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서훈 논란②] 약산 김원봉은 北노동당 핵심 권력자?…오해와 사실들
입력 2019.04.08 (09:18)
수정 2019.04.1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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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선전 영상 중 김원봉 연설 장면 [출처 : KBS ‘인물현대사’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의열단 김원봉]
이 영상은 김원봉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가 1940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전 영상입니다. 중간에 조선의용대 대장이었던 김원봉의 육성 연설도 나옵니다.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고,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를 완전히 구축하자는 내용입니다. 이 시대에 음성까지 녹음된 영상은 흔치 않은데요. 조선의용대가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 영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대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의열단과 한국광복군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도 역임했습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는 않았습니다. 김원봉의 월북 후 행적 때문입니다. 김원봉은 해방 후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 자리에 올랐고 이후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냈습니다.
[연관기사] [김원봉 서훈 논란①] ‘뜨거운 인물’ 약산 김원봉…서훈할 것이냐 말 것이냐
김원봉의 서훈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다룬 지난 기사에 이어, 이번에는 김원봉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해방 전 어떤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어떤 길을 걸었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일부 잘못 알려진 부분도 바로잡으려 합니다. 이어서, 김원봉의 공적과 서훈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살펴보겠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지난 1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재적 검토'라는 주제로 연 학술토론회에 발표된 내용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무장 투쟁의 상징…'독립운동가' 김원봉
김원봉을 둘러싼 서훈 논란이 뜨겁지만, 서훈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그가 해방 전 독립운동을 하며 세운 공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김원봉은 우리가 존경하는 여러 다른 독립운동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9년, 그 유명한 '의열단'을 창립했습니다. 김원봉이 초대 단장이었습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암살 대상으로 설정하고 중요 기관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으로서,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1921년 조선총독부 투탄사건, 1922년 일본육군대장 암살미수사건 등 중요 거사를 지도했습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의열단의 투쟁이 한국 민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며, 이로 인해 "김원봉은 신채호, 안창호, 김규식, 한용운과 같은 급의 민족 지도자로 부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원봉은 준비 기간을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에 취임했습니다. 기사 첫머리에 실은 영상이 바로 이 조선의용대 활동기간에 촬영한 것입니다. 이후 김원봉은 1942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합류해 1944년에는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맡아 무장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중국에서 해방을 맞이한 김원봉은 1945년 12월 귀국합니다.
이 같은 내용을 정리해 발표한 염인호 교수는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쉼이 없었다"며, "특히 중국으로 간 후에는 귀국할 때까지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쟁과 휴식을 반복하고는 했는데 김원봉은 그 점에서 그들과 구분된다"며 김원봉의 독립운동 활동이 특별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염 교수는 또,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폭넓은 인맥이 특징"이라며,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 등 고위 당원들과 넓고 깊은 관계를 맺어 그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좌우 모두에서 인맥을 형성했음은 물론, 사상의 벽을 넘나들며 투쟁했다는 것입니다.
인공 초대 내각 장관…'노력훈장'도 받아
그렇다면, 월북 후 김원봉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풍문이나 전언을 제외하고, 기록으로 남은 김원봉의 행적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김원봉의 월북 시점은 1948년 4월 20일. 김원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으로 갔습니다. 남북협상 개막식 하루 전입니다. 남북협상에 참석한 김원봉은 회의가 끝난 후에도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게 됩니다.
이후 김원봉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에 취임했습니다. 국가검열상은 감찰, 감사 기능을 맡는 기관의 장(長)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감사원 기능을 하는 건데, 국가검열상은 장관급 직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없는 자리입니다.
그 후 김원봉은 6·25 전쟁기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를 맡았습니다. 1952년 3월 19일에는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기관 지도일꾼'으로 훈장도 받았는데, 김원봉이 받은 훈장은 최고 등급인 국기훈장보다 낮은 '로력(노력)훈장'이었습니다.
같은 해 5월,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서 해임되고 노동상에 임명됐습니다. 이후 1957년 9월 20일에는 내각 명단에서 제외됐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됐습니다. 1958년에는 환갑을 맞아 또 한 번의 '노력훈장'을 받았습니다.
김원봉의 마지막 공개 활동은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 참가한 것입니다. 김원봉은 이후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한의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북한 주재 소련 대사관의 문서 등에 김원봉이 직책에서 해임됐고, 체포 직전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하다 체포됐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김원봉은 北 노동당 핵심 권력자였나?
