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아프간 늪’에서 탈출하는 미국…“‘패권 방패’ 아시아에 집중”
입력 2019.09.08 (09:00)
수정 2019.09.0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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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밀레니엄(New Millennium)에 들떠있던 전 세계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던 2001년 9·11 테러. 이 때문에 발생한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전쟁이 종전을 맞을지 말지 갈림길에 섰다. 지난달 초, 미국과 탈레반이 평화협정 초안에 합의한 이후 관련 뉴스가 쏟아지면서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한 상당수 사람은 '아직도 아프간이 전쟁 중이었어?'하고 놀랐을 법하다.
테러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넘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지 18년이 흘렀다. 미국은 2011년 빈 라덴을 사살한 데 이어 최근 그의 아들(함자 빈 라덴)까지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험한 산악지형을 활용한 탈레반의 게릴라 전술에 '아프간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프간에 계속 많은 병력을 둬봤자 희생자만 늘고 실익이 없다. 지난 7월, 9·11 테러 현장에서 시신으로 수습된 여성 한 명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사망자 2,753명 가운데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1,644명이다. 집요한 미국이다. 하지만 슬픔의 역사는 간직하되, 보복의 전쟁에서는 그만 발을 빼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명분론에 파묻혀 허우적대던 과거와 달리, 세계정세가 급격히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 '평화협정' 초읽기 ... '18년째 끝나지 않는 전쟁' 종지부 찍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반군 조직 탈레반 간 대화가 무르익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알린 건 아프간 매체 톨로뉴스였다. 톨로뉴스는 지난달 24일, "미국과 탈레반이 15~20개월 이내에 아프간 내 외국군을 모두 철수시키는 안에 합의했다. 양측은 며칠 내로 평화협정에 사인할 것이며,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정부 간 직접 대화도 시작될 것"이라고 전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현 정부가 '미국의 꼭두각시'라며 대화를 거부해왔다. 미국 정부가 탈레반과 물밑 접촉에 나선 건 지난해 7월이었다. 양측 대표단이 카타르에서 아프간 정부를 제외한 채 극비리에 만난 것이다. 미국과 탈레반이 전쟁이 발발한 2001년 이후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양측은 올해 초 평화협정 골격까지 합의했다. '아프간 내 테러조직 불허'와 '외국 주둔군 철군'을 맞바꾸는 내용이었는데, 종전선언과 철군 조건·시기 등 세부사항에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왔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잘메이 할릴자드 미국 특사 등과 함께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현지시각 2일, 카불 대통령궁)
그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다 톨로뉴스의 보도가 나온 것이며, 며칠 뒤인 지난달 28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취임 한 달 맞이 기자회견에서 협상에 진전이 있었음을 공식 확인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행정부 관리들이 '내년 대선 전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 만 4천여 명 전부와 연합군 8천여 명을 모두 철수하는 방침을 세워 추진 중'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하루 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입을 열었다. "미군 병력을 8천6백 명으로 줄인다. 평화협정을 합의하더라도 미군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감축은 하겠지만 이후 상황을 봐가며 추가 감축 여부를 정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이후 이달 2일, 탈레반과 9차 협상을 마친 잘메이 할릴자드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가 '135일 이내 병력 5천여 명을 철수하고 5개 기지를 폐쇄한다'는 협정 초안을 공개했다. 외신들은 "이 협정 초안이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면 미군이 단계적 철수를 시작하게 된다"고 전했다.
■ '속도 조절 완전 철군' 나선 트럼프…. 이미 오래전 시작된 '단계적 철수'
트럼프 대통령은 대표적인 '아프간 철군론자'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꾸준히 아프간 철군을 주장해왔다. 그는 찾지도 못한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한 이라크 침공도 반대하는 등 미국의 중동 문제 개입을 못마땅해했다.
‘아프간 철군’을 주장한 트럼프 대통령 과거 트윗
그랬던 그도 대통령이 된 뒤 2017년 8월, '미군 증원'을 골자로 한 '아프간 전략'을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대국민 연설을 통해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을 반드시 저지하겠다"며 "반드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우리 군은 승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폭스뉴스는 "연설 직전 대통령이 4천 명 규모의 추가 파병안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놀라운 건 한때 10만 명이 넘었던 아프간 미군 병력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할 당시 이미 8천4백 명 수준으로 줄어있었다는 점이다. 오바마 정부 때인 2014년 4월, 3만 4천 명 철수를 시작으로 이미 단계적 철수가 이뤄져 온 결과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아프간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2017년 8월)
미국의 주류 언론은 "아프간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했던 트럼프도 결국 아프간 전쟁을 선포했다"고 비판 아닌 비판적 논조를 보였지만, 그가 내놓는 다른 전략들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행간'을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과 싸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내 생각은 미군 철수였다. 하지만 급하게 철군하면 그 공백을 테러리스트들이 메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간에서 발을 빼긴 할 건데, 한 번에 훅 빼진 않겠다'는 얘기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8천 명 수준이던 병력에 4천 명을 추가 파병한 뒤, 다시 일차적으로 8천 명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상황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8천 명도 상황을 봐가며 줄이겠다'고 밝혔다. 한 차례 증원을 통해 '나 역시 완전 철군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한다'는 인상을 심어준 뒤 지금껏 한 적 없는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거쳐 남은 8천 명에 대해서도 단계적 철수를 통해 '완전한 철군'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 탈레반, 미국과 협상 중에도 테러 계속 ... "외국군 전면 철수하라"
2011년 10월, 미군과 연합군의 대대적 공습 뒤 한 달 만에 정권을 빼앗긴 탈레반의 저항은 참으로 끈질겼다. 미국은 쉽게 아프간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아프간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프간 국토 면적은 한국의 3배 정도다. 대부분 험악한 산악지형이다. 이를 십분 활용해 아프간 전역에 흩어져 게릴라전으로 맞선 탈레반의 전략은 베트남 정글에서 지옥을 경험한 미국을 또 한 번 전쟁의 늪에 빠뜨렸다.
미국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미국이 지금 아프간 전쟁에 투입한 군사 비용은 7천6백억 달러(약 924조 원)에 달한다. 아프간전은 베트남전을 넘어 이미 미국이 참전한 '최장기 전쟁'으로 기록됐다. 탈레반은 결국, 세력 회복에 성공해 현재 아프간 전 국토의 절반가량을 장악한 상태다.
