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1,300명의 무덤…천인갱, 사라진 조선인

입력 2015.08.17 (17:45) 수정 2015.08.1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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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섬 해남도, 하이난섬은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립니다.

여기에 천인갱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천인갱의 갱, 이게 분서갱유의 갱, 갱도의 갱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갱도도 있고 또 파묻었다는 개념도 있으니까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이름 자체가 그런 경우로 봐야겠네요.

-천인갱에 묻힌 조선인들은 왜 그곳으로 끌려갔고 왜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요.

70여 년 전 하이난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을 추적한 양성모 기자와 함께 자세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양성모 기자가 해남 간다고 해서 우리 해남을 간 줄 알았더니 중국 해남을 갔다오신 거네요.

-전남 해남이 아니라.

-하여튼 천인갱이 어떤 곳인지 먼저 화면으로 보면서 간단히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화면 보시면요.

지금 현장을 찾아가는 것인데 언뜻 보면 텃밭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바로 그 조선인들이 묻힌 천인갱입니다.

-밤에 사람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에요.

해골도 나오고 울음소리도 들려서 이 근처에는 무서워서 잘 오지 않아요.

-굶주리거나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거나 도망치다 잡히면 이곳에서 이렇게 끔찍하게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지금 발굴하는 모습을 보고 계시는데요.

-일을 하지 못하면 두 손을 묶어서 큰 나무에 매달아 몽둥이로 때려죽인 다음에 여기에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희생이 늘어나다가 일본이 패망을 했는데,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갑자기 더 조선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일본군이 항복하고 이곳을 떠났을 때 남아 있는 조선인들은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있었던 건물과 낡아빠진 옷가지 몇 조각을 남기고는 사라졌어요.

아마 일본군이 전부 때려죽였을 겁니다.

-자기들이 필요해서 강제징용으로 데려갔던 우리 한인들, 당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는 얘기인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습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되었어요?

-이게 처음 알려졌던 게 1995년도에 중국 하이난성에서 발간했던 책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게 됐는데요.

이 제목이 철발굽 아래에 피비린내나는 비바람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여기 보면 일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일본군들이 1000여 명의 조선인들을 모아서 땅을 파게 한 다음에 거기다 전쟁물자를 다 묻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갑작스럽게 조선인들을 다 죽여서 그 자리에 다 묻어버렸다, 그래서 이곳을 천인갱이라고 그때부터 부르게 됐다,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천인갱이 위치한 마을이 조선촌이라고 불렸다고 해요.

그러면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건데 2000명 정도가 동원됐다는 얘기도 있고요.

어떤가요?

-지금은 조선인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전혀 없는 마을인데요.

다 일제 시대 때 끌려갔던 조선인들이 거기에 머물렀다고 해서 이름이 조선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분들이 전부 우리가 예전에 흔히 남양군도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남태평이나 이런 쪽으로 끌려간 분들 중에 아마 일부가 또 이쪽으로 끌려간 모양이죠?

주로 어떤 일들을 가서 하게 된 건가요?

▼조선인 대학살…천인갱 어떤 곳?▼

-하이난은 두 가지 중요한 위치였는데요.

하나가 광물이 많이 나는 곳입니다.

철광석이 일본에서 나지 않는 철광석이 나기 때문에 전쟁물자에 굉장히 중요했고요.

또 하나는 전략적 요충지기 때문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일본이 굉장히 노력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우리 끌려가셨던 분들이 주로 철광석을 캐는 그런 작업을 하시고 또 비행장이나 철도나 도로를 만드는 작업을 하셨죠.

-아까 목격자의 증언에서도 들으셨지만 정말 무서워서 그 근처를 지나갈 수 없었다 할 만큼 일본군의 학대가 아주 참담한 수준이었다고 하는데요.

직접 들어보시죠.

-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는 일을 시켰는데 음식을 안 먹이는 것 같았어요.

조선인들이 배가 고파서 이쪽 길에 나와서 고구마를 파먹다가 걸렸는데, 그냥 두들겨 패서 죽이더라고요.

사람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천인갱에 던졌습니다.

사람을 태울 때 나는 냄새는 굉장히 역겨웠고, 일본군을 보면 너무 무서워서 소변을 지릴 정도였어요.

-얼마나 잔혹했었는지 오래전 일인데도 잊지 못한다는 말씀이신 건데요.

더 많은 목격담들이 나오고 있죠.

▼일본군의 잔혹성에 대한 목격담▼

-중국의 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콜레라나 말라리아 같은 그런 전염병이나 풍토병이 돌았는데 일본군들이 그 병이 혹시라도 전염될까봐 굉장히 두려워 했다고 해요.