그렇다면 김원봉이 북한의 '핵심 권력자'였다는 세간의 평가는 맞는 걸까요? 초대 내각에서부터 장관급 직책을 맡았으니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립니다. 실제 전문가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먼저 사실부터 확인해보면, 일부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원봉은 북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노동당' 당원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노동당 핵심간부'라는 표현은 틀린 말이 됩니다. 약산 김원봉은 노동당에 가입한 적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군소 정당인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당시 북에는 이름의 한자까지 같은 김원봉(金元鳳)이 여럿 있었는데, 노동당원인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함남적색농조사건으로 3년간 수감된 적 있는 다른 인물입니다. 이 김원봉은 조선노동당 강원도당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약산 김원봉과 비슷한 시기인 1959년에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숙청 시기까지 겹치다 보니, 약산 김원봉이 노동당에 가입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북한 권력 구조의 특성상, 노동당의 당원이 아니고서는 핵심 권력이 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북한사 전문가인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북한이 추구하는 건 당국가 시스템"이라며, "(노동당원이 아닌) 김원봉이 맡은 직책은 사실 권력의 핵심이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광운 연구관은 "김원봉이 1948년 무렵에는 민족해방운동의 대표 인물로 대우받았으나 북한 사회가 변화하면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덧붙였습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원봉이 조선인민공화당이라는 군소정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다면, 국가검열상이라는 직책을 맡아도 큰 영향력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성장 박사 역시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직책이 바뀌면서 점점 덜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됐다고 봤습니다. 특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그 이름과는 달리 실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많지 않은 상징적 직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김원봉이 6·25 전쟁 개전 결정에 참여한 주요 권력자일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원봉이 맡은 직책이 권력의 중심과는 떨어져 있고, 특히 노동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김원봉이 전쟁기 받은 훈장 역시 군사적 공로라기보다는 후방에서 군량미를 생산하는 등의 기여 때문이었다고 평가됩니다.
다만, 이 모든 내용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김광운 연구관 역시 김원봉이 북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기여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김원봉이 인공 초대 내각에서 장관급 자리를 맡았고, 헌법 제정 시에도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월북 독립운동가이자 숙청된 민족주의자"
정리하자면, 김원봉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월북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북한 권력 주변부에 머물렀던 '숙청된 민족주의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김원봉을 서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선 후자를 강조합니다.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이 확실한 데다, 북한에서도 결국 숙청당한 인물 아니냐는 것입니다. 일각에서 '김원봉을 서훈하면 김일성도 서훈해야 하느냐'고 지적하는 데 대한 답으로 내놓는 주장입니다.
이헌환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한제국과 임시정부, 현재의 정부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규범적 연속성을 강조하며, 미래를 생각할 때 "남북한을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에서 이들의 행위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남한 정부라도 먼저 과감하게 월북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과 보훈을 개방하게 된다면 통일 한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북한 정권에 기여한 자라 해서 배제하더라도, 숙청 등으로 북한 정권에서 배제된 자들은 그 나름의 공적을 평가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절차적으로 '월북 독립운동가'를 서훈에서 배제하는 심사 규정 자체가 상위법과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김창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훈법이나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에서 이와 같은 배제 원칙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보훈처가 채택한 심사규정은 법이 정한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이미 복권…서훈은 보수적으로"
물론 전문가 중에서도 서훈에 반대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김원봉은 이제 사회적으로는 복권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국가적으로 '훈장'을 주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한민국'의 훈장인데, 북한 정권에 한때나마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할 이유가 있느냐는 문제 제기입니다.
김희곤 안동대학교 교수는 "포상은 정책을 앞질러가기보다는 가장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김 교수는 "김원봉보다 훨씬 덜한 북한 관련 의심 행적으로도 훈장을 못 받은 분들이 많다"며, "일정한 기준을 적용해서 추진해야지, 김원봉이라는 특정 인물을 포상하기 위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희곤 교수는 "2005년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경력자에게도 상훈을 개방했는데, 2004년 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결정은 반대 없이 진행되어야 맞다는 취지의 주장입니다. 그 당시에도 김원봉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끝내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됐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번 논란은 김원봉이라는 특별한 한 인물에 대한 서훈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월북 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올해, 3·1 운동 100주년을 즈음해 논란에 불이 붙었으니,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리고 11월에 있을 의열단 창단 100주년에도 또 거론될 것으로 보입니다. 더 외면하기에는 오래된 사안이고, 결국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이 영상은 김원봉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가 1940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전 영상입니다. 중간에 조선의용대 대장이었던 김원봉의 육성 연설도 나옵니다.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고,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를 완전히 구축하자는 내용입니다. 이 시대에 음성까지 녹음된 영상은 흔치 않은데요. 조선의용대가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 영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대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의열단과 한국광복군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도 역임했습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는 않았습니다. 김원봉의 월북 후 행적 때문입니다. 김원봉은 해방 후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 자리에 올랐고 이후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냈습니다.