아프간 수도 카불의 웨딩홀 내부가 자살폭탄 테러로 처참히 부서졌다. (지난달 18일)
어렵게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탈레반은 여전히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엔 현지시각 5일 카불 외교단지 인근에서 차량 자살폭탄 공격으로 미군 요원 등 10명 이상을 죽게 했다. 지난 2일에도 국제기구들이 모여 있는 카불 그린빌리지에서 차량 폭탄으로 16명을 사망케 하고 119명을 다치게 했다. 지난달 31일엔 정부군이 장악한 쿤드즈를 공격해 큰 교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앞서 17일엔 결혼식장에 폭탄을 터뜨려 2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아프간에서는 현재 탈레반 외에도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 이슬람국가(IS)도 존재감 과시를 위해 테러를 일삼고 있다.
외신은 협상 진행 중에 탈레반이 공세 수위를 높이는 건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탈레반이 마구 날뛰는 현 상황 때문에 미국 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협정 초안까지 나왔다지만, 탈레반은 미국이 제시한 '단계적 철수'에 불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이내 외국군 전면 철수와 철군 스케줄 공표'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 "적(敵) 탈레반을 어찌 믿나? ... 미군 떠나면 내전으로 붕괴" 우려 확산
미군 철군에 대한 상응 조치로 탈레반이 한 약속은 '알카에다나 IS 같은 무장단체가 미국이나 동맹에 대한 공격을 모의하는 데 아프간이 이용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탈레반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게 탈레반과의 협상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갖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18년이나 싸워왔는데 결국 '적'의 손에 아프간을 맡기고 발을 빼려 하냐'는 것이다.
할릴자드 주아프간 미국대사가 협정 초안을 공개한 다음날(현지시각 3일) 미국의 전직 대사 9명이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병력을 모두 철수할 경우, 아프간이 총체적 내전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지금 아프간의) 평화가 가능한지 명확하지 않다"며 "대대적인 미군 병력 철수는 최종 평화의 성사에 달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불 외교단지 인근에서 차량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한 직후 나토 주도 아프간 지원군이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현지시각 5일)
이들은 특히, "탈레반이 수용할 조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다른 정치 세력과 협력한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며 '탈레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의구심을 던졌다. 전직 대사들은 더 나아가 "(오히려) 탈레반이 알카에다와 동맹을 유지하며 IS의 확대를 허용할 가능성이 높아서 새로운 내전은 미국 안보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우려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왜 아프간에서 발을 빼려는 걸까. 우선, 정책적 노선을 떠나 대통령으로서 현실적 고민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빈 라덴은 이미 죽었고 탈레반을 박멸할 수는 없는데, 그들로부터 아프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면서 계속 주둔해야 하는가'라는 고민 말이다. 이는 오바마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프간 미군 철수 결정도 당시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 "그래도 발 뺀다" ...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따른 당연한 수순?
수십 년 동안 중동에 초점을 맞춰온 미국의 세계 전략도 바뀌고 있다. '중동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 아시아로 균형추를 옮긴다'는 미국의 세계 전략은 사실, 오바마 정부 말기부터 실행돼왔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의 패권 도전을 꺾는 것을 최우선 국정 목표로 내세우고 무역전쟁 등으로 중국 때리기를 실행에 옮긴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바뀐 전략이 수면 위로 확실히 떠오른 것뿐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부터 동아시아에 최첨단 군사 전력을 증강해왔다. 2014년 2월, 척 헤이글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은 새 전략 계획을 발표하면서 "미국 국방부는 작전 목표와 병력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는 작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후 꾸준히 재래식 전력은 감축한 반면, 핵잠수함과 대륙 간 탄도미사일, 핵 폭격기 등 핵전력은 강화해왔다.
올해 초 취역한 줌월트급 스텔스 구축함 마이클 몬수르 (DDG-1001)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병력데이터센터에 따르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 2015년 이미 8만 명을 넘어섰다. 미국 본토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병력이다. 미국 해군이 2015년 공개한 '전략 다이제스트'는 최첨단 스텔스 기능을 가진 줌월트급 구축함과 탄도 미사일 방어용 이지스 구축함, 수직 이착륙기인 오스프리와 전자전 공격기, 대잠 초계기 등의 한국 배치 계획이 담겼었다.
미국은 특히, 지난해부터 한국은 물론,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 후방기지인 일본에 핵 추진 항공모함과 수송상륙함 등 급속히 증강해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앞으로 5년간 한반도 상황 대처 등을 위한 전략 증강에 80억 달러(9조 원 이상)를 투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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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로 추를 옮긴 미국의 전략은 2016년, 미국을 주요 산유국 반열에 올린 이른바 '셰일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석유 자급'이라는 에너지 독립을 통해 중동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이란까지 마음 놓고 제재할 수 있을 정도의 우위를 확보했다. 중동을 주 무대로 패권 경쟁을 벌였던 러시아의 쇠퇴도 미국의 전략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줬다. 2차 세계대전 이래 유지돼온 세계 전략의 틀이 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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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자 메티스 당시 국방장관이 반기를 들며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메티스 전 장관이 밝힌 반대 이유도 지금의 아프간 철군을 걱정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메티스 충돌은 두 사람이 '세계 평화 유지'라는 미국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가치에 대한 인식 차를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상징적 사건이다.
■ 미국 "예멘 반군과도 대화" ... 열강 사이에 낀 아프간의 흑역사
시리아 철군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 와중에 아프간 철군을 위한 협정이 본궤도에 올랐고, 예멘에서도 미군이 발을 빼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군과 예멘 후티 반군 간 대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미군 측은 현지시각 5일, "예멘 내전을 종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가능한 정도까지 후티와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협상안을 찾기 위해 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멘 반군 후티의 수용시설이 사우디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공습을 받은 직후 예멘 적신월사(이슬람권의 적십자사) 요원들이 출동해 희생자들을 수습하고 있다.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100명에 달했다. (현지시각 1일)
2015년 3월 본격화된 예멘 내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아랍 동맹군의 개입으로 쉽게 풀리는듯했지만, 반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찾지 못한 채 4년 반째 진행 중이다. 반군 후티는 탈레반과 달리 이란과 매우 밀접한 관계인만큼 미국과의 대화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미국이 이란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란 정권은 현재 석유 판매까지 원천 금지한 미국 주도의 제재로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파키스탄과 중국, 이란, 우즈베키스탄 등에 둘러싸인 내륙국 아프간은 지정학적 요충지다.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을 잇는 통로이자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첨예하게 부딪혀온 곳이다. 아프간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과 세 번이나 전쟁을 치른 끝에 1919년 독립했지만, 이후 내전과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1979년엔 소련의 침공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과 함께 아프간을 지원했다. 80년대 중반 아프간에 파견된 소련군은 10만 명이 넘었다. 파병 장기화로 소련군 사망자도 늘어만 갔고 결국 1989년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도 경험한 '아프간의 늪'은 훗날 소련 붕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 영향력 아래 있던 아프간에는 친소 정권이 들어섰다가 쿠데타로 반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의 침공으로 또다시 친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군 철군 뒤 다시 반소 정권이 들어섰다. 그야말로 흑역사다. 이후에도 무장 세력 간 다툼으로 정정불안이 계속됐고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엔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했다.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미군과 싸우는데 미국이 과거 소련과 싸우라고 지원해준 미제 무기도 동원했다고 한다.
