 정보가 비밀이 해제되면서 알게 된 건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시는 분들이 모두들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문서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공문서로 된 증거가 빈약하다 이 부분에서 항상 아쉬움을 느끼고 계신데요.

▼위안부 자녀 명단 최초 공개, 의미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본이 패전 당시에 민감한 내용을 담은 문서를 모두 폐기했기 때문에 공문서로 된 자료를 발견하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태국이라는 제3국의 공문서에서 수백명의 명단이 발굴이 되었고 그게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는 제3국의 공문서이기 때문에 그만큼 의미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국내 언론 가운데 최초로 현지 취재를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버마전선의 위안부들에서 취재를 다녀왔는데요.

흑백사진 한 장 보여드리면서 말씀 나누겠습니다.

▼‘버마 전선 위안부’ 국내 최초 취재▼

그동안 정말 많이 보셨던 익숙한 사진일 텐데요.

-연합군 자료들로 공개된 사진들이죠.

-그렇습니다.

1944년 8월 미얀마에서 연합군에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이들에 대한 연합군 포로 심문 기록은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한 미 하원 위안부 결의안 등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취재팀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미얀마 현지에서 위안부 문제를 취재를 했는데 곳곳에 위안소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조선인 위안부들의 흔적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앞서 보신 사진에 있었던 위안부들이 포로로 잡혔던 미치나라는 곳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주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분의 증언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치마는 지금 한국 영화 나오는 옷이랑 똑같았어요.

여기는 좀 짧았어요.

어머니는 여기를 찔렸어요.

이모는 어깨를 찔렸고요.

여동생은 귀를 찔렸어요.

일본군이 퇴각하던 날 새벽 한두 시쯤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칼로 찔렀어요.

-지금 보면 현지 주민들도 이른바 양민학살을 했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전쟁 범죄의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렇습니다.

▼‘사라진 위안부 여성’…어디로?▼

취재팀이 실제 그 버마전선의 끝에 중국 윈난성 지역에서 위안부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을 접하고 굉장히 놀라웠는데요.

어떤 내용의 증언이었는지 일단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일본군이 후퇴할 때 맞은편 위안소에 있던 조선 여성 열 몇 명을 총살했어요.

뒤로 돌려 세우고 기관총으로 쏴버렸어요.

그리고 우물에다 버렸어요.

▼‘사라진 위안부 여성’…어디로?▼

-윈난성 텅총이라는 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윈난성에서는 이런 위안부 학살 정황을 담은 기록도 많이 발견됐습니다.

살해된 조선인 위안부를 바라보는 중국 병사들을 찍은 사진, 연합군의 기록이 발견됐고요.

또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학살했다는 한 여자아이의 증언을 담은 중국 정부기록 등도 확인됐습니다.

또 일본군 내부에서도 학살정황이 제기됐는데요.

패전 무렵 주먹밥에 수은을 넣어서 위안부를 죽이라는 이런 명령을 받았다 이런 회고록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증거가 곳곳에 있는데요.

아마 오랫동안 취재하시면서 여성으로서 남다른 소회를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부분이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뭔가 하는 부분이었는데요.

일본에서는 우익들을 중심으로 해서 강제동원 문제에 집중을 하면서 논점을 자꾸 흐리려고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를 끌고 갔느냐, 제 발로 걸어갔느냐 이런 부분을 따지면서 강제동원은 없었다 이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강제동원만이 논점이 아닙니다.

하루 수십명을 상대하는 성노예였고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인권침해가 있었고 그리고 죽음을 강요당하고 학살당하는 경우까지 있었던 겁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본질을 제대로 직시하고 무엇부터 해결해야 될지 이걸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노예라고 불리는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문제가 아니죠.

전세계 인권의 문제니까 그런 시각에서 저희가 봐야겠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사진단 여기서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끌려간 소녀들 어디로?…위안부 포로 명부 발굴
    • 입력 2015-08-10 18:27:26
    • 수정2015-08-10 20:36:43
    시사진단
-일본 정부는 아직도 위안부의 강제동원 증거는 없다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지만 진실은 끝내는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최근 비밀이 해제된 태국의 정부 문서에서 400여 명의 한인 위안부 포로 명단이 확인됐다는 뉴스 보셨죠.