[연관기사] [김원봉 서훈 논란①] ‘뜨거운 인물’ 약산 김원봉…서훈할 것이냐 말 것이냐
김원봉의 서훈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다룬 지난 기사에 이어, 이번에는 김원봉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해방 전 어떤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어떤 길을 걸었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일부 잘못 알려진 부분도 바로잡으려 합니다. 이어서, 김원봉의 공적과 서훈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살펴보겠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지난 1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재적 검토'라는 주제로 연 학술토론회에 발표된 내용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무장 투쟁의 상징…'독립운동가' 김원봉
김원봉을 둘러싼 서훈 논란이 뜨겁지만, 서훈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그가 해방 전 독립운동을 하며 세운 공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김원봉은 우리가 존경하는 여러 다른 독립운동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9년, 그 유명한 '의열단'을 창립했습니다. 김원봉이 초대 단장이었습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암살 대상으로 설정하고 중요 기관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으로서,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1921년 조선총독부 투탄사건, 1922년 일본육군대장 암살미수사건 등 중요 거사를 지도했습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의열단의 투쟁이 한국 민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며, 이로 인해 "김원봉은 신채호, 안창호, 김규식, 한용운과 같은 급의 민족 지도자로 부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원봉은 준비 기간을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에 취임했습니다. 기사 첫머리에 실은 영상이 바로 이 조선의용대 활동기간에 촬영한 것입니다. 이후 김원봉은 1942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합류해 1944년에는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맡아 무장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중국에서 해방을 맞이한 김원봉은 1945년 12월 귀국합니다.
이 같은 내용을 정리해 발표한 염인호 교수는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쉼이 없었다"며, "특히 중국으로 간 후에는 귀국할 때까지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쟁과 휴식을 반복하고는 했는데 김원봉은 그 점에서 그들과 구분된다"며 김원봉의 독립운동 활동이 특별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염 교수는 또,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폭넓은 인맥이 특징"이라며,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 등 고위 당원들과 넓고 깊은 관계를 맺어 그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좌우 모두에서 인맥을 형성했음은 물론, 사상의 벽을 넘나들며 투쟁했다는 것입니다.
인공 초대 내각 장관…'노력훈장'도 받아
그렇다면, 월북 후 김원봉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풍문이나 전언을 제외하고, 기록으로 남은 김원봉의 행적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김원봉의 월북 시점은 1948년 4월 20일. 김원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으로 갔습니다. 남북협상 개막식 하루 전입니다. 남북협상에 참석한 김원봉은 회의가 끝난 후에도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게 됩니다.
이후 김원봉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에 취임했습니다. 국가검열상은 감찰, 감사 기능을 맡는 기관의 장(長)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감사원 기능을 하는 건데, 국가검열상은 장관급 직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없는 자리입니다.
그 후 김원봉은 6·25 전쟁기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를 맡았습니다. 1952년 3월 19일에는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기관 지도일꾼'으로 훈장도 받았는데, 김원봉이 받은 훈장은 최고 등급인 국기훈장보다 낮은 '로력(노력)훈장'이었습니다.
같은 해 5월,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서 해임되고 노동상에 임명됐습니다. 이후 1957년 9월 20일에는 내각 명단에서 제외됐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됐습니다. 1958년에는 환갑을 맞아 또 한 번의 '노력훈장'을 받았습니다.
김원봉의 마지막 공개 활동은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 참가한 것입니다. 김원봉은 이후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한의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북한 주재 소련 대사관의 문서 등에 김원봉이 직책에서 해임됐고, 체포 직전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하다 체포됐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김원봉은 北 노동당 핵심 권력자였나?