영국 통치 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소련이 엄청난 돈을 투입해 쌓은 '소련식 아프간 질서'는 소련군 철군 뒤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강대국이 떠난 자리에선 항상 내부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미군이 지금 떠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열강에 휘둘리기 쉬운 지정학적 기반에서 사분오열된 국내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기만 한 결과가 바로 오늘 아프간의 현실이다.
현재 미국 내에는 '해법을 찾지 못한 최장기 전쟁을 끝내려면 단계적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철군 옹호론도 만만찮다. 강대국이 처한 상황이나 강대국 간 대결 양상, 또 그들만이 주도할 수 있는 질서 속에서 아프간 전쟁은 과연 무엇을 남긴 걸까. 또,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테러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넘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지 18년이 흘렀다. 미국은 2011년 빈 라덴을 사살한 데 이어 최근 그의 아들(함자 빈 라덴)까지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험한 산악지형을 활용한 탈레반의 게릴라 전술에 '아프간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프간에 계속 많은 병력을 둬봤자 희생자만 늘고 실익이 없다. 지난 7월, 9·11 테러 현장에서 시신으로 수습된 여성 한 명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사망자 2,753명 가운데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1,644명이다. 집요한 미국이다. 하지만 슬픔의 역사는 간직하되, 보복의 전쟁에서는 그만 발을 빼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명분론에 파묻혀 허우적대던 과거와 달리, 세계정세가 급격히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 '평화협정' 초읽기 ... '18년째 끝나지 않는 전쟁' 종지부 찍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반군 조직 탈레반 간 대화가 무르익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알린 건 아프간 매체 톨로뉴스였다. 톨로뉴스는 지난달 24일, "미국과 탈레반이 15~20개월 이내에 아프간 내 외국군을 모두 철수시키는 안에 합의했다. 양측은 며칠 내로 평화협정에 사인할 것이며,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정부 간 직접 대화도 시작될 것"이라고 전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현 정부가 '미국의 꼭두각시'라며 대화를 거부해왔다. 미국 정부가 탈레반과 물밑 접촉에 나선 건 지난해 7월이었다. 양측 대표단이 카타르에서 아프간 정부를 제외한 채 극비리에 만난 것이다. 미국과 탈레반이 전쟁이 발발한 2001년 이후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양측은 올해 초 평화협정 골격까지 합의했다. '아프간 내 테러조직 불허'와 '외국 주둔군 철군'을 맞바꾸는 내용이었는데, 종전선언과 철군 조건·시기 등 세부사항에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왔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다 톨로뉴스의 보도가 나온 것이며, 며칠 뒤인 지난달 28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취임 한 달 맞이 기자회견에서 협상에 진전이 있었음을 공식 확인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행정부 관리들이 '내년 대선 전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 만 4천여 명 전부와 연합군 8천여 명을 모두 철수하는 방침을 세워 추진 중'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하루 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입을 열었다. "미군 병력을 8천6백 명으로 줄인다. 평화협정을 합의하더라도 미군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감축은 하겠지만 이후 상황을 봐가며 추가 감축 여부를 정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이후 이달 2일, 탈레반과 9차 협상을 마친 잘메이 할릴자드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가 '135일 이내 병력 5천여 명을 철수하고 5개 기지를 폐쇄한다'는 협정 초안을 공개했다. 외신들은 "이 협정 초안이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면 미군이 단계적 철수를 시작하게 된다"고 전했다.
■ '속도 조절 완전 철군' 나선 트럼프…. 이미 오래전 시작된 '단계적 철수'
트럼프 대통령은 대표적인 '아프간 철군론자'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꾸준히 아프간 철군을 주장해왔다. 그는 찾지도 못한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한 이라크 침공도 반대하는 등 미국의 중동 문제 개입을 못마땅해했다.

그랬던 그도 대통령이 된 뒤 2017년 8월, '미군 증원'을 골자로 한 '아프간 전략'을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대국민 연설을 통해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을 반드시 저지하겠다"며 "반드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우리 군은 승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폭스뉴스는 "연설 직전 대통령이 4천 명 규모의 추가 파병안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놀라운 건 한때 10만 명이 넘었던 아프간 미군 병력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할 당시 이미 8천4백 명 수준으로 줄어있었다는 점이다. 오바마 정부 때인 2014년 4월, 3만 4천 명 철수를 시작으로 이미 단계적 철수가 이뤄져 온 결과였다.

미국의 주류 언론은 "아프간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했던 트럼프도 결국 아프간 전쟁을 선포했다"고 비판 아닌 비판적 논조를 보였지만, 그가 내놓는 다른 전략들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행간'을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과 싸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내 생각은 미군 철수였다. 하지만 급하게 철군하면 그 공백을 테러리스트들이 메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간에서 발을 빼긴 할 건데, 한 번에 훅 빼진 않겠다'는 얘기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8천 명 수준이던 병력에 4천 명을 추가 파병한 뒤, 다시 일차적으로 8천 명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상황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8천 명도 상황을 봐가며 줄이겠다'고 밝혔다. 한 차례 증원을 통해 '나 역시 완전 철군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한다'는 인상을 심어준 뒤 지금껏 한 적 없는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거쳐 남은 8천 명에 대해서도 단계적 철수를 통해 '완전한 철군'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 탈레반, 미국과 협상 중에도 테러 계속 ... "외국군 전면 철수하라"
2011년 10월, 미군과 연합군의 대대적 공습 뒤 한 달 만에 정권을 빼앗긴 탈레반의 저항은 참으로 끈질겼다. 미국은 쉽게 아프간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아프간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프간 국토 면적은 한국의 3배 정도다. 대부분 험악한 산악지형이다. 이를 십분 활용해 아프간 전역에 흩어져 게릴라전으로 맞선 탈레반의 전략은 베트남 정글에서 지옥을 경험한 미국을 또 한 번 전쟁의 늪에 빠뜨렸다.
미국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미국이 지금 아프간 전쟁에 투입한 군사 비용은 7천6백억 달러(약 924조 원)에 달한다. 아프간전은 베트남전을 넘어 이미 미국이 참전한 '최장기 전쟁'으로 기록됐다. 탈레반은 결국, 세력 회복에 성공해 현재 아프간 전 국토의 절반가량을 장악한 상태다.

