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논쟁·대화 계기…‘조문 정국’

입력 2019.06.22 (08:08) 수정 2019.06.2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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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최근 고 이희호 여사 장례식에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할 지 여부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남북관계에서 조문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실제 남북관계에서 조문은 단순히 예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큰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번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남북 간 조문의 역사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2011년 12월, 평양 금수산궁전.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 사이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안치 장소에 들어선 인물. 김정은 위원장이었다.

상주이자 동시에 북한의 젊은 새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에게 쏟아진 관심은 뜨거웠다.

북한 매체를 통해 공개된 김 위원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각별한 의미와 의도로 해석됐다.

그런데 당시 이런 김위원장을 가장 처음 마주한 남측 인사는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였다.

김정일 위원장을 조문한 이희호 여사에게 먼저 다가와 두 손을 붙잡는 김정은 위원장.

두 사람의 모습은 상주와 조문객 사이를 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은 남과 북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8년 후. 이희호 여사의 타계 소식에 이번엔 김정은 위원장 명의의 조의문과 조화가 전달됐다.

조의문과 조화는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제1부부장이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으로 내려와 직접 건넸다.

[정의용/청와대 국가안보실장 : "이희호 여사님의 그간의 민족 간의 화합과 협력을 위해서 애쓰신 뜻을 받들어서 남북간의 협력을 계속해 나가기를 바란다는 그런 취지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외교적인 차원에서 조의정치도 있고 또 축전정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친서정치도 있죠. 이런 조의, 조문 이것이 어찌보면 하나의 마음이랄까요. 이런 것의 일원인데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남북간 실질적인 조문의 시작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핵을 둘러싼 갈등으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중재를 위해 전격적인 방북 길에 올랐다.

[지미 카터/전 미국대통령 : "이렇게 다시 와서 주석 각하를 만나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주석 : "감사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핵 개발 계획 일시 동결과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약속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분단 이래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김영삼/전 대통령 : "이제 장소하고 시간만 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 만나자, 어디서 만나자. 이것만 이제 합의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불과 보름 가량 남겨뒀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발표/1994년 7월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 공개 직후부터 상황은 급반전된다.

정상회담의 불발은 물론, 조문단 파견을 두고 남측 정치권에서 날선 공방이 시작 된 것이다.

[이부영/당시 민주당 의원 :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김영삼 대통령은 상중인 김정일에게 첫인사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어차피 대화를 하려고 한다면 최소한의 언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김무설/당시 민자당 의원 : "북한주민들이 동상 앞에 엎드려 땅을 치고 통곡하니까 우리도 따라해야 한다는 위선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반북 국민정서로 번졌다고 판단했던 김영삼 정부는 민간 차원의 조문을 공식 금지하고,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남북관계는 다시 요동쳤다.

[박지원/민주평화당 의원 : "물론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에 정상회담을 합의했지만 갑작스런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김영삼 대통령 자신부터 굉장히 맹공을 했잖아요. 그리고 우리 국민들 분위기도 사실 좀 좋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이때 이부영 의원이 조문을 가야 된다고 주장을 했는데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어요."]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남북 관계는 또 한 번 변환점을 맞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햇볕정책, 남북경협과 같은 한반도의 새로운 이정표가 제시된 것이다.

금강산의 문이 열렸고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도 개최됐다.

화해 분위기는 남북간 조문 방식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2001년 3월24일, KBS뉴스9 : "분단사상 처음으로 북한 조문사절단이 서울에 왔습니다."]

2001년 3월, 남북경협의 주역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북한당국이 즉각 조문단을 파견한 것이다.

[송호경/당시 북한 조문단장 : "북남 사이의 화해와 협력, 민족 대단결과 통일 애국사업에 기여한 정주영 선생의 사망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보는 조문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조문단 대표인 송호경 아태평화 부위원장은 우리측 고위 당국자를 만나 남북한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했다.

조문을 계기로한 방문이 곧 정치적 대화로 이어짐을 확인 시켜주는 대목이었다.

이후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도 북한 당국은 신속히 관련 소식을 전하고 조전을 타전했다.

그리고 석 달 뒤,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 때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조문단 파견 의사를 알려왔다.

[조선중앙TV/2009년 8월 : "특사조의방문단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8월 21일부터 22일까지 서울을 방문하게 된다."]

김기남 노동당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의 중량감 있는 인사로 꾸려진 조문단.

[김기남/당시 북한 조문단장 :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잃은 슬픔을 같이 나누자고 저희들이 이렇게 왔습니다."]