그렇다면 김원봉이 북한의 '핵심 권력자'였다는 세간의 평가는 맞는 걸까요? 초대 내각에서부터 장관급 직책을 맡았으니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립니다. 실제 전문가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먼저 사실부터 확인해보면, 일부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원봉은 북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노동당' 당원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노동당 핵심간부'라는 표현은 틀린 말이 됩니다. 약산 김원봉은 노동당에 가입한 적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군소 정당인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당시 북에는 이름의 한자까지 같은 김원봉(金元鳳)이 여럿 있었는데, 노동당원인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함남적색농조사건으로 3년간 수감된 적 있는 다른 인물입니다. 이 김원봉은 조선노동당 강원도당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약산 김원봉과 비슷한 시기인 1959년에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숙청 시기까지 겹치다 보니, 약산 김원봉이 노동당에 가입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원봉의 성명 [‘노동신문’ 1948년 12월 1일]
북한 권력 구조의 특성상, 노동당의 당원이 아니고서는 핵심 권력이 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북한사 전문가인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북한이 추구하는 건 당국가 시스템"이라며, "(노동당원이 아닌) 김원봉이 맡은 직책은 사실 권력의 핵심이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광운 연구관은 "김원봉이 1948년 무렵에는 민족해방운동의 대표 인물로 대우받았으나 북한 사회가 변화하면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덧붙였습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원봉이 조선인민공화당이라는 군소정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다면, 국가검열상이라는 직책을 맡아도 큰 영향력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성장 박사 역시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직책이 바뀌면서 점점 덜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됐다고 봤습니다. 특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그 이름과는 달리 실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많지 않은 상징적 직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김원봉이 6·25 전쟁 개전 결정에 참여한 주요 권력자일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원봉이 맡은 직책이 권력의 중심과는 떨어져 있고, 특히 노동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김원봉이 전쟁기 받은 훈장 역시 군사적 공로라기보다는 후방에서 군량미를 생산하는 등의 기여 때문이었다고 평가됩니다.
다만, 이 모든 내용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김광운 연구관 역시 김원봉이 북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기여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김원봉이 인공 초대 내각에서 장관급 자리를 맡았고, 헌법 제정 시에도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1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재적 검토’ 학술토론회
"월북 독립운동가이자 숙청된 민족주의자"
정리하자면, 김원봉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월북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북한 권력 주변부에 머물렀던 '숙청된 민족주의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김원봉을 서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선 후자를 강조합니다.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이 확실한 데다, 북한에서도 결국 숙청당한 인물 아니냐는 것입니다. 일각에서 '김원봉을 서훈하면 김일성도 서훈해야 하느냐'고 지적하는 데 대한 답으로 내놓는 주장입니다.
이헌환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한제국과 임시정부, 현재의 정부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규범적 연속성을 강조하며, 미래를 생각할 때 "남북한을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에서 이들의 행위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남한 정부라도 먼저 과감하게 월북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과 보훈을 개방하게 된다면 통일 한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북한 정권에 기여한 자라 해서 배제하더라도, 숙청 등으로 북한 정권에서 배제된 자들은 그 나름의 공적을 평가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절차적으로 '월북 독립운동가'를 서훈에서 배제하는 심사 규정 자체가 상위법과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김창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훈법이나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에서 이와 같은 배제 원칙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보훈처가 채택한 심사규정은 법이 정한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이미 복권…서훈은 보수적으로"
물론 전문가 중에서도 서훈에 반대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김원봉은 이제 사회적으로는 복권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국가적으로 '훈장'을 주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한민국'의 훈장인데, 북한 정권에 한때나마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할 이유가 있느냐는 문제 제기입니다.
김희곤 안동대학교 교수는 "포상은 정책을 앞질러가기보다는 가장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김 교수는 "김원봉보다 훨씬 덜한 북한 관련 의심 행적으로도 훈장을 못 받은 분들이 많다"며, "일정한 기준을 적용해서 추진해야지, 김원봉이라는 특정 인물을 포상하기 위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희곤 교수는 "2005년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경력자에게도 상훈을 개방했는데, 2004년 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결정은 반대 없이 진행되어야 맞다는 취지의 주장입니다. 그 당시에도 김원봉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끝내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됐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번 논란은 김원봉이라는 특별한 한 인물에 대한 서훈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월북 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올해, 3·1 운동 100주년을 즈음해 논란에 불이 붙었으니,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리고 11월에 있을 의열단 창단 100주년에도 또 거론될 것으로 보입니다. 더 외면하기에는 오래된 사안이고, 결국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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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봉 서훈 논란②] 약산 김원봉은 北노동당 핵심 권력자?…오해와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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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4-08 09:18:57
- 수정2019-04-10 19:26:39
조선의용대 선전 영상 중 김원봉 연설 장면 [출처 : KBS ‘인물현대사’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의열단 김원봉]
이 영상은 김원봉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가 1940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전 영상입니다. 중간에 조선의용대 대장이었던 김원봉의 육성 연설도 나옵니다.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고,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를 완전히 구축하자는 내용입니다. 이 시대에 음성까지 녹음된 영상은 흔치 않은데요. 조선의용대가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 영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대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의열단과 한국광복군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도 역임했습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는 않았습니다. 김원봉의 월북 후 행적 때문입니다. 김원봉은 해방 후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 자리에 올랐고 이후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냈습니다.