어렵게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탈레반은 여전히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엔 현지시각 5일 카불 외교단지 인근에서 차량 자살폭탄 공격으로 미군 요원 등 10명 이상을 죽게 했다. 지난 2일에도 국제기구들이 모여 있는 카불 그린빌리지에서 차량 폭탄으로 16명을 사망케 하고 119명을 다치게 했다. 지난달 31일엔 정부군이 장악한 쿤드즈를 공격해 큰 교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앞서 17일엔 결혼식장에 폭탄을 터뜨려 2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아프간에서는 현재 탈레반 외에도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 이슬람국가(IS)도 존재감 과시를 위해 테러를 일삼고 있다.
외신은 협상 진행 중에 탈레반이 공세 수위를 높이는 건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탈레반이 마구 날뛰는 현 상황 때문에 미국 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협정 초안까지 나왔다지만, 탈레반은 미국이 제시한 '단계적 철수'에 불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이내 외국군 전면 철수와 철군 스케줄 공표'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 "적(敵) 탈레반을 어찌 믿나? ... 미군 떠나면 내전으로 붕괴" 우려 확산
미군 철군에 대한 상응 조치로 탈레반이 한 약속은 '알카에다나 IS 같은 무장단체가 미국이나 동맹에 대한 공격을 모의하는 데 아프간이 이용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탈레반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게 탈레반과의 협상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갖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18년이나 싸워왔는데 결국 '적'의 손에 아프간을 맡기고 발을 빼려 하냐'는 것이다.
할릴자드 주아프간 미국대사가 협정 초안을 공개한 다음날(현지시각 3일) 미국의 전직 대사 9명이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병력을 모두 철수할 경우, 아프간이 총체적 내전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지금 아프간의) 평화가 가능한지 명확하지 않다"며 "대대적인 미군 병력 철수는 최종 평화의 성사에 달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특히, "탈레반이 수용할 조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다른 정치 세력과 협력한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며 '탈레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의구심을 던졌다. 전직 대사들은 더 나아가 "(오히려) 탈레반이 알카에다와 동맹을 유지하며 IS의 확대를 허용할 가능성이 높아서 새로운 내전은 미국 안보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우려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왜 아프간에서 발을 빼려는 걸까. 우선, 정책적 노선을 떠나 대통령으로서 현실적 고민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빈 라덴은 이미 죽었고 탈레반을 박멸할 수는 없는데, 그들로부터 아프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면서 계속 주둔해야 하는가'라는 고민 말이다. 이는 오바마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프간 미군 철수 결정도 당시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 "그래도 발 뺀다" ...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따른 당연한 수순?
수십 년 동안 중동에 초점을 맞춰온 미국의 세계 전략도 바뀌고 있다. '중동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 아시아로 균형추를 옮긴다'는 미국의 세계 전략은 사실, 오바마 정부 말기부터 실행돼왔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의 패권 도전을 꺾는 것을 최우선 국정 목표로 내세우고 무역전쟁 등으로 중국 때리기를 실행에 옮긴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바뀐 전략이 수면 위로 확실히 떠오른 것뿐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부터 동아시아에 최첨단 군사 전력을 증강해왔다. 2014년 2월, 척 헤이글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은 새 전략 계획을 발표하면서 "미국 국방부는 작전 목표와 병력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는 작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후 꾸준히 재래식 전력은 감축한 반면, 핵잠수함과 대륙 간 탄도미사일, 핵 폭격기 등 핵전력은 강화해왔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병력데이터센터에 따르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 2015년 이미 8만 명을 넘어섰다. 미국 본토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병력이다. 미국 해군이 2015년 공개한 '전략 다이제스트'는 최첨단 스텔스 기능을 가진 줌월트급 구축함과 탄도 미사일 방어용 이지스 구축함, 수직 이착륙기인 오스프리와 전자전 공격기, 대잠 초계기 등의 한국 배치 계획이 담겼었다.
미국은 특히, 지난해부터 한국은 물론,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 후방기지인 일본에 핵 추진 항공모함과 수송상륙함 등 급속히 증강해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앞으로 5년간 한반도 상황 대처 등을 위한 전략 증강에 80억 달러(9조 원 이상)를 투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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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로 추를 옮긴 미국의 전략은 2016년, 미국을 주요 산유국 반열에 올린 이른바 '셰일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석유 자급'이라는 에너지 독립을 통해 중동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이란까지 마음 놓고 제재할 수 있을 정도의 우위를 확보했다. 중동을 주 무대로 패권 경쟁을 벌였던 러시아의 쇠퇴도 미국의 전략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줬다. 2차 세계대전 이래 유지돼온 세계 전략의 틀이 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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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자 메티스 당시 국방장관이 반기를 들며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메티스 전 장관이 밝힌 반대 이유도 지금의 아프간 철군을 걱정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메티스 충돌은 두 사람이 '세계 평화 유지'라는 미국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가치에 대한 인식 차를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상징적 사건이다.
■ 미국 "예멘 반군과도 대화" ... 열강 사이에 낀 아프간의 흑역사
시리아 철군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 와중에 아프간 철군을 위한 협정이 본궤도에 올랐고, 예멘에서도 미군이 발을 빼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군과 예멘 후티 반군 간 대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미군 측은 현지시각 5일, "예멘 내전을 종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가능한 정도까지 후티와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협상안을 찾기 위해 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5년 3월 본격화된 예멘 내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아랍 동맹군의 개입으로 쉽게 풀리는듯했지만, 반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찾지 못한 채 4년 반째 진행 중이다. 반군 후티는 탈레반과 달리 이란과 매우 밀접한 관계인만큼 미국과의 대화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미국이 이란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란 정권은 현재 석유 판매까지 원천 금지한 미국 주도의 제재로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파키스탄과 중국, 이란, 우즈베키스탄 등에 둘러싸인 내륙국 아프간은 지정학적 요충지다.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을 잇는 통로이자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첨예하게 부딪혀온 곳이다. 아프간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과 세 번이나 전쟁을 치른 끝에 1919년 독립했지만, 이후 내전과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1979년엔 소련의 침공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과 함께 아프간을 지원했다. 80년대 중반 아프간에 파견된 소련군은 10만 명이 넘었다. 파병 장기화로 소련군 사망자도 늘어만 갔고 결국 1989년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도 경험한 '아프간의 늪'은 훗날 소련 붕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 영향력 아래 있던 아프간에는 친소 정권이 들어섰다가 쿠데타로 반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의 침공으로 또다시 친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군 철군 뒤 다시 반소 정권이 들어섰다. 그야말로 흑역사다. 이후에도 무장 세력 간 다툼으로 정정불안이 계속됐고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엔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했다.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미군과 싸우는데 미국이 과거 소련과 싸우라고 지원해준 미제 무기도 동원했다고 한다.
