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폴란드인 감동시킨 독일의 사죄,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

입력 2015.08.18 (06:01) 수정 2015.08.18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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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4일부터 19일 간 진행된 '유라시아 친선특급' 행사는 러시아에서 출발해 폴란드를 거쳐 독일에서 마무리됐습니다. 대장정의 피날레 가운데서도 정점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열린 음악회 마지막 부분, 통일에 대한 천 명의 소망을 적은 조각천을 모아 만든 태극기가 펼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방송기자 입장에서는 꼭 카메라에 담아야 할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태극기를 화면에 잘 담는 게 말처럼 수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태극기가 관중들의 머리 위로, 말하자면 땅바닥과 거의 수평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결국 인근 건물 위에 올라가 비스듬히 촬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무대 위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살짝 들어 보이긴 했지만, 태극기가 뒤편의 참가자들이나 독일인들에게까지 잘 보이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태극기태극기


■ 태극기 한 번 펴는 것도 쉽지 않은 이유 “독일이어서…”

태극기를 아예 무대에 높이 걸거나 게양했다면 행사의 취지를 보여주기가 더 쉽지 않았을까요? 알고 보니 태극기 한 번 펴는 데도 여러가지 쉽지 않은 고려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고려 사항은 행사가 이뤄지는 곳이 '독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2차 대전을 일으키고 패전국이 된 역사를 갖고 있는 독일은 70년 간 처절한 반성의 역사를 거쳐온 곳입니다. 나치즘은 물론 과도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그런 독일, 그것도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는 국기 게양조차도 자칫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다는 고려가 작용했습니다. 또 통일을 주제로 한 행사에서 남,북한 가운데 한 곳의 국기만 펼쳐지는 것도 독일인들의 시각에는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계획대로 태극기를 선보이면서도 독일의 정서를 감안한 방향으로 태극기를 수평으로 펼치는 절충안이 마련된 겁니다.

■ 끊임없이 반성한 독일의 전후 70년…그 결과는?

독일이 과거사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사죄를 해 왔고, 나치에 대한 단호한 처단을 해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성의 역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까지는 잘 살펴본 적이 없었습니다. 독일 이전에 거쳐온 폴란드에서 보고 들은 결과는 꽤나 놀라웠습니다.

2차 대전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서부는 독일에 의해, 동부는 소련에 의해 점령돼 나라가 세 조각이 났던 게 폴란드입니다. 유대인 수용소로 유명한 '아우슈비츠'는 독일의 점령지역에 있었습니다. 폴란드 이름으로 '오시비엥침'이지만 독일 이름인 '아우슈비츠'로 더 유명한 이 수용소에는 나치에 저항하던 폴란드 정치범 15만 명 역시 끌려와 죽거나 고초를 당했습니다. 2차 대전 중 유대계 300만 명 뿐 아니라 민간인 244만 명 등 모두 560만 명의 폴란드인이 희생됐는데, 대부분은 나치 독일에 의한 희생이었습니다. 1944년 있었던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군에 처절히 진압당했고, 90%가 폭격으로 부서졌던 바르샤바 시내는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복구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폴란드인과 독일인 사이의 감정은 한국-일본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폴란드인의 75%가 독일에 호감을 갖고 있다'던 설문조사 결과는 사실인 듯 했습니다. 다양한 세대의 폴란드인들에게 인터뷰할 때마다 마지막에 물었던 질문 "독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에 대한 답변이 모두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독일과 그 때의 독일은 다르니까요. 나치는 나치고 지금의 독일은 그와 다릅니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됐다가 사망한 폴란드인 정치범들아우슈비츠에 수감됐다가 사망한 폴란드인 정치범들

▲ 아우슈비츠에 수감됐다가 사망한 폴란드인 정치범들


■ 무릎 꿇고 사죄한 독일…‘지도층 결단의 결과’

2차 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의 결정에 따라 폴란드는 소련이 점령했던 동부 지방을 소련에 넘겨주는 대신, 독일 영토였던 오데르-나이세강 까지의 서부 영토와 북부 동프러시아 지역을 보상받았습니다. 총 면적 11만 ㎢. 독일 전체 면적의 20%가 넘는, 남한 영토보다도 큰 영토였습니다. 이 곳에 살던 독일인 천만 명은 독일로 강제이주됐습니다.