그래서 혹시라도 이 병에 걸린 조선인을 보면 생사를 불문하고 태워버렸다 이런 기록이 나와 있고요.

드물지만 생존자가 몇 분 계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고복남 씨라는 분이 도망치다가 잡히니까 석 달 열흘을 나무에 묶인 채로 맞다가.

-석 달 열흘을요?-네, 석 달 열흘을 계속 묶여 있고 그 묶여 있는 상태로 밥도 먹이고.

이런 상태로 견디다가 결국 풀렸났다, 그리고 나서 또 계속 일을 했다 이런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 분들이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까 모르겠어요.

아마 일본 정부는 이런 거를 가르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원래는 수형자, 그러니까 죄수였었다고요?

-예.

▼강제동원 된 조선인들 대부분이 수형자▼

파견대상자들은 워낙 전황이 급박해지니까 수형자들이라도 끌고 가서 일을 시켜야 되겠다는 그런 내용이 일부분 내간 문서에 나와 있는데요.

그 수가 한 2000명 정도 되고요.

그리고 간수 250명 정도까지 포함해서 해남도로 떠났는데 이 인원은 당시 조선 안에 있던 수형자들의 전체 10%에 달하는 많은 인원이었습니다.

1944년 3월에 처음 출발해서 총 8차례에 걸쳐서 계속 파견을 했는데요.

파견할 때 일하기로 했던 기간은 딱 6개월로 약속했습니다.

6개월만 일하면 돌아와서 가출옥, 가석방을 해 주겠다.

-감언이설을 한 거네요.

-가출옥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출발할 때 서울시 의회 앞에, 지금의.

그 앞에서 환송식도 거창하게 큰 행사를 하고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군요.

당연히 가석방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몇 분 정도 희생되고 몇 분 정도 가석방이 실제로 된 게 있는지 어느 정도 나온 게 있나요?

-전체적으로 2000명이 갔다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저희 KBS가 언론을 통해서 최초로 공개한 문서인데요.

이게 당시에 하이난에 주둔했던 일본 사령관 고가 케이지라는 사람이 쓴 귀환보고서입니다.

전쟁이 다 끝나고 돌아오면서 보고를 한 그 문서인데요.

여기 보면 조선보급대라는 이름으로 분류가 된 게 총원 658명이 나오고 간수가 52명이고 그리고 수형자가 606명으로 나오는 거죠.

2000명 중에서 600명 정도는 돌아왔다라고, 이런 문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데.

여기에다 경성형무소에서 나온 가출옥 관계서류라는 서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출옥이 된 사유가 적혀 있는데 그때 해남도 파견 때문에 가출옥을 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현재 112명이 확인됩니다.

▼조선인 1,300여 명 대학살 추정▼

그러니까 600명에다가 112명까지 하면 700명 정도 되잖아요.

2000명 중에 700명 정도는 돌아왔다 그리고 한 100여 명 정도는 실제로 가출옥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이 가출옥 112명이라는 숫자는 사실 2000명 중에서는 5% 정도밖에 안 되는 숫자고 또 그나마도 1944년 7월 이후에는 이 서류가 남아 있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그때가 마지막으로 가출옥을 했고 전쟁이 심각해지자 이 약속을 폐기한 거죠.

-그런데 현장에 가보셨잖아요.

저희가 화면으로 보니까 그야말로 풀이 무성한 잡초지대처럼 돼 있는데, 아까 뭘 파시던데, 지금 발굴 같은 게 거의 안 이루어져 있는 상태인가요?

▼천인갱 발굴작업, 어디까지 진행됐나?▼

-2000년대 초반에 사실 여기를 조금 일부,아주 일부 발굴했었는데요.

그때 한 사업가가 추모비도 세우고 공원화 작업을 해야겠다고 좀 진행을 하다가 이 사업이 문제가 생기면서 현재는 그냥 일반 공터입니다.

-유해를 발굴한 건 전혀 없어요?

-유해를 조금 발굴했는데 한 100여 구 정도는 발굴했는데 그 발굴한 것들을 이 건물 안에 모아두고 거기에 추모비도 세우고 공원화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고 지금 저기 풀밭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고구마가 심어져 있거든요.

그 고구마가 주민들이 돼지사료로 쓰겠다고 해서 누군가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희생된 곳인데 거기에 돼지사료를 심고 있다니까.

우리가 어떻게 유골을 관리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

▼지금까지 발굴된 유골들은 어디에?▼

-지금 가장 큰 문제가 현장에서 발굴조사,진상조사를 해야 되는데 이 진상조사의 첫 단계는 발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중국과 협상을 해야 되는 문제기 때문에 그 벽에 막혀 있고요.