영국 통치 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소련이 엄청난 돈을 투입해 쌓은 '소련식 아프간 질서'는 소련군 철군 뒤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강대국이 떠난 자리에선 항상 내부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미군이 지금 떠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열강에 휘둘리기 쉬운 지정학적 기반에서 사분오열된 국내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기만 한 결과가 바로 오늘 아프간의 현실이다.
현재 미국 내에는 '해법을 찾지 못한 최장기 전쟁을 끝내려면 단계적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철군 옹호론도 만만찮다. 강대국이 처한 상황이나 강대국 간 대결 양상, 또 그들만이 주도할 수 있는 질서 속에서 아프간 전쟁은 과연 무엇을 남긴 걸까. 또,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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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돋보기] ‘아프간 늪’에서 탈출하는 미국…“‘패권 방패’ 아시아에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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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9-08 09:00:04
- 수정2019-09-08 09:08:20

뉴 밀레니엄(New Millennium)에 들떠있던 전 세계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던 2001년 9·11 테러. 이 때문에 발생한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전쟁이 종전을 맞을지 말지 갈림길에 섰다. 지난달 초, 미국과 탈레반이 평화협정 초안에 합의한 이후 관련 뉴스가 쏟아지면서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한 상당수 사람은 '아직도 아프간이 전쟁 중이었어?'하고 놀랐을 법하다.
테러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넘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지 18년이 흘렀다. 미국은 2011년 빈 라덴을 사살한 데 이어 최근 그의 아들(함자 빈 라덴)까지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험한 산악지형을 활용한 탈레반의 게릴라 전술에 '아프간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프간에 계속 많은 병력을 둬봤자 희생자만 늘고 실익이 없다. 지난 7월, 9·11 테러 현장에서 시신으로 수습된 여성 한 명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사망자 2,753명 가운데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1,644명이다. 집요한 미국이다. 하지만 슬픔의 역사는 간직하되, 보복의 전쟁에서는 그만 발을 빼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명분론에 파묻혀 허우적대던 과거와 달리, 세계정세가 급격히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 '평화협정' 초읽기 ... '18년째 끝나지 않는 전쟁' 종지부 찍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반군 조직 탈레반 간 대화가 무르익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알린 건 아프간 매체 톨로뉴스였다. 톨로뉴스는 지난달 24일, "미국과 탈레반이 15~20개월 이내에 아프간 내 외국군을 모두 철수시키는 안에 합의했다. 양측은 며칠 내로 평화협정에 사인할 것이며,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정부 간 직접 대화도 시작될 것"이라고 전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현 정부가 '미국의 꼭두각시'라며 대화를 거부해왔다. 미국 정부가 탈레반과 물밑 접촉에 나선 건 지난해 7월이었다. 양측 대표단이 카타르에서 아프간 정부를 제외한 채 극비리에 만난 것이다. 미국과 탈레반이 전쟁이 발발한 2001년 이후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양측은 올해 초 평화협정 골격까지 합의했다. '아프간 내 테러조직 불허'와 '외국 주둔군 철군'을 맞바꾸는 내용이었는데, 종전선언과 철군 조건·시기 등 세부사항에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왔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다 톨로뉴스의 보도가 나온 것이며, 며칠 뒤인 지난달 28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취임 한 달 맞이 기자회견에서 협상에 진전이 있었음을 공식 확인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행정부 관리들이 '내년 대선 전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 만 4천여 명 전부와 연합군 8천여 명을 모두 철수하는 방침을 세워 추진 중'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하루 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입을 열었다. "미군 병력을 8천6백 명으로 줄인다. 평화협정을 합의하더라도 미군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감축은 하겠지만 이후 상황을 봐가며 추가 감축 여부를 정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이후 이달 2일, 탈레반과 9차 협상을 마친 잘메이 할릴자드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가 '135일 이내 병력 5천여 명을 철수하고 5개 기지를 폐쇄한다'는 협정 초안을 공개했다. 외신들은 "이 협정 초안이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면 미군이 단계적 철수를 시작하게 된다"고 전했다.
■ '속도 조절 완전 철군' 나선 트럼프…. 이미 오래전 시작된 '단계적 철수'
트럼프 대통령은 대표적인 '아프간 철군론자'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꾸준히 아프간 철군을 주장해왔다. 그는 찾지도 못한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한 이라크 침공도 반대하는 등 미국의 중동 문제 개입을 못마땅해했다.

그랬던 그도 대통령이 된 뒤 2017년 8월, '미군 증원'을 골자로 한 '아프간 전략'을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대국민 연설을 통해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을 반드시 저지하겠다"며 "반드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우리 군은 승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폭스뉴스는 "연설 직전 대통령이 4천 명 규모의 추가 파병안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놀라운 건 한때 10만 명이 넘었던 아프간 미군 병력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할 당시 이미 8천4백 명 수준으로 줄어있었다는 점이다. 오바마 정부 때인 2014년 4월, 3만 4천 명 철수를 시작으로 이미 단계적 철수가 이뤄져 온 결과였다.

미국의 주류 언론은 "아프간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했던 트럼프도 결국 아프간 전쟁을 선포했다"고 비판 아닌 비판적 논조를 보였지만, 그가 내놓는 다른 전략들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행간'을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과 싸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내 생각은 미군 철수였다. 하지만 급하게 철군하면 그 공백을 테러리스트들이 메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간에서 발을 빼긴 할 건데, 한 번에 훅 빼진 않겠다'는 얘기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8천 명 수준이던 병력에 4천 명을 추가 파병한 뒤, 다시 일차적으로 8천 명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상황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8천 명도 상황을 봐가며 줄이겠다'고 밝혔다. 한 차례 증원을 통해 '나 역시 완전 철군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한다'는 인상을 심어준 뒤 지금껏 한 적 없는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거쳐 남은 8천 명에 대해서도 단계적 철수를 통해 '완전한 철군'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 탈레반, 미국과 협상 중에도 테러 계속 ... "외국군 전면 철수하라"
2011년 10월, 미군과 연합군의 대대적 공습 뒤 한 달 만에 정권을 빼앗긴 탈레반의 저항은 참으로 끈질겼다. 미국은 쉽게 아프간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아프간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프간 국토 면적은 한국의 3배 정도다. 대부분 험악한 산악지형이다. 이를 십분 활용해 아프간 전역에 흩어져 게릴라전으로 맞선 탈레반의 전략은 베트남 정글에서 지옥을 경험한 미국을 또 한 번 전쟁의 늪에 빠뜨렸다.
미국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미국이 지금 아프간 전쟁에 투입한 군사 비용은 7천6백억 달러(약 924조 원)에 달한다. 아프간전은 베트남전을 넘어 이미 미국이 참전한 '최장기 전쟁'으로 기록됐다. 탈레반은 결국, 세력 회복에 성공해 현재 아프간 전 국토의 절반가량을 장악한 상태다.