현지를 취재하고 돌아온 노윤정 기자 나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다녀오신 것이 요즘 미얀마라고 부르는 버마쪽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일본이 동남아에서 인도쪽으로 진출하면서 미얀마에서도 격전이 벌어지고 했는데 거기까지 우리 위안부들이 있었다 이런 얘기신 거죠?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버마, 지금의 미얀마가 2차대전 당시에 연합군하고 일본군 사이에서 격전이 벌어졌던 곳인데요.

▼국내 최초 ‘버마 전선’ 위안부 취재▼

인도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그다음에 연합군이 중국군을 지원하는 보급로, 그러니까 버마루트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치열했던 만큼 그곳으로 동원됐던 위안부들에게도 굉장히 고통의 현장이었을 텐데요.

미얀마는 특히 또 국내의 위안부 문제 연구자들 사이에서 특히 관심을 끌었던 지역이기도 한데.

한 수백명의 조선인 위안부, 4차 조선인 위안단이라고 부르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됐다는 구체적인 사료들이 발견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미얀마에서 현지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었는데요.

50여 년간 군부독재 때문에 취재 환경이 좋지가 않아서 접근이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좀 상황이 풀리고 있어서 저희 탐사보도팀에서 처음으로 현지에 다녀오게 됐습니다.

-이번에 태국 비밀 문서가 공개가 되면서 직접 지금 태국에 가서 확인하고 오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태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자료인데요.

▼비밀 해제된 태국 문서에서 발굴된 ‘위안부 명부’▼

태국어와 영어로 각각 작성된 2개의 명부를 저희가 발굴을 했는데 종전 이후인 1945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태국 남부의 아유타야라는 곳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여성 포로들의 명단이었습니다.

태국 군부가 작성한 기밀 문서여서 촬영이나 복사는 금지가 돼 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원본 내용을 손으로 적어 나와서 일일이 복원을 했는데요.

양쪽 명부에 적힌 이름이 모두 580명 정도인데 같은 수용소 기록이고 시기만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중복으로 적힌 이름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 포로는 463명으로 집계가 됐습니다.

또 명부에서는 여성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런 기록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는데요.

태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위안부, 고 노수복 할머니를 연상하게 하는 기록입니다.

노수복 할머니는 태국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아버지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화낼 게 두려워서 포로수용소를 탈출해서 42년 동안 연락이 두절됐던 경우였는데요.

1984년도에 KBS 이산가족찾기에 나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 이렇게 신청을 해서 42년 만에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화면 잠깐 보시겠습니다.

-노수복 할머니한테 말이죠.

동생들 이름이 기억나시는지 여쭤봐주세요.

-노수만이, 노순음이, 노국현이.

-아이고, 노수복이 아이래요? 아이고, 우리 언니래.

-이역만리에 끌려가서 정말 말도 못할 고초를 겪으신 경우인데.

▼위안부 자녀 명단도 발견▼

그런데 위안부로 추정되는 명단 말고 아이들도 있었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예요?

-그렇습니다.

취재팀도 이 아이 포로 명단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여성 포로명단 맨 마지막 페이지에다가 아이들의 명부, 아이들의 이름만 따로 적은 페이지가 첨부가 돼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명단을 발견하고 위안부들의 삶에 말 못할 사연들이 정말 많았다 이런 소회가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인지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생년월일이 나와 있어요?

-나이가 적혀 있는데요.

1살부터 6살까지 그 정도 나이대는 분포가 돼 있었고.

-엄마 밑에 이렇게 엄마의 성을 딴 아이의 이름도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영어 명부에는 엄마 이름 밑에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엄마의 성을 그대로 쓰고 있는 아이들이 한 6명 정도가 발견이 됐습니다.

-일본이 지금까지도 발뺌을 하고 있죠, 이렇게 여러 가지 증거들이 있고 살아 있는 증거들이 많은데도요.

그런데 이 배경에는 종군위안부다라고 기재된 어떤 그런 확실한 증거가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여기에서는 위안부라고 확실히 기재가 되어 있습니까?아니면 또 다른 간호조무사라든지 다른 업종으로 기재돼 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떤지 궁금하네요.

▼명단 내 이름…위안부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들의 직업을 위안부로 적시해 놓은 자료는 거의 발견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간호조무사로 기록돼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날 무렵에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모두 간호조무사로 변경 등록해라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패전이 될 줄 알고 범죄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이른바 세탁을 한 거네요, 그러니까.

-그런 피해자들의 증언, 구체적인 증언들이 경험했다는 증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사료 증거로도 발견된 바가 있습니다.