-왜요, 중국이 반대를 해요?

-중국이 일단 외국에서 들어와서 발굴조사를 하고 어떤 행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시민단체가 가는 건 좀 그럴 테고 정부 대 정부 차원으로 요구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요?

-그 협상이 현재는 진행 중인데 그 협상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는 외교 관계 문제기 때문에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고요.

다만 정부는 지금 중국과 천인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진상조사를 위한 발굴작업에 대한 협상을 현재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중국도 같이 공분하는 입장일 텐데.

아마 이게 어느 단위에서 진행이 되는지 몰라도 조금 높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우리 외교부에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까지는 취재가 아직 안 됐군요.

-일단 말로는 현재 그 상황을 파악하고 있고 또 중국과 계속 협의를 하고 있다라고 밝히고는 있지마는.

그런데 언제 구체적인 협상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가 가서 취재하고 일부 발굴하는 것처럼 화면을 찍으셨을 텐데.

그런 거에 대해서 중국 정부가 못 하게 막지는 않던가요?

-당시에는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요.

그러나 전면적인 발굴에는 사실 좀 어려움이 따릅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천인갱이 있던 지역이 사실은 거의 황무지와 같았던 지역이거든요.

그런데 최근에는 이곳에 개발바람이 불어서 사실 천인갱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이미 생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변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는 중이고요.

-땅은 국유지예요? 누구 걸로 돼 있어요?

-중국은 사실 전부 다 국유지죠.

-누군가가 시설을 이용하는지.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그 사업가 분이 그 땅을 임대를 해서.

-그분은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지금 그분은 연락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고.

당시 사업이 진행되다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서.

-이 부분을 꼭 좀 한번 확인을 해 보고 정부 차원에 좀 더 요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신제품을 야심차게 내놓았지만 오늘 삼성전자의 주가는 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한편 삼성그룹은 앞으로 2년 동안 3만명의 청년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 중요하죠.

그런데 지금은 천재 1명이 100만명을 먹여살리는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삼성의 신입사원들을 천재로 키워서, 잘 육성해서 시장을 놀래켜주기를 한번 기다려보겠습니다.

-시사진단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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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진 1,300명의 무덤…천인갱, 사라진 조선인
    • 입력 2015-08-17 18:00:00
    • 수정2015-08-17 20:06:12
    시사진단
-중국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섬 해남도, 하이난섬은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립니다.

여기에 천인갱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천인갱의 갱, 이게 분서갱유의 갱, 갱도의 갱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갱도도 있고 또 파묻었다는 개념도 있으니까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이름 자체가 그런 경우로 봐야겠네요.

-천인갱에 묻힌 조선인들은 왜 그곳으로 끌려갔고 왜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요.

70여 년 전 하이난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을 추적한 양성모 기자와 함께 자세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양성모 기자가 해남 간다고 해서 우리 해남을 간 줄 알았더니 중국 해남을 갔다오신 거네요.

-전남 해남이 아니라.

-하여튼 천인갱이 어떤 곳인지 먼저 화면으로 보면서 간단히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화면 보시면요.

지금 현장을 찾아가는 것인데 언뜻 보면 텃밭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바로 그 조선인들이 묻힌 천인갱입니다.

-밤에 사람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에요.

해골도 나오고 울음소리도 들려서 이 근처에는 무서워서 잘 오지 않아요.

-굶주리거나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거나 도망치다 잡히면 이곳에서 이렇게 끔찍하게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지금 발굴하는 모습을 보고 계시는데요.

-일을 하지 못하면 두 손을 묶어서 큰 나무에 매달아 몽둥이로 때려죽인 다음에 여기에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희생이 늘어나다가 일본이 패망을 했는데,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갑자기 더 조선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일본군이 항복하고 이곳을 떠났을 때 남아 있는 조선인들은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있었던 건물과 낡아빠진 옷가지 몇 조각을 남기고는 사라졌어요.

아마 일본군이 전부 때려죽였을 겁니다.

-자기들이 필요해서 강제징용으로 데려갔던 우리 한인들, 당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는 얘기인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습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되었어요?

-이게 처음 알려졌던 게 1995년도에 중국 하이난성에서 발간했던 책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게 됐는데요.

이 제목이 철발굽 아래에 피비린내나는 비바람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여기 보면 일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일본군들이 1000여 명의 조선인들을 모아서 땅을 파게 한 다음에 거기다 전쟁물자를 다 묻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갑작스럽게 조선인들을 다 죽여서 그 자리에 다 묻어버렸다, 그래서 이곳을 천인갱이라고 그때부터 부르게 됐다,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천인갱이 위치한 마을이 조선촌이라고 불렸다고 해요.

