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만여 명 ‘강제 동원’…자살 공격까지 투입

입력 2015.08.15 (07:38) 수정 2015.08.1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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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본 오키나와는 2차대전 말기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약 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중노동에 시달리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윤석구 특파원이 그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오키나와의 작은 섬 아카시마.

전쟁 말기 자살공격용 특공정을 숨겨놨던 동굴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1945년 2월 군대 잡역부란 뜻의 '군부'로 불린 한국인 150여명이 이곳에 끌려왔습니다.

한달 뒤 이 섬에 처음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한국인 군부들을 총살하는 등 전투현장에서 70여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녹취> 가키노하나(당시 학도병) : "여기서 일본군 5명이 군부 7명을 세워놓고 총살하는 모습을 주민들이 함께 봤습니다."

‘특설 수상근무대’란 명칭이 붙은 이 부대 명부엔 1944년 여름 경상북도에서 오키나와에 강제 징용된 2천 6백여명의 이름과 주소가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부대 일지엔 '무학문맹'이나 '3등 국민' 등 한국인을 멸시하는 표현들이 적혀 있습니다.

<인터뷰> 이즈하라(오키나와 역사연구자) : "배에서 군수물자를 내리는 게 이들의 주 임무였습니다.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중노동은 주로 한국인들이 맡았습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해 최후 전투가 벌어졌던 남부 야마시로 지역.

참혹한 전투현장에 끌려와 노역을 강요당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탄약 운반에 동원됐던 군부들은 마지막엔 전원 자살 공격대로 투입돼 중대가 전멸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녹취> 긴조(야마시로 주민) : "최전선에 탄약을 나르는 일이니까 숨을 곳도 없이 길에 온통 사체가 쌓여 밟고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상근무대 한국인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이 숨진 것으로 일본 연구가는 추정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아직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윤석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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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만여 명 ‘강제 동원’…자살 공격까지 투입
    • 입력 2015-08-15 07:47:30
    • 수정2015-08-15 17: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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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본 오키나와는 2차대전 말기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약 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중노동에 시달리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윤석구 특파원이 그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오키나와의 작은 섬 아카시마.

전쟁 말기 자살공격용 특공정을 숨겨놨던 동굴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1945년 2월 군대 잡역부란 뜻의 '군부'로 불린 한국인 150여명이 이곳에 끌려왔습니다.

한달 뒤 이 섬에 처음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한국인 군부들을 총살하는 등 전투현장에서 70여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녹취> 가키노하나(당시 학도병) : "여기서 일본군 5명이 군부 7명을 세워놓고 총살하는 모습을 주민들이 함께 봤습니다."

‘특설 수상근무대’란 명칭이 붙은 이 부대 명부엔 1944년 여름 경상북도에서 오키나와에 강제 징용된 2천 6백여명의 이름과 주소가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부대 일지엔 '무학문맹'이나 '3등 국민' 등 한국인을 멸시하는 표현들이 적혀 있습니다.

<인터뷰> 이즈하라(오키나와 역사연구자) : "배에서 군수물자를 내리는 게 이들의 주 임무였습니다.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중노동은 주로 한국인들이 맡았습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해 최후 전투가 벌어졌던 남부 야마시로 지역.

참혹한 전투현장에 끌려와 노역을 강요당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탄약 운반에 동원됐던 군부들은 마지막엔 전원 자살 공격대로 투입돼 중대가 전멸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녹취> 긴조(야마시로 주민) : "최전선에 탄약을 나르는 일이니까 숨을 곳도 없이 길에 온통 사체가 쌓여 밟고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상근무대 한국인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이 숨진 것으로 일본 연구가는 추정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아직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윤석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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