8년 전에 발굴된 일본군의 비밀전보문인데요.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던 해군부대 등에 전달된 전보인데 위안소 여성들을 간호조무사로 고용해라.

그리고 또 원래 위안부였던 것처럼 조치를 하고 전보문을 소각해라 이런 내용들이 담겨 있는 전보문입니다.

-원래 간호사였던 것처럼 조치하라.

-그렇습니다.

이 비밀전보문을 직접 발견했던 전문가의 분석을 직접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곳곳의 일본군에게 전보로 지령이 전달됐죠.

왜 그런 지령을 내렸는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위안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하여튼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주 지능적으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것이 태국에서 우리가 어떻게 보면 비밀 정보가 비밀이 해제되면서 알게 된 건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시는 분들이 모두들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문서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공문서로 된 증거가 빈약하다 이 부분에서 항상 아쉬움을 느끼고 계신데요.

▼위안부 자녀 명단 최초 공개, 의미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본이 패전 당시에 민감한 내용을 담은 문서를 모두 폐기했기 때문에 공문서로 된 자료를 발견하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태국이라는 제3국의 공문서에서 수백명의 명단이 발굴이 되었고 그게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는 제3국의 공문서이기 때문에 그만큼 의미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국내 언론 가운데 최초로 현지 취재를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버마전선의 위안부들에서 취재를 다녀왔는데요.

흑백사진 한 장 보여드리면서 말씀 나누겠습니다.

▼‘버마 전선 위안부’ 국내 최초 취재▼

그동안 정말 많이 보셨던 익숙한 사진일 텐데요.

-연합군 자료들로 공개된 사진들이죠.

-그렇습니다.

1944년 8월 미얀마에서 연합군에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이들에 대한 연합군 포로 심문 기록은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한 미 하원 위안부 결의안 등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취재팀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미얀마 현지에서 위안부 문제를 취재를 했는데 곳곳에 위안소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조선인 위안부들의 흔적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앞서 보신 사진에 있었던 위안부들이 포로로 잡혔던 미치나라는 곳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주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분의 증언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치마는 지금 한국 영화 나오는 옷이랑 똑같았어요.

여기는 좀 짧았어요.

어머니는 여기를 찔렸어요.

이모는 어깨를 찔렸고요.

여동생은 귀를 찔렸어요.

일본군이 퇴각하던 날 새벽 한두 시쯤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칼로 찔렀어요.

-지금 보면 현지 주민들도 이른바 양민학살을 했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전쟁 범죄의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렇습니다.

▼‘사라진 위안부 여성’…어디로?▼

취재팀이 실제 그 버마전선의 끝에 중국 윈난성 지역에서 위안부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을 접하고 굉장히 놀라웠는데요.

어떤 내용의 증언이었는지 일단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일본군이 후퇴할 때 맞은편 위안소에 있던 조선 여성 열 몇 명을 총살했어요.

뒤로 돌려 세우고 기관총으로 쏴버렸어요.

그리고 우물에다 버렸어요.

▼‘사라진 위안부 여성’…어디로?▼

-윈난성 텅총이라는 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윈난성에서는 이런 위안부 학살 정황을 담은 기록도 많이 발견됐습니다.

살해된 조선인 위안부를 바라보는 중국 병사들을 찍은 사진, 연합군의 기록이 발견됐고요.

또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학살했다는 한 여자아이의 증언을 담은 중국 정부기록 등도 확인됐습니다.

또 일본군 내부에서도 학살정황이 제기됐는데요.

패전 무렵 주먹밥에 수은을 넣어서 위안부를 죽이라는 이런 명령을 받았다 이런 회고록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증거가 곳곳에 있는데요.

아마 오랫동안 취재하시면서 여성으로서 남다른 소회를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부분이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뭔가 하는 부분이었는데요.

일본에서는 우익들을 중심으로 해서 강제동원 문제에 집중을 하면서 논점을 자꾸 흐리려고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를 끌고 갔느냐, 제 발로 걸어갔느냐 이런 부분을 따지면서 강제동원은 없었다 이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강제동원만이 논점이 아닙니다.

하루 수십명을 상대하는 성노예였고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인권침해가 있었고 그리고 죽음을 강요당하고 학살당하는 경우까지 있었던 겁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본질을 제대로 직시하고 무엇부터 해결해야 될지 이걸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노예라고 불리는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문제가 아니죠.

전세계 인권의 문제니까 그런 시각에서 저희가 봐야겠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사진단 여기서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