어렵게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탈레반은 여전히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엔 현지시각 5일 카불 외교단지 인근에서 차량 자살폭탄 공격으로 미군 요원 등 10명 이상을 죽게 했다. 지난 2일에도 국제기구들이 모여 있는 카불 그린빌리지에서 차량 폭탄으로 16명을 사망케 하고 119명을 다치게 했다. 지난달 31일엔 정부군이 장악한 쿤드즈를 공격해 큰 교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앞서 17일엔 결혼식장에 폭탄을 터뜨려 2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아프간에서는 현재 탈레반 외에도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 이슬람국가(IS)도 존재감 과시를 위해 테러를 일삼고 있다.
외신은 협상 진행 중에 탈레반이 공세 수위를 높이는 건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탈레반이 마구 날뛰는 현 상황 때문에 미국 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협정 초안까지 나왔다지만, 탈레반은 미국이 제시한 '단계적 철수'에 불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이내 외국군 전면 철수와 철군 스케줄 공표'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 "적(敵) 탈레반을 어찌 믿나? ... 미군 떠나면 내전으로 붕괴" 우려 확산
미군 철군에 대한 상응 조치로 탈레반이 한 약속은 '알카에다나 IS 같은 무장단체가 미국이나 동맹에 대한 공격을 모의하는 데 아프간이 이용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탈레반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게 탈레반과의 협상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갖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18년이나 싸워왔는데 결국 '적'의 손에 아프간을 맡기고 발을 빼려 하냐'는 것이다.
할릴자드 주아프간 미국대사가 협정 초안을 공개한 다음날(현지시각 3일) 미국의 전직 대사 9명이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병력을 모두 철수할 경우, 아프간이 총체적 내전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지금 아프간의) 평화가 가능한지 명확하지 않다"며 "대대적인 미군 병력 철수는 최종 평화의 성사에 달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특히, "탈레반이 수용할 조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다른 정치 세력과 협력한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며 '탈레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의구심을 던졌다. 전직 대사들은 더 나아가 "(오히려) 탈레반이 알카에다와 동맹을 유지하며 IS의 확대를 허용할 가능성이 높아서 새로운 내전은 미국 안보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우려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왜 아프간에서 발을 빼려는 걸까. 우선, 정책적 노선을 떠나 대통령으로서 현실적 고민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빈 라덴은 이미 죽었고 탈레반을 박멸할 수는 없는데, 그들로부터 아프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면서 계속 주둔해야 하는가'라는 고민 말이다. 이는 오바마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프간 미군 철수 결정도 당시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 "그래도 발 뺀다" ...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따른 당연한 수순?
수십 년 동안 중동에 초점을 맞춰온 미국의 세계 전략도 바뀌고 있다. '중동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 아시아로 균형추를 옮긴다'는 미국의 세계 전략은 사실, 오바마 정부 말기부터 실행돼왔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의 패권 도전을 꺾는 것을 최우선 국정 목표로 내세우고 무역전쟁 등으로 중국 때리기를 실행에 옮긴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바뀐 전략이 수면 위로 확실히 떠오른 것뿐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부터 동아시아에 최첨단 군사 전력을 증강해왔다. 2014년 2월, 척 헤이글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은 새 전략 계획을 발표하면서 "미국 국방부는 작전 목표와 병력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는 작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후 꾸준히 재래식 전력은 감축한 반면, 핵잠수함과 대륙 간 탄도미사일, 핵 폭격기 등 핵전력은 강화해왔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병력데이터센터에 따르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 2015년 이미 8만 명을 넘어섰다. 미국 본토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병력이다. 미국 해군이 2015년 공개한 '전략 다이제스트'는 최첨단 스텔스 기능을 가진 줌월트급 구축함과 탄도 미사일 방어용 이지스 구축함, 수직 이착륙기인 오스프리와 전자전 공격기, 대잠 초계기 등의 한국 배치 계획이 담겼었다.
미국은 특히, 지난해부터 한국은 물론,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 후방기지인 일본에 핵 추진 항공모함과 수송상륙함 등 급속히 증강해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앞으로 5년간 한반도 상황 대처 등을 위한 전략 증강에 80억 달러(9조 원 이상)를 투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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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기사] [글로벌 돋보기] ‘시리아 철군’으로 명확해진 트럼프의 세계전략…한반도 영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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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자 메티스 당시 국방장관이 반기를 들며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메티스 전 장관이 밝힌 반대 이유도 지금의 아프간 철군을 걱정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메티스 충돌은 두 사람이 '세계 평화 유지'라는 미국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가치에 대한 인식 차를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상징적 사건이다.
■ 미국 "예멘 반군과도 대화" ... 열강 사이에 낀 아프간의 흑역사
시리아 철군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 와중에 아프간 철군을 위한 협정이 본궤도에 올랐고, 예멘에서도 미군이 발을 빼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군과 예멘 후티 반군 간 대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미군 측은 현지시각 5일, "예멘 내전을 종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가능한 정도까지 후티와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협상안을 찾기 위해 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5년 3월 본격화된 예멘 내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아랍 동맹군의 개입으로 쉽게 풀리는듯했지만, 반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찾지 못한 채 4년 반째 진행 중이다. 반군 후티는 탈레반과 달리 이란과 매우 밀접한 관계인만큼 미국과의 대화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미국이 이란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란 정권은 현재 석유 판매까지 원천 금지한 미국 주도의 제재로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파키스탄과 중국, 이란, 우즈베키스탄 등에 둘러싸인 내륙국 아프간은 지정학적 요충지다.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을 잇는 통로이자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첨예하게 부딪혀온 곳이다. 아프간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과 세 번이나 전쟁을 치른 끝에 1919년 독립했지만, 이후 내전과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1979년엔 소련의 침공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과 함께 아프간을 지원했다. 80년대 중반 아프간에 파견된 소련군은 10만 명이 넘었다. 파병 장기화로 소련군 사망자도 늘어만 갔고 결국 1989년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도 경험한 '아프간의 늪'은 훗날 소련 붕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 영향력 아래 있던 아프간에는 친소 정권이 들어섰다가 쿠데타로 반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의 침공으로 또다시 친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군 철군 뒤 다시 반소 정권이 들어섰다. 그야말로 흑역사다. 이후에도 무장 세력 간 다툼으로 정정불안이 계속됐고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엔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했다.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미군과 싸우는데 미국이 과거 소련과 싸우라고 지원해준 미제 무기도 동원했다고 한다.
영국 통치 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소련이 엄청난 돈을 투입해 쌓은 '소련식 아프간 질서'는 소련군 철군 뒤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강대국이 떠난 자리에선 항상 내부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미군이 지금 떠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열강에 휘둘리기 쉬운 지정학적 기반에서 사분오열된 국내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기만 한 결과가 바로 오늘 아프간의 현실이다.