[연관기사] [김원봉 서훈 논란①] ‘뜨거운 인물’ 약산 김원봉…서훈할 것이냐 말 것이냐
김원봉의 서훈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다룬 지난 기사에 이어, 이번에는 김원봉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해방 전 어떤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어떤 길을 걸었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일부 잘못 알려진 부분도 바로잡으려 합니다. 이어서, 김원봉의 공적과 서훈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살펴보겠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지난 1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재적 검토'라는 주제로 연 학술토론회에 발표된 내용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무장 투쟁의 상징…'독립운동가' 김원봉
김원봉을 둘러싼 서훈 논란이 뜨겁지만, 서훈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그가 해방 전 독립운동을 하며 세운 공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김원봉은 우리가 존경하는 여러 다른 독립운동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9년, 그 유명한 '의열단'을 창립했습니다. 김원봉이 초대 단장이었습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암살 대상으로 설정하고 중요 기관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으로서,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1921년 조선총독부 투탄사건, 1922년 일본육군대장 암살미수사건 등 중요 거사를 지도했습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의열단의 투쟁이 한국 민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며, 이로 인해 "김원봉은 신채호, 안창호, 김규식, 한용운과 같은 급의 민족 지도자로 부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원봉은 준비 기간을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에 취임했습니다. 기사 첫머리에 실은 영상이 바로 이 조선의용대 활동기간에 촬영한 것입니다. 이후 김원봉은 1942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합류해 1944년에는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맡아 무장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중국에서 해방을 맞이한 김원봉은 1945년 12월 귀국합니다.
이 같은 내용을 정리해 발표한 염인호 교수는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쉼이 없었다"며, "특히 중국으로 간 후에는 귀국할 때까지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쟁과 휴식을 반복하고는 했는데 김원봉은 그 점에서 그들과 구분된다"며 김원봉의 독립운동 활동이 특별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염 교수는 또,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폭넓은 인맥이 특징"이라며,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 등 고위 당원들과 넓고 깊은 관계를 맺어 그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좌우 모두에서 인맥을 형성했음은 물론, 사상의 벽을 넘나들며 투쟁했다는 것입니다.
인공 초대 내각 장관…'노력훈장'도 받아
그렇다면, 월북 후 김원봉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풍문이나 전언을 제외하고, 기록으로 남은 김원봉의 행적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김원봉의 월북 시점은 1948년 4월 20일. 김원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으로 갔습니다. 남북협상 개막식 하루 전입니다. 남북협상에 참석한 김원봉은 회의가 끝난 후에도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게 됩니다.
이후 김원봉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에 취임했습니다. 국가검열상은 감찰, 감사 기능을 맡는 기관의 장(長)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감사원 기능을 하는 건데, 국가검열상은 장관급 직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없는 자리입니다.
그 후 김원봉은 6·25 전쟁기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를 맡았습니다. 1952년 3월 19일에는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기관 지도일꾼'으로 훈장도 받았는데, 김원봉이 받은 훈장은 최고 등급인 국기훈장보다 낮은 '로력(노력)훈장'이었습니다.
같은 해 5월,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서 해임되고 노동상에 임명됐습니다. 이후 1957년 9월 20일에는 내각 명단에서 제외됐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됐습니다. 1958년에는 환갑을 맞아 또 한 번의 '노력훈장'을 받았습니다.
김원봉의 마지막 공개 활동은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 참가한 것입니다. 김원봉은 이후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한의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북한 주재 소련 대사관의 문서 등에 김원봉이 직책에서 해임됐고, 체포 직전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하다 체포됐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김원봉은 北 노동당 핵심 권력자였나?
