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너머의 여순]② 남도 곳곳이 학살터…민간인 피해 ‘광범위’

입력 2020.10.19 (21:51) 수정 2020.10.19 (22:18)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여순사건의 민간인 학살 현장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오늘 추념식이 열린 구례는 물론, 전남북과 경남에도 학살터가 있습니다.

민간인 피해가 그만큼 컸고, 여수와 순천만의 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양창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깊고 높은 산에 둘러싸인 섬진강 지류의 구례 간문천.

1948년 11월, 두 살이던 신영식 씨는 여기서 아버지 신종우 씨를 잃었습니다.

당시는 여수에서 무장봉기한 뒤 지리산 등으로 입산한 14연대 군인에 대한 진압 작전이 진행되던 상황.

구례의 산자락 마을들은 반군에게는 식량을 얻는 통로였지만 진압군에게는 표적이 됐습니다.

산간 마을에서 소를 키우던 신종우 씨도 반군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아 주민들과 함께 사살됐습니다.

[신영식/간문천변 학살 희생 유족 : "한이 서리지, 한이 서려. 아무 죄도 없이 사흘을 굶고 죽은거야. 눈물도 못 흘려 봤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힘드니까."]

구례 간문천변 사건의 희생자는 최소 70명 이상.

1948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산동·마산·광의·토지면과 구례읍 등 구례에서만 14곳에서 비슷한 형태의 학살이 잇따랐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추정한 피해 규모는 8백여 명에 이릅니다.

[최성문/순천대 여순연구소 연구원 : "구례 지역은 학살 사건이 지속적이고, 굉장히 광범위하게 펼쳐졌고 집단 학살 성격을 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지리산을 끼고 있는 경남 서부 지역에서도 여순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컸습니다.

빨치산 토벌 작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에서 산간마을 주민에 대한 집단 학살이 잇따른 겁니다.

여순사건 진압이 이어지던 1949년 7월, 경남 산청의 작은 산촌에서도 서른 명 가까운 민간인이 학살됐습니다.

빨치산들의 매복에 당해 1개 소대가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진압군이 주민들을 보복 살해한 겁니다.

아들이 끌려가 총에 맞은 걸 지켜 본 70대 노인까지 무참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재천/경남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 : "(할아버지가) '왜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이느냐. 나도 죽여달라' 이러니까 군인들이 하는 말이 '그럼 이게 전부 다 니 자식인가, 영감탱이 죽고 싶으면 이리 나오너라',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가 또 거기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 10월 14연대 무장봉기 후 군경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피해는, 여수와 순천을 비롯해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전북까지 22개 시군에 걸쳐 있습니다.

그러나 4년여에 걸친 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가 신청 사건 위주로 이뤄진 만큼 밝혀진 피해는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연구자들의 중론입니다.

KBS 뉴스 양창희입니다.

촬영기자:김종윤·김선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여순 너머의 여순]② 남도 곳곳이 학살터…민간인 피해 ‘광범위’
    • 입력 2020-10-19 21:51:39
    • 수정2020-10-19 22:18:06
    뉴스9(광주)
[앵커]

여순사건의 민간인 학살 현장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오늘 추념식이 열린 구례는 물론, 전남북과 경남에도 학살터가 있습니다.

민간인 피해가 그만큼 컸고, 여수와 순천만의 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양창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깊고 높은 산에 둘러싸인 섬진강 지류의 구례 간문천.

1948년 11월, 두 살이던 신영식 씨는 여기서 아버지 신종우 씨를 잃었습니다.

당시는 여수에서 무장봉기한 뒤 지리산 등으로 입산한 14연대 군인에 대한 진압 작전이 진행되던 상황.

구례의 산자락 마을들은 반군에게는 식량을 얻는 통로였지만 진압군에게는 표적이 됐습니다.

산간 마을에서 소를 키우던 신종우 씨도 반군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아 주민들과 함께 사살됐습니다.

[신영식/간문천변 학살 희생 유족 : "한이 서리지, 한이 서려. 아무 죄도 없이 사흘을 굶고 죽은거야. 눈물도 못 흘려 봤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힘드니까."]

구례 간문천변 사건의 희생자는 최소 70명 이상.

1948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산동·마산·광의·토지면과 구례읍 등 구례에서만 14곳에서 비슷한 형태의 학살이 잇따랐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추정한 피해 규모는 8백여 명에 이릅니다.

[최성문/순천대 여순연구소 연구원 : "구례 지역은 학살 사건이 지속적이고, 굉장히 광범위하게 펼쳐졌고 집단 학살 성격을 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지리산을 끼고 있는 경남 서부 지역에서도 여순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컸습니다.

빨치산 토벌 작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에서 산간마을 주민에 대한 집단 학살이 잇따른 겁니다.

여순사건 진압이 이어지던 1949년 7월, 경남 산청의 작은 산촌에서도 서른 명 가까운 민간인이 학살됐습니다.

빨치산들의 매복에 당해 1개 소대가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진압군이 주민들을 보복 살해한 겁니다.

아들이 끌려가 총에 맞은 걸 지켜 본 70대 노인까지 무참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재천/경남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 : "(할아버지가) '왜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이느냐. 나도 죽여달라' 이러니까 군인들이 하는 말이 '그럼 이게 전부 다 니 자식인가, 영감탱이 죽고 싶으면 이리 나오너라',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가 또 거기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 10월 14연대 무장봉기 후 군경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피해는, 여수와 순천을 비롯해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전북까지 22개 시군에 걸쳐 있습니다.

그러나 4년여에 걸친 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가 신청 사건 위주로 이뤄진 만큼 밝혀진 피해는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연구자들의 중론입니다.

KBS 뉴스 양창희입니다.

촬영기자:김종윤·김선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광주-주요뉴스

더보기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