현재 미국 내에는 '해법을 찾지 못한 최장기 전쟁을 끝내려면 단계적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철군 옹호론도 만만찮다. 강대국이 처한 상황이나 강대국 간 대결 양상, 또 그들만이 주도할 수 있는 질서 속에서 아프간 전쟁은 과연 무엇을 남긴 걸까. 또,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테러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넘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지 18년이 흘렀다. 미국은 2011년 빈 라덴을 사살한 데 이어 최근 그의 아들(함자 빈 라덴)까지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험한 산악지형을 활용한 탈레반의 게릴라 전술에 '아프간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프간에 계속 많은 병력을 둬봤자 희생자만 늘고 실익이 없다. 지난 7월, 9·11 테러 현장에서 시신으로 수습된 여성 한 명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사망자 2,753명 가운데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1,644명이다. 집요한 미국이다. 하지만 슬픔의 역사는 간직하되, 보복의 전쟁에서는 그만 발을 빼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명분론에 파묻혀 허우적대던 과거와 달리, 세계정세가 급격히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 '평화협정' 초읽기 ... '18년째 끝나지 않는 전쟁' 종지부 찍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반군 조직 탈레반 간 대화가 무르익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알린 건 아프간 매체 톨로뉴스였다. 톨로뉴스는 지난달 24일, "미국과 탈레반이 15~20개월 이내에 아프간 내 외국군을 모두 철수시키는 안에 합의했다. 양측은 며칠 내로 평화협정에 사인할 것이며,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정부 간 직접 대화도 시작될 것"이라고 전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현 정부가 '미국의 꼭두각시'라며 대화를 거부해왔다. 미국 정부가 탈레반과 물밑 접촉에 나선 건 지난해 7월이었다. 양측 대표단이 카타르에서 아프간 정부를 제외한 채 극비리에 만난 것이다. 미국과 탈레반이 전쟁이 발발한 2001년 이후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양측은 올해 초 평화협정 골격까지 합의했다. '아프간 내 테러조직 불허'와 '외국 주둔군 철군'을 맞바꾸는 내용이었는데, 종전선언과 철군 조건·시기 등 세부사항에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왔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다 톨로뉴스의 보도가 나온 것이며, 며칠 뒤인 지난달 28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취임 한 달 맞이 기자회견에서 협상에 진전이 있었음을 공식 확인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행정부 관리들이 '내년 대선 전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 만 4천여 명 전부와 연합군 8천여 명을 모두 철수하는 방침을 세워 추진 중'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하루 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입을 열었다. "미군 병력을 8천6백 명으로 줄인다. 평화협정을 합의하더라도 미군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감축은 하겠지만 이후 상황을 봐가며 추가 감축 여부를 정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이후 이달 2일, 탈레반과 9차 협상을 마친 잘메이 할릴자드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가 '135일 이내 병력 5천여 명을 철수하고 5개 기지를 폐쇄한다'는 협정 초안을 공개했다. 외신들은 "이 협정 초안이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면 미군이 단계적 철수를 시작하게 된다"고 전했다.
■ '속도 조절 완전 철군' 나선 트럼프…. 이미 오래전 시작된 '단계적 철수'
트럼프 대통령은 대표적인 '아프간 철군론자'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꾸준히 아프간 철군을 주장해왔다. 그는 찾지도 못한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한 이라크 침공도 반대하는 등 미국의 중동 문제 개입을 못마땅해했다.

그랬던 그도 대통령이 된 뒤 2017년 8월, '미군 증원'을 골자로 한 '아프간 전략'을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대국민 연설을 통해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을 반드시 저지하겠다"며 "반드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우리 군은 승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폭스뉴스는 "연설 직전 대통령이 4천 명 규모의 추가 파병안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놀라운 건 한때 10만 명이 넘었던 아프간 미군 병력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할 당시 이미 8천4백 명 수준으로 줄어있었다는 점이다. 오바마 정부 때인 2014년 4월, 3만 4천 명 철수를 시작으로 이미 단계적 철수가 이뤄져 온 결과였다.

미국의 주류 언론은 "아프간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했던 트럼프도 결국 아프간 전쟁을 선포했다"고 비판 아닌 비판적 논조를 보였지만, 그가 내놓는 다른 전략들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행간'을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과 싸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내 생각은 미군 철수였다. 하지만 급하게 철군하면 그 공백을 테러리스트들이 메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간에서 발을 빼긴 할 건데, 한 번에 훅 빼진 않겠다'는 얘기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8천 명 수준이던 병력에 4천 명을 추가 파병한 뒤, 다시 일차적으로 8천 명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상황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8천 명도 상황을 봐가며 줄이겠다'고 밝혔다. 한 차례 증원을 통해 '나 역시 완전 철군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한다'는 인상을 심어준 뒤 지금껏 한 적 없는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거쳐 남은 8천 명에 대해서도 단계적 철수를 통해 '완전한 철군'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 탈레반, 미국과 협상 중에도 테러 계속 ... "외국군 전면 철수하라"
2011년 10월, 미군과 연합군의 대대적 공습 뒤 한 달 만에 정권을 빼앗긴 탈레반의 저항은 참으로 끈질겼다. 미국은 쉽게 아프간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아프간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프간 국토 면적은 한국의 3배 정도다. 대부분 험악한 산악지형이다. 이를 십분 활용해 아프간 전역에 흩어져 게릴라전으로 맞선 탈레반의 전략은 베트남 정글에서 지옥을 경험한 미국을 또 한 번 전쟁의 늪에 빠뜨렸다.
미국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미국이 지금 아프간 전쟁에 투입한 군사 비용은 7천6백억 달러(약 924조 원)에 달한다. 아프간전은 베트남전을 넘어 이미 미국이 참전한 '최장기 전쟁'으로 기록됐다. 탈레반은 결국, 세력 회복에 성공해 현재 아프간 전 국토의 절반가량을 장악한 상태다.

어렵게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탈레반은 여전히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엔 현지시각 5일 카불 외교단지 인근에서 차량 자살폭탄 공격으로 미군 요원 등 10명 이상을 죽게 했다. 지난 2일에도 국제기구들이 모여 있는 카불 그린빌리지에서 차량 폭탄으로 16명을 사망케 하고 119명을 다치게 했다. 지난달 31일엔 정부군이 장악한 쿤드즈를 공격해 큰 교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앞서 17일엔 결혼식장에 폭탄을 터뜨려 2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아프간에서는 현재 탈레반 외에도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 이슬람국가(IS)도 존재감 과시를 위해 테러를 일삼고 있다.