공산국가가 된 폴란드는 동독과는 별다른 화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서독과는 달랐습니다. 60년대 폴란드와 독일, 두 나라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화해의 다리를 놓으려고 했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 동방정책을 펴던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해 유대인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었고, 80년대 말에는 폴란드에 빼앗긴 영토도 폴란드의 영토로 인정했습니다. 통일을 염두에 둔 가해국 지도층의 결단이었습니다. 폴란드도 화답합니다. 1939년, 불가침 조약 하에도 침략해왔던 독일의 과거를 덮어둔 채, 강대국 독일의 기초를 만들 '독일 통일'을 인정했습니다. 폴란드의 태도는 주변국의 승인 없이 통일이 불가능했던 독일의 통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나라의 달라진 관계는 상대국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로도 나타났습니다.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 진심 담긴 ‘사과’와 ‘포용’, 갈등을 넘다

지금의 상당수 폴란드인들에게 당시의 피해는 '독일'이 아닌 '나치'의 전쟁 범죄입니다. 더 이상 지금의 이웃 국가와 연관된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이 떠올랐습니다. 과거사에 갇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한일 관계, 조그마한 섬 독도에 대한 일본의 태도...

독일인들은 오늘의 독일을 어떻게 스스로 평가할까요? '친선특급' 행사에 참가했던 서른 살의 독일 외교관 야노프스키 씨는 "사과는 피해자가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반성의 역사 교육을 받은 신세대 독일인입니다. 지금의 독일인들은 과거의 나치를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꾸준히 반성해온 독일의 현재에 대해서만은 후대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릎을 꿇으며 70년이 지나도록 반성이 이뤄지지 않아 부끄럽다고 한 1947년생 하토야마 일본 전 총리가 머릿속에서 오버랩 됩니다.

