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45년 역사

입력 1990.08.1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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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범 앵커 :

판문점, 우리 내국인들에게는 40년 동안 남북의 설전장으로, 그리고 외국 사람들에게는 긴장의 현장을 보는 관광적 명소로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과 응어리가 맺힌 분단 40년의 역사, 판문점의 40년을 이동식 기자가 정리해 드립니다.


이동식 기자 :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개성동쪽 10킬로미터 떨어진 속칭 널물리가 1951년 이후 40년 동안 남과 북 분단의 한민족이 남남처럼 얼굴을 맞대어온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6.25 전에는 서울에서 의주로 가는 가도와 사천이라는 조그마한 강이 만나는 이름 없는 마을이었으나 1951년 10월 그때까지 개성에서 열리던 휴전회담이 이곳으로 옮겨져 열리면서 판문점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과 함께 현대 세계사에서 민족 분단을 상징하는 두 개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휴전 회담이 옮겨온 뒤 2년 동안의 지루한 논쟁과 파란곡절 끝에 53넌 7월 27일 남과 북이 전쟁을 쉬기로 합의하고 협정에 조인한 곳도 이곳이며 곧이어 8월과 9월 남북한의 포로가 교환된 곳도 이곳입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열림으로써 분단과 대립의 상징인 판문점은 그때 이후 통일과 이산가족 재회의 열망이 모여진 곳이었으며 또한 그때마다 실망과 분노가 교차된 곳이었습니다.

그동안 각종회담 때 북한대표들이, 그리고 지난해 임수경양과 문규현 신부가 북쪽에서부터 들어온 곳이기도 한 판문점은 이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이 활짝 열린 이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의 현장으로써 언제 그 장막이 걷힐지에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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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단 45년 역사
    • 입력 1990-08-14 21:00:00
    뉴스 9

박성범 앵커 :

판문점, 우리 내국인들에게는 40년 동안 남북의 설전장으로, 그리고 외국 사람들에게는 긴장의 현장을 보는 관광적 명소로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과 응어리가 맺힌 분단 40년의 역사, 판문점의 40년을 이동식 기자가 정리해 드립니다.


이동식 기자 :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개성동쪽 10킬로미터 떨어진 속칭 널물리가 1951년 이후 40년 동안 남과 북 분단의 한민족이 남남처럼 얼굴을 맞대어온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6.25 전에는 서울에서 의주로 가는 가도와 사천이라는 조그마한 강이 만나는 이름 없는 마을이었으나 1951년 10월 그때까지 개성에서 열리던 휴전회담이 이곳으로 옮겨져 열리면서 판문점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과 함께 현대 세계사에서 민족 분단을 상징하는 두 개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휴전 회담이 옮겨온 뒤 2년 동안의 지루한 논쟁과 파란곡절 끝에 53넌 7월 27일 남과 북이 전쟁을 쉬기로 합의하고 협정에 조인한 곳도 이곳이며 곧이어 8월과 9월 남북한의 포로가 교환된 곳도 이곳입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열림으로써 분단과 대립의 상징인 판문점은 그때 이후 통일과 이산가족 재회의 열망이 모여진 곳이었으며 또한 그때마다 실망과 분노가 교차된 곳이었습니다.

그동안 각종회담 때 북한대표들이, 그리고 지난해 임수경양과 문규현 신부가 북쪽에서부터 들어온 곳이기도 한 판문점은 이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이 활짝 열린 이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의 현장으로써 언제 그 장막이 걷힐지에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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