예상대로 조문단은 특사단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남북 고위급 접촉이 조문단을 통해 이루어졌고, 북측 조문단이 일정을 하루 연장하면서 대통령 면담까지 성사 됐다.

[김기남/당시 북한 조문단장 : "우리 특사 조의 방문단을 만나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박지원/민주평화당 의원 : "그 필요성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했어요. 출발을 하루 연기해가지고 반드시 청와대를 방문하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그런 대화와 남북교류협력의 필요성을 설명해라. 그래서 하루를 연기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청와대로 방문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저는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서거하셔서도 남북관계의 끈을 이어주는구나..."]

당시 조문단의 대통령 면담은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경색됐던 남북 관계에 대화와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았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 조금 주춤하는 그런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조문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남북 간의 이런 체제 정상 간의 대화랄까요. 그런 거까지도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겠냐.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어찌보면 김대중 대통령 서거에 대한 조문은 조문 정치의 아주 중요한 형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그렇게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이 잇따라 발발하면서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고,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에도 정부차원의 조문단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 김대중 대통령을 떠나보낸 이희호 여사와 북측 조문단이 나눈 짧은 대화.

[故이희호 여사/2009년 8월 : "한 민족이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협력하는 그러한 일이 새롭게 전개되기를 바랍니다."]

[김기남/당시 북한 조문단장 : "북남관계의 개선을 우리가 꼭 성취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대화에 남북 간 조문을 계기로한 소통의 존재이유가 담겨 있는지 모른다. 오랜 기간 남북 대화의 중심에서 활약해온 정치 인사 역시 이희호 여사에게 전달된 북한의 조의에서 긍정의 메시지를 끌어 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박지원/민주평화당 의원 : "제가 그 자리에서 얘기했지만 하노이 북미회담 후 사실상 고위급 제1부부장과 국가안보실장이 회담하는 것 아니냐. 이 분위기를 살려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져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제가 김여정 부부장을 빤히 쳐다보고 얘기를 하는데 잔잔하게 좋은 반응의 미소를 가지고 듣더니 아주 단호하게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이희호 여사님의 유지를 받드는 길입니다라고 해서 굉장히 좋은 반응이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논쟁을, 때로는 대화의 계기가 되는 남북 간 조문 역사... 위로와 고마움을 나누는 남과 북의 만남이 다시 한 번 화해와 협력의 길로 이어지길 기대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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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논쟁·대화 계기…‘조문 정국’
    • 입력 2019-06-22 08:24:28
    • 수정2019-06-22 08:40:30
    남북의 창
[앵커]

최근 고 이희호 여사 장례식에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할 지 여부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남북관계에서 조문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실제 남북관계에서 조문은 단순히 예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큰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번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남북 간 조문의 역사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2011년 12월, 평양 금수산궁전.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 사이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안치 장소에 들어선 인물. 김정은 위원장이었다.

상주이자 동시에 북한의 젊은 새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에게 쏟아진 관심은 뜨거웠다.

북한 매체를 통해 공개된 김 위원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각별한 의미와 의도로 해석됐다.

그런데 당시 이런 김위원장을 가장 처음 마주한 남측 인사는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였다.

김정일 위원장을 조문한 이희호 여사에게 먼저 다가와 두 손을 붙잡는 김정은 위원장.

두 사람의 모습은 상주와 조문객 사이를 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은 남과 북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8년 후. 이희호 여사의 타계 소식에 이번엔 김정은 위원장 명의의 조의문과 조화가 전달됐다.

조의문과 조화는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제1부부장이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으로 내려와 직접 건넸다.

[정의용/청와대 국가안보실장 : "이희호 여사님의 그간의 민족 간의 화합과 협력을 위해서 애쓰신 뜻을 받들어서 남북간의 협력을 계속해 나가기를 바란다는 그런 취지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외교적인 차원에서 조의정치도 있고 또 축전정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친서정치도 있죠. 이런 조의, 조문 이것이 어찌보면 하나의 마음이랄까요. 이런 것의 일원인데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남북간 실질적인 조문의 시작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핵을 둘러싼 갈등으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중재를 위해 전격적인 방북 길에 올랐다.

[지미 카터/전 미국대통령 : "이렇게 다시 와서 주석 각하를 만나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주석 : "감사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핵 개발 계획 일시 동결과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약속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분단 이래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김영삼/전 대통령 : "이제 장소하고 시간만 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 만나자, 어디서 만나자. 이것만 이제 합의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불과 보름 가량 남겨뒀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발표/1994년 7월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 공개 직후부터 상황은 급반전된다.

정상회담의 불발은 물론, 조문단 파견을 두고 남측 정치권에서 날선 공방이 시작 된 것이다.