그렇다면 김원봉이 북한의 '핵심 권력자'였다는 세간의 평가는 맞는 걸까요? 초대 내각에서부터 장관급 직책을 맡았으니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립니다. 실제 전문가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먼저 사실부터 확인해보면, 일부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원봉은 북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노동당' 당원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노동당 핵심간부'라는 표현은 틀린 말이 됩니다. 약산 김원봉은 노동당에 가입한 적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군소 정당인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당시 북에는 이름의 한자까지 같은 김원봉(金元鳳)이 여럿 있었는데, 노동당원인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함남적색농조사건으로 3년간 수감된 적 있는 다른 인물입니다. 이 김원봉은 조선노동당 강원도당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약산 김원봉과 비슷한 시기인 1959년에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숙청 시기까지 겹치다 보니, 약산 김원봉이 노동당에 가입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북한 권력 구조의 특성상, 노동당의 당원이 아니고서는 핵심 권력이 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북한사 전문가인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북한이 추구하는 건 당국가 시스템"이라며, "(노동당원이 아닌) 김원봉이 맡은 직책은 사실 권력의 핵심이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광운 연구관은 "김원봉이 1948년 무렵에는 민족해방운동의 대표 인물로 대우받았으나 북한 사회가 변화하면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덧붙였습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원봉이 조선인민공화당이라는 군소정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다면, 국가검열상이라는 직책을 맡아도 큰 영향력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성장 박사 역시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직책이 바뀌면서 점점 덜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됐다고 봤습니다. 특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그 이름과는 달리 실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많지 않은 상징적 직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김원봉이 6·25 전쟁 개전 결정에 참여한 주요 권력자일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원봉이 맡은 직책이 권력의 중심과는 떨어져 있고, 특히 노동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김원봉이 전쟁기 받은 훈장 역시 군사적 공로라기보다는 후방에서 군량미를 생산하는 등의 기여 때문이었다고 평가됩니다.
다만, 이 모든 내용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김광운 연구관 역시 김원봉이 북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기여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김원봉이 인공 초대 내각에서 장관급 자리를 맡았고, 헌법 제정 시에도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월북 독립운동가이자 숙청된 민족주의자"
정리하자면, 김원봉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월북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북한 권력 주변부에 머물렀던 '숙청된 민족주의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김원봉을 서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선 후자를 강조합니다.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이 확실한 데다, 북한에서도 결국 숙청당한 인물 아니냐는 것입니다. 일각에서 '김원봉을 서훈하면 김일성도 서훈해야 하느냐'고 지적하는 데 대한 답으로 내놓는 주장입니다.
이헌환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한제국과 임시정부, 현재의 정부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규범적 연속성을 강조하며, 미래를 생각할 때 "남북한을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에서 이들의 행위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남한 정부라도 먼저 과감하게 월북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과 보훈을 개방하게 된다면 통일 한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북한 정권에 기여한 자라 해서 배제하더라도, 숙청 등으로 북한 정권에서 배제된 자들은 그 나름의 공적을 평가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절차적으로 '월북 독립운동가'를 서훈에서 배제하는 심사 규정 자체가 상위법과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김창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훈법이나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에서 이와 같은 배제 원칙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보훈처가 채택한 심사규정은 법이 정한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이미 복권…서훈은 보수적으로"
물론 전문가 중에서도 서훈에 반대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김원봉은 이제 사회적으로는 복권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국가적으로 '훈장'을 주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한민국'의 훈장인데, 북한 정권에 한때나마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할 이유가 있느냐는 문제 제기입니다.
김희곤 안동대학교 교수는 "포상은 정책을 앞질러가기보다는 가장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김 교수는 "김원봉보다 훨씬 덜한 북한 관련 의심 행적으로도 훈장을 못 받은 분들이 많다"며, "일정한 기준을 적용해서 추진해야지, 김원봉이라는 특정 인물을 포상하기 위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희곤 교수는 "2005년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경력자에게도 상훈을 개방했는데, 2004년 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결정은 반대 없이 진행되어야 맞다는 취지의 주장입니다. 그 당시에도 김원봉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끝내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됐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번 논란은 김원봉이라는 특별한 한 인물에 대한 서훈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월북 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올해, 3·1 운동 100주년을 즈음해 논란에 불이 붙었으니,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리고 11월에 있을 의열단 창단 100주년에도 또 거론될 것으로 보입니다. 더 외면하기에는 오래된 사안이고, 결국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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