어린 시절 전쟁도 겪었다는 노년의 한 폴란드인은 '독일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도 답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독일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도 나치에 부역했던 폴란드인을 처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70년 용서와 화해의 과정은 이제 가해자에 대한 미움을 딛고 내부의 과오를 제대로 돌아보는 자세를 보편적 정서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화해란 언제나 쉽게 깨질 수 있기에 아직도 화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는 폴란드와 독일이 부러웠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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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폴란드인 감동시킨 독일의 사죄,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
    • 입력 2015-08-18 06:01:00
    • 수정2015-08-18 06:08:12
    취재후·사건후
지난달 14일부터 19일 간 진행된 '유라시아 친선특급' 행사는 러시아에서 출발해 폴란드를 거쳐 독일에서 마무리됐습니다. 대장정의 피날레 가운데서도 정점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열린 음악회 마지막 부분, 통일에 대한 천 명의 소망을 적은 조각천을 모아 만든 태극기가 펼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방송기자 입장에서는 꼭 카메라에 담아야 할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태극기를 화면에 잘 담는 게 말처럼 수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태극기가 관중들의 머리 위로, 말하자면 땅바닥과 거의 수평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결국 인근 건물 위에 올라가 비스듬히 촬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무대 위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살짝 들어 보이긴 했지만, 태극기가 뒤편의 참가자들이나 독일인들에게까지 잘 보이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태극기
■ 태극기 한 번 펴는 것도 쉽지 않은 이유 “독일이어서…” 태극기를 아예 무대에 높이 걸거나 게양했다면 행사의 취지를 보여주기가 더 쉽지 않았을까요? 알고 보니 태극기 한 번 펴는 데도 여러가지 쉽지 않은 고려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고려 사항은 행사가 이뤄지는 곳이 '독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2차 대전을 일으키고 패전국이 된 역사를 갖고 있는 독일은 70년 간 처절한 반성의 역사를 거쳐온 곳입니다. 나치즘은 물론 과도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그런 독일, 그것도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는 국기 게양조차도 자칫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다는 고려가 작용했습니다. 또 통일을 주제로 한 행사에서 남,북한 가운데 한 곳의 국기만 펼쳐지는 것도 독일인들의 시각에는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계획대로 태극기를 선보이면서도 독일의 정서를 감안한 방향으로 태극기를 수평으로 펼치는 절충안이 마련된 겁니다. ■ 끊임없이 반성한 독일의 전후 70년…그 결과는? 독일이 과거사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사죄를 해 왔고, 나치에 대한 단호한 처단을 해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성의 역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까지는 잘 살펴본 적이 없었습니다. 독일 이전에 거쳐온 폴란드에서 보고 들은 결과는 꽤나 놀라웠습니다. 2차 대전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서부는 독일에 의해, 동부는 소련에 의해 점령돼 나라가 세 조각이 났던 게 폴란드입니다. 유대인 수용소로 유명한 '아우슈비츠'는 독일의 점령지역에 있었습니다. 폴란드 이름으로 '오시비엥침'이지만 독일 이름인 '아우슈비츠'로 더 유명한 이 수용소에는 나치에 저항하던 폴란드 정치범 15만 명 역시 끌려와 죽거나 고초를 당했습니다. 2차 대전 중 유대계 300만 명 뿐 아니라 민간인 244만 명 등 모두 560만 명의 폴란드인이 희생됐는데, 대부분은 나치 독일에 의한 희생이었습니다. 1944년 있었던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군에 처절히 진압당했고, 90%가 폭격으로 부서졌던 바르샤바 시내는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복구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폴란드인과 독일인 사이의 감정은 한국-일본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폴란드인의 75%가 독일에 호감을 갖고 있다'던 설문조사 결과는 사실인 듯 했습니다. 다양한 세대의 폴란드인들에게 인터뷰할 때마다 마지막에 물었던 질문 "독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에 대한 답변이 모두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독일과 그 때의 독일은 다르니까요. 나치는 나치고 지금의 독일은 그와 다릅니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됐다가 사망한 폴란드인 정치범들 ▲ 아우슈비츠에 수감됐다가 사망한 폴란드인 정치범들
■ 무릎 꿇고 사죄한 독일…‘지도층 결단의 결과’ 2차 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의 결정에 따라 폴란드는 소련이 점령했던 동부 지방을 소련에 넘겨주는 대신, 독일 영토였던 오데르-나이세강 까지의 서부 영토와 북부 동프러시아 지역을 보상받았습니다. 총 면적 11만 ㎢. 독일 전체 면적의 20%가 넘는, 남한 영토보다도 큰 영토였습니다. 이 곳에 살던 독일인 천만 명은 독일로 강제이주됐습니다. 공산국가가 된 폴란드는 동독과는 별다른 화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서독과는 달랐습니다. 60년대 폴란드와 독일, 두 나라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화해의 다리를 놓으려고 했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 동방정책을 펴던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해 유대인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었고, 80년대 말에는 폴란드에 빼앗긴 영토도 폴란드의 영토로 인정했습니다. 통일을 염두에 둔 가해국 지도층의 결단이었습니다. 폴란드도 화답합니다. 1939년, 불가침 조약 하에도 침략해왔던 독일의 과거를 덮어둔 채, 강대국 독일의 기초를 만들 '독일 통일'을 인정했습니다. 폴란드의 태도는 주변국의 승인 없이 통일이 불가능했던 독일의 통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나라의 달라진 관계는 상대국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로도 나타났습니다.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 진심 담긴 ‘사과’와 ‘포용’, 갈등을 넘다 지금의 상당수 폴란드인들에게 당시의 피해는 '독일'이 아닌 '나치'의 전쟁 범죄입니다. 더 이상 지금의 이웃 국가와 연관된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이 떠올랐습니다. 과거사에 갇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한일 관계, 조그마한 섬 독도에 대한 일본의 태도... 독일인들은 오늘의 독일을 어떻게 스스로 평가할까요? '친선특급' 행사에 참가했던 서른 살의 독일 외교관 야노프스키 씨는 "사과는 피해자가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반성의 역사 교육을 받은 신세대 독일인입니다. 지금의 독일인들은 과거의 나치를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꾸준히 반성해온 독일의 현재에 대해서만은 후대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릎을 꿇으며 70년이 지나도록 반성이 이뤄지지 않아 부끄럽다고 한 1947년생 하토야마 일본 전 총리가 머릿속에서 오버랩 됩니다. 어린 시절 전쟁도 겪었다는 노년의 한 폴란드인은 '독일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도 답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독일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도 나치에 부역했던 폴란드인을 처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70년 용서와 화해의 과정은 이제 가해자에 대한 미움을 딛고 내부의 과오를 제대로 돌아보는 자세를 보편적 정서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화해란 언제나 쉽게 깨질 수 있기에 아직도 화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는 폴란드와 독일이 부러웠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연관기사] ☞ [특파원 eye] 독일과 폴란드, 과거사 ‘화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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