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뉴스] 전태일 열사
입력 2015.11.08 (17:22)
수정 2015.11.0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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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22살의 한 봉제공장 재단사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가 외친 말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는 것이었다.
그는, 최소한의 법적보호도 받지 못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의 실태를 직접 조사해 알리려고 노력해왔다.
그 내용이 처음 보도된 건, 경향신문을 통해서였다.
<녹취> 경향신문(1970. 10.7) : "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거의 움직일틈이 없을 정도로 비좁다. 하루 13시간-16시간의 고된근무를 하고 있으며..."
기사가 나가자 외압도 있었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학원사태와 노동문제는 언론이 다룰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사직당국에서 사회부장 이런 분들을 그쪽에서 소환하고 기사를 쓴 기자를 대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그만큼 파장은 컸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근로자들이 경향신문 300부를 사가지고 청계천 모든 공장들에 뿌렸습니다. 이 기사가 나가면서 청계천 주변의 근로자들이 노동자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뭉치자 하는 그런 기운이 일면서..."
기사가 나가고 한달여 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열자며 동료들과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죽음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호소한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은 청계 피복 노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고 1970년대 노동운동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노동계의 어떤 절규를 넘어서 이 전체 사회에 우리 사회의 민주화,인간 해방운동의 하나의 불씨가 됐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가 외친 말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는 것이었다.
그는, 최소한의 법적보호도 받지 못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의 실태를 직접 조사해 알리려고 노력해왔다.
그 내용이 처음 보도된 건, 경향신문을 통해서였다.
<녹취> 경향신문(1970. 10.7) : "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거의 움직일틈이 없을 정도로 비좁다. 하루 13시간-16시간의 고된근무를 하고 있으며..."
기사가 나가자 외압도 있었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학원사태와 노동문제는 언론이 다룰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사직당국에서 사회부장 이런 분들을 그쪽에서 소환하고 기사를 쓴 기자를 대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그만큼 파장은 컸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근로자들이 경향신문 300부를 사가지고 청계천 모든 공장들에 뿌렸습니다. 이 기사가 나가면서 청계천 주변의 근로자들이 노동자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뭉치자 하는 그런 기운이 일면서..."
기사가 나가고 한달여 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열자며 동료들과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죽음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호소한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은 청계 피복 노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고 1970년대 노동운동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노동계의 어떤 절규를 넘어서 이 전체 사회에 우리 사회의 민주화,인간 해방운동의 하나의 불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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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뉴스] 전태일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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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5-11-08 17:25:01
- 수정2015-11-08 17:52:28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한 봉제공장 재단사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가 외친 말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는 것이었다.
그는, 최소한의 법적보호도 받지 못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의 실태를 직접 조사해 알리려고 노력해왔다.
그 내용이 처음 보도된 건, 경향신문을 통해서였다.
<녹취> 경향신문(1970. 10.7) : "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거의 움직일틈이 없을 정도로 비좁다. 하루 13시간-16시간의 고된근무를 하고 있으며..."
기사가 나가자 외압도 있었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학원사태와 노동문제는 언론이 다룰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사직당국에서 사회부장 이런 분들을 그쪽에서 소환하고 기사를 쓴 기자를 대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그만큼 파장은 컸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근로자들이 경향신문 300부를 사가지고 청계천 모든 공장들에 뿌렸습니다. 이 기사가 나가면서 청계천 주변의 근로자들이 노동자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뭉치자 하는 그런 기운이 일면서..."
기사가 나가고 한달여 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열자며 동료들과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죽음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호소한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은 청계 피복 노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고 1970년대 노동운동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노동계의 어떤 절규를 넘어서 이 전체 사회에 우리 사회의 민주화,인간 해방운동의 하나의 불씨가 됐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가 외친 말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는 것이었다.
그는, 최소한의 법적보호도 받지 못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의 실태를 직접 조사해 알리려고 노력해왔다.
그 내용이 처음 보도된 건, 경향신문을 통해서였다.
<녹취> 경향신문(1970. 10.7) : "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거의 움직일틈이 없을 정도로 비좁다. 하루 13시간-16시간의 고된근무를 하고 있으며..."
기사가 나가자 외압도 있었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학원사태와 노동문제는 언론이 다룰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사직당국에서 사회부장 이런 분들을 그쪽에서 소환하고 기사를 쓴 기자를 대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그만큼 파장은 컸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근로자들이 경향신문 300부를 사가지고 청계천 모든 공장들에 뿌렸습니다. 이 기사가 나가면서 청계천 주변의 근로자들이 노동자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뭉치자 하는 그런 기운이 일면서..."
기사가 나가고 한달여 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열자며 동료들과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죽음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호소한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은 청계 피복 노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고 1970년대 노동운동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인터뷰> 김명수(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노동계의 어떤 절규를 넘어서 이 전체 사회에 우리 사회의 민주화,인간 해방운동의 하나의 불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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