그러면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건데 2000명 정도가 동원됐다는 얘기도 있고요.

어떤가요?

-지금은 조선인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전혀 없는 마을인데요.

다 일제 시대 때 끌려갔던 조선인들이 거기에 머물렀다고 해서 이름이 조선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분들이 전부 우리가 예전에 흔히 남양군도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남태평이나 이런 쪽으로 끌려간 분들 중에 아마 일부가 또 이쪽으로 끌려간 모양이죠?

주로 어떤 일들을 가서 하게 된 건가요?

▼조선인 대학살…천인갱 어떤 곳?▼

-하이난은 두 가지 중요한 위치였는데요.

하나가 광물이 많이 나는 곳입니다.

철광석이 일본에서 나지 않는 철광석이 나기 때문에 전쟁물자에 굉장히 중요했고요.

또 하나는 전략적 요충지기 때문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일본이 굉장히 노력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우리 끌려가셨던 분들이 주로 철광석을 캐는 그런 작업을 하시고 또 비행장이나 철도나 도로를 만드는 작업을 하셨죠.

-아까 목격자의 증언에서도 들으셨지만 정말 무서워서 그 근처를 지나갈 수 없었다 할 만큼 일본군의 학대가 아주 참담한 수준이었다고 하는데요.

직접 들어보시죠.

-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는 일을 시켰는데 음식을 안 먹이는 것 같았어요.

조선인들이 배가 고파서 이쪽 길에 나와서 고구마를 파먹다가 걸렸는데, 그냥 두들겨 패서 죽이더라고요.

사람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천인갱에 던졌습니다.

사람을 태울 때 나는 냄새는 굉장히 역겨웠고, 일본군을 보면 너무 무서워서 소변을 지릴 정도였어요.

-얼마나 잔혹했었는지 오래전 일인데도 잊지 못한다는 말씀이신 건데요.

더 많은 목격담들이 나오고 있죠.

▼일본군의 잔혹성에 대한 목격담▼

-중국의 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콜레라나 말라리아 같은 그런 전염병이나 풍토병이 돌았는데 일본군들이 그 병이 혹시라도 전염될까봐 굉장히 두려워 했다고 해요.

그래서 혹시라도 이 병에 걸린 조선인을 보면 생사를 불문하고 태워버렸다 이런 기록이 나와 있고요.

드물지만 생존자가 몇 분 계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고복남 씨라는 분이 도망치다가 잡히니까 석 달 열흘을 나무에 묶인 채로 맞다가.

-석 달 열흘을요?-네, 석 달 열흘을 계속 묶여 있고 그 묶여 있는 상태로 밥도 먹이고.

이런 상태로 견디다가 결국 풀렸났다, 그리고 나서 또 계속 일을 했다 이런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 분들이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까 모르겠어요.

아마 일본 정부는 이런 거를 가르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원래는 수형자, 그러니까 죄수였었다고요?

-예.

▼강제동원 된 조선인들 대부분이 수형자▼

파견대상자들은 워낙 전황이 급박해지니까 수형자들이라도 끌고 가서 일을 시켜야 되겠다는 그런 내용이 일부분 내간 문서에 나와 있는데요.

그 수가 한 2000명 정도 되고요.

그리고 간수 250명 정도까지 포함해서 해남도로 떠났는데 이 인원은 당시 조선 안에 있던 수형자들의 전체 10%에 달하는 많은 인원이었습니다.

1944년 3월에 처음 출발해서 총 8차례에 걸쳐서 계속 파견을 했는데요.

파견할 때 일하기로 했던 기간은 딱 6개월로 약속했습니다.

6개월만 일하면 돌아와서 가출옥, 가석방을 해 주겠다.

-감언이설을 한 거네요.

-가출옥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출발할 때 서울시 의회 앞에, 지금의.

그 앞에서 환송식도 거창하게 큰 행사를 하고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군요.

당연히 가석방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몇 분 정도 희생되고 몇 분 정도 가석방이 실제로 된 게 있는지 어느 정도 나온 게 있나요?

-전체적으로 2000명이 갔다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저희 KBS가 언론을 통해서 최초로 공개한 문서인데요.

이게 당시에 하이난에 주둔했던 일본 사령관 고가 케이지라는 사람이 쓴 귀환보고서입니다.

전쟁이 다 끝나고 돌아오면서 보고를 한 그 문서인데요.