[이부영/당시 민주당 의원 :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김영삼 대통령은 상중인 김정일에게 첫인사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어차피 대화를 하려고 한다면 최소한의 언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김무설/당시 민자당 의원 : "북한주민들이 동상 앞에 엎드려 땅을 치고 통곡하니까 우리도 따라해야 한다는 위선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반북 국민정서로 번졌다고 판단했던 김영삼 정부는 민간 차원의 조문을 공식 금지하고,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남북관계는 다시 요동쳤다.

[박지원/민주평화당 의원 : "물론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에 정상회담을 합의했지만 갑작스런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김영삼 대통령 자신부터 굉장히 맹공을 했잖아요. 그리고 우리 국민들 분위기도 사실 좀 좋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이때 이부영 의원이 조문을 가야 된다고 주장을 했는데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어요."]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남북 관계는 또 한 번 변환점을 맞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햇볕정책, 남북경협과 같은 한반도의 새로운 이정표가 제시된 것이다.

금강산의 문이 열렸고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도 개최됐다.

화해 분위기는 남북간 조문 방식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2001년 3월24일, KBS뉴스9 : "분단사상 처음으로 북한 조문사절단이 서울에 왔습니다."]

2001년 3월, 남북경협의 주역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북한당국이 즉각 조문단을 파견한 것이다.

[송호경/당시 북한 조문단장 : "북남 사이의 화해와 협력, 민족 대단결과 통일 애국사업에 기여한 정주영 선생의 사망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보는 조문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조문단 대표인 송호경 아태평화 부위원장은 우리측 고위 당국자를 만나 남북한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했다.

조문을 계기로한 방문이 곧 정치적 대화로 이어짐을 확인 시켜주는 대목이었다.

이후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도 북한 당국은 신속히 관련 소식을 전하고 조전을 타전했다.

그리고 석 달 뒤,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 때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조문단 파견 의사를 알려왔다.

[조선중앙TV/2009년 8월 : "특사조의방문단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8월 21일부터 22일까지 서울을 방문하게 된다."]

김기남 노동당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의 중량감 있는 인사로 꾸려진 조문단.

[김기남/당시 북한 조문단장 :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잃은 슬픔을 같이 나누자고 저희들이 이렇게 왔습니다."]

예상대로 조문단은 특사단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남북 고위급 접촉이 조문단을 통해 이루어졌고, 북측 조문단이 일정을 하루 연장하면서 대통령 면담까지 성사 됐다.

[김기남/당시 북한 조문단장 : "우리 특사 조의 방문단을 만나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박지원/민주평화당 의원 : "그 필요성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했어요. 출발을 하루 연기해가지고 반드시 청와대를 방문하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그런 대화와 남북교류협력의 필요성을 설명해라. 그래서 하루를 연기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청와대로 방문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저는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서거하셔서도 남북관계의 끈을 이어주는구나..."]

당시 조문단의 대통령 면담은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경색됐던 남북 관계에 대화와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았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 조금 주춤하는 그런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조문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남북 간의 이런 체제 정상 간의 대화랄까요. 그런 거까지도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겠냐.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어찌보면 김대중 대통령 서거에 대한 조문은 조문 정치의 아주 중요한 형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그렇게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이 잇따라 발발하면서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고,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에도 정부차원의 조문단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 김대중 대통령을 떠나보낸 이희호 여사와 북측 조문단이 나눈 짧은 대화.

[故이희호 여사/2009년 8월 : "한 민족이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협력하는 그러한 일이 새롭게 전개되기를 바랍니다."]

[김기남/당시 북한 조문단장 : "북남관계의 개선을 우리가 꼭 성취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대화에 남북 간 조문을 계기로한 소통의 존재이유가 담겨 있는지 모른다. 오랜 기간 남북 대화의 중심에서 활약해온 정치 인사 역시 이희호 여사에게 전달된 북한의 조의에서 긍정의 메시지를 끌어 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박지원/민주평화당 의원 : "제가 그 자리에서 얘기했지만 하노이 북미회담 후 사실상 고위급 제1부부장과 국가안보실장이 회담하는 것 아니냐. 이 분위기를 살려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져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제가 김여정 부부장을 빤히 쳐다보고 얘기를 하는데 잔잔하게 좋은 반응의 미소를 가지고 듣더니 아주 단호하게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이희호 여사님의 유지를 받드는 길입니다라고 해서 굉장히 좋은 반응이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논쟁을, 때로는 대화의 계기가 되는 남북 간 조문 역사... 위로와 고마움을 나누는 남과 북의 만남이 다시 한 번 화해와 협력의 길로 이어지길 기대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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