외신은 협상 진행 중에 탈레반이 공세 수위를 높이는 건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탈레반이 마구 날뛰는 현 상황 때문에 미국 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협정 초안까지 나왔다지만, 탈레반은 미국이 제시한 '단계적 철수'에 불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이내 외국군 전면 철수와 철군 스케줄 공표'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 "적(敵) 탈레반을 어찌 믿나? ... 미군 떠나면 내전으로 붕괴" 우려 확산
미군 철군에 대한 상응 조치로 탈레반이 한 약속은 '알카에다나 IS 같은 무장단체가 미국이나 동맹에 대한 공격을 모의하는 데 아프간이 이용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탈레반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게 탈레반과의 협상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갖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18년이나 싸워왔는데 결국 '적'의 손에 아프간을 맡기고 발을 빼려 하냐'는 것이다.
할릴자드 주아프간 미국대사가 협정 초안을 공개한 다음날(현지시각 3일) 미국의 전직 대사 9명이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병력을 모두 철수할 경우, 아프간이 총체적 내전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지금 아프간의) 평화가 가능한지 명확하지 않다"며 "대대적인 미군 병력 철수는 최종 평화의 성사에 달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특히, "탈레반이 수용할 조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다른 정치 세력과 협력한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며 '탈레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의구심을 던졌다. 전직 대사들은 더 나아가 "(오히려) 탈레반이 알카에다와 동맹을 유지하며 IS의 확대를 허용할 가능성이 높아서 새로운 내전은 미국 안보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우려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왜 아프간에서 발을 빼려는 걸까. 우선, 정책적 노선을 떠나 대통령으로서 현실적 고민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빈 라덴은 이미 죽었고 탈레반을 박멸할 수는 없는데, 그들로부터 아프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면서 계속 주둔해야 하는가'라는 고민 말이다. 이는 오바마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프간 미군 철수 결정도 당시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 "그래도 발 뺀다" ...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따른 당연한 수순?
수십 년 동안 중동에 초점을 맞춰온 미국의 세계 전략도 바뀌고 있다. '중동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 아시아로 균형추를 옮긴다'는 미국의 세계 전략은 사실, 오바마 정부 말기부터 실행돼왔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의 패권 도전을 꺾는 것을 최우선 국정 목표로 내세우고 무역전쟁 등으로 중국 때리기를 실행에 옮긴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바뀐 전략이 수면 위로 확실히 떠오른 것뿐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부터 동아시아에 최첨단 군사 전력을 증강해왔다. 2014년 2월, 척 헤이글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은 새 전략 계획을 발표하면서 "미국 국방부는 작전 목표와 병력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는 작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후 꾸준히 재래식 전력은 감축한 반면, 핵잠수함과 대륙 간 탄도미사일, 핵 폭격기 등 핵전력은 강화해왔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병력데이터센터에 따르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 2015년 이미 8만 명을 넘어섰다. 미국 본토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병력이다. 미국 해군이 2015년 공개한 '전략 다이제스트'는 최첨단 스텔스 기능을 가진 줌월트급 구축함과 탄도 미사일 방어용 이지스 구축함, 수직 이착륙기인 오스프리와 전자전 공격기, 대잠 초계기 등의 한국 배치 계획이 담겼었다.
미국은 특히, 지난해부터 한국은 물론,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 후방기지인 일본에 핵 추진 항공모함과 수송상륙함 등 급속히 증강해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앞으로 5년간 한반도 상황 대처 등을 위한 전략 증강에 80억 달러(9조 원 이상)를 투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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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로 추를 옮긴 미국의 전략은 2016년, 미국을 주요 산유국 반열에 올린 이른바 '셰일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석유 자급'이라는 에너지 독립을 통해 중동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이란까지 마음 놓고 제재할 수 있을 정도의 우위를 확보했다. 중동을 주 무대로 패권 경쟁을 벌였던 러시아의 쇠퇴도 미국의 전략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줬다. 2차 세계대전 이래 유지돼온 세계 전략의 틀이 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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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자 메티스 당시 국방장관이 반기를 들며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메티스 전 장관이 밝힌 반대 이유도 지금의 아프간 철군을 걱정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메티스 충돌은 두 사람이 '세계 평화 유지'라는 미국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가치에 대한 인식 차를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상징적 사건이다.
■ 미국 "예멘 반군과도 대화" ... 열강 사이에 낀 아프간의 흑역사
시리아 철군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 와중에 아프간 철군을 위한 협정이 본궤도에 올랐고, 예멘에서도 미군이 발을 빼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군과 예멘 후티 반군 간 대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미군 측은 현지시각 5일, "예멘 내전을 종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가능한 정도까지 후티와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협상안을 찾기 위해 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5년 3월 본격화된 예멘 내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아랍 동맹군의 개입으로 쉽게 풀리는듯했지만, 반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찾지 못한 채 4년 반째 진행 중이다. 반군 후티는 탈레반과 달리 이란과 매우 밀접한 관계인만큼 미국과의 대화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미국이 이란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란 정권은 현재 석유 판매까지 원천 금지한 미국 주도의 제재로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파키스탄과 중국, 이란, 우즈베키스탄 등에 둘러싸인 내륙국 아프간은 지정학적 요충지다.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을 잇는 통로이자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첨예하게 부딪혀온 곳이다. 아프간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과 세 번이나 전쟁을 치른 끝에 1919년 독립했지만, 이후 내전과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1979년엔 소련의 침공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과 함께 아프간을 지원했다. 80년대 중반 아프간에 파견된 소련군은 10만 명이 넘었다. 파병 장기화로 소련군 사망자도 늘어만 갔고 결국 1989년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도 경험한 '아프간의 늪'은 훗날 소련 붕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 영향력 아래 있던 아프간에는 친소 정권이 들어섰다가 쿠데타로 반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의 침공으로 또다시 친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군 철군 뒤 다시 반소 정권이 들어섰다. 그야말로 흑역사다. 이후에도 무장 세력 간 다툼으로 정정불안이 계속됐고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엔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했다.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미군과 싸우는데 미국이 과거 소련과 싸우라고 지원해준 미제 무기도 동원했다고 한다.
영국 통치 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소련이 엄청난 돈을 투입해 쌓은 '소련식 아프간 질서'는 소련군 철군 뒤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강대국이 떠난 자리에선 항상 내부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미군이 지금 떠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열강에 휘둘리기 쉬운 지정학적 기반에서 사분오열된 국내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기만 한 결과가 바로 오늘 아프간의 현실이다.
현재 미국 내에는 '해법을 찾지 못한 최장기 전쟁을 끝내려면 단계적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철군 옹호론도 만만찮다. 강대국이 처한 상황이나 강대국 간 대결 양상, 또 그들만이 주도할 수 있는 질서 속에서 아프간 전쟁은 과연 무엇을 남긴 걸까. 또,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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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석 기자 sy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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