여기 보면 조선보급대라는 이름으로 분류가 된 게 총원 658명이 나오고 간수가 52명이고 그리고 수형자가 606명으로 나오는 거죠.

2000명 중에서 600명 정도는 돌아왔다라고, 이런 문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데.

여기에다 경성형무소에서 나온 가출옥 관계서류라는 서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출옥이 된 사유가 적혀 있는데 그때 해남도 파견 때문에 가출옥을 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현재 112명이 확인됩니다.

▼조선인 1,300여 명 대학살 추정▼

그러니까 600명에다가 112명까지 하면 700명 정도 되잖아요.

2000명 중에 700명 정도는 돌아왔다 그리고 한 100여 명 정도는 실제로 가출옥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이 가출옥 112명이라는 숫자는 사실 2000명 중에서는 5% 정도밖에 안 되는 숫자고 또 그나마도 1944년 7월 이후에는 이 서류가 남아 있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그때가 마지막으로 가출옥을 했고 전쟁이 심각해지자 이 약속을 폐기한 거죠.

-그런데 현장에 가보셨잖아요.

저희가 화면으로 보니까 그야말로 풀이 무성한 잡초지대처럼 돼 있는데, 아까 뭘 파시던데, 지금 발굴 같은 게 거의 안 이루어져 있는 상태인가요?

▼천인갱 발굴작업, 어디까지 진행됐나?▼

-2000년대 초반에 사실 여기를 조금 일부,아주 일부 발굴했었는데요.

그때 한 사업가가 추모비도 세우고 공원화 작업을 해야겠다고 좀 진행을 하다가 이 사업이 문제가 생기면서 현재는 그냥 일반 공터입니다.

-유해를 발굴한 건 전혀 없어요?

-유해를 조금 발굴했는데 한 100여 구 정도는 발굴했는데 그 발굴한 것들을 이 건물 안에 모아두고 거기에 추모비도 세우고 공원화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고 지금 저기 풀밭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고구마가 심어져 있거든요.

그 고구마가 주민들이 돼지사료로 쓰겠다고 해서 누군가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희생된 곳인데 거기에 돼지사료를 심고 있다니까.

우리가 어떻게 유골을 관리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

▼지금까지 발굴된 유골들은 어디에?▼

-지금 가장 큰 문제가 현장에서 발굴조사,진상조사를 해야 되는데 이 진상조사의 첫 단계는 발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중국과 협상을 해야 되는 문제기 때문에 그 벽에 막혀 있고요.

-왜요, 중국이 반대를 해요?

-중국이 일단 외국에서 들어와서 발굴조사를 하고 어떤 행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시민단체가 가는 건 좀 그럴 테고 정부 대 정부 차원으로 요구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요?

-그 협상이 현재는 진행 중인데 그 협상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는 외교 관계 문제기 때문에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고요.

다만 정부는 지금 중국과 천인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진상조사를 위한 발굴작업에 대한 협상을 현재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중국도 같이 공분하는 입장일 텐데.

아마 이게 어느 단위에서 진행이 되는지 몰라도 조금 높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우리 외교부에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까지는 취재가 아직 안 됐군요.

-일단 말로는 현재 그 상황을 파악하고 있고 또 중국과 계속 협의를 하고 있다라고 밝히고는 있지마는.

그런데 언제 구체적인 협상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가 가서 취재하고 일부 발굴하는 것처럼 화면을 찍으셨을 텐데.

그런 거에 대해서 중국 정부가 못 하게 막지는 않던가요?

-당시에는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요.

그러나 전면적인 발굴에는 사실 좀 어려움이 따릅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천인갱이 있던 지역이 사실은 거의 황무지와 같았던 지역이거든요.

그런데 최근에는 이곳에 개발바람이 불어서 사실 천인갱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이미 생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변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는 중이고요.

-땅은 국유지예요? 누구 걸로 돼 있어요?

-중국은 사실 전부 다 국유지죠.

-누군가가 시설을 이용하는지.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그 사업가 분이 그 땅을 임대를 해서.

-그분은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지금 그분은 연락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고.

당시 사업이 진행되다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서.

-이 부분을 꼭 좀 한번 확인을 해 보고 정부 차원에 좀 더 요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신제품을 야심차게 내놓았지만 오늘 삼성전자의 주가는 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한편 삼성그룹은 앞으로 2년 동안 3만명의 청년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 중요하죠.

그런데 지금은 천재 1명이 100만명을 먹여살리는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삼성의 신입사원들을 천재로 키워서, 잘 육성해서 시장을 놀래켜주기를 한번 기다려보겠습니다.

-시사진단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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