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② 경찰 48인 추적…친일의 그림자 청산되었나?
입력 2021.03.01 (10:00)
수정 2021.03.0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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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회부는 정확히 100년 전 오늘(1921년 3월 1일) 작성된 600쪽 가량의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을 일제 입장에서 적은 문서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곧바로 간도참변이라는 끔찍한 보복에 나선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여 명. 일제는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일제가 작성한 공적서에 이름을 올린 경찰들은 일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이들이지만, 우리에게는 같은 민족을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들의 구체적 행위가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발굴 문서를 보면 이들이 '동족학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히 기록돼 있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공동 취재로,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에 기재된 해당 경찰관들의 소속과 계급, 주요 공적 내용을 토대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봤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연구실장이 KBS가 발굴한 ‘공적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일제로부터 상훈 받은 9명…연금 받고 진급까지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이다. 단서는 1928년 8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의 부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인 경찰관 9명이 1920년 12월 25일 '종군기장'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이다.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 각각의 전쟁마다 종군기장의 종류도 달랐는데,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수록된 조선인 경찰관 9명. 순사 우경태, 구봉서, 김종섭, 백창돈, 김배인, 장국환, 김영후, 성빈, 서상순은 종군기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충북 청주경찰서 순사 백창돈(白昌敦)은 1920년 5월 17일 간도 지역에 파견됐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 당시 적을 경계하고 재류민을 보호한 것 ( 2) 토벌대에 배속돼 귀순자 처리 및 선전 업무 종사 등이다. 물론 이때의 '적'은 우리에겐 독립운동가를 뜻한다.
간도참변 이후 그의 행적을 따라가봤다. 조선총독부 연금자료에서 추가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간도참변 이듬해인 1921년 본래 소속돼 있던 충북 청주경찰서로 귀환한다. 이후 1930년 제천경찰서로 근무지를 옮긴 뒤 퇴직했다.
재간도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한 경부보 최태욱(崔泰郁).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밀정 사용 및 은닉 총기의 소재지에 관해 내사, 독립운동가 행동 조사에 관한 사무에 복무해 그 공적이 현저 (2) 1920년 10월 5일~7일 출동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총영사관 경찰관과 재향군인으로 경비대를 조직해 임무를 완수 등이다. 공적서는 그가 1920년 10월부터 시작된 간도참변 당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가리킨다.
그의 추가 행적은 1926년 1월 16이 경성일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간도총영사관 소속 다른 경찰관들과 함께 승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의 계급은 경부보가 아닌 경부로 기재돼 있다. 간도참변 가담 당시 경부보였던 최태욱이 참변 이후 불과 5년 사이 경부로 진급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찰 계급 체계는 위로부터 경무총장-경무부장-경무관-경시-경부-경부보-순사 순으로 정비돼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출신 경찰들은 순사 계급에 머물렀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경시나 경부급 인사가 되기는 어려웠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경부보 최태욱의 공적서. 일제는 그를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했다.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 당시 조선인이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라며 " 1920년대 당시 조선인 경부는 각 도에 한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태욱이 어떤 연유로 경부로 승급했는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간도참변에 가담함으로써 얻은 공적이 직간접적으로 진급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 간도참변 순사 장국환과 해방 후의 장국환…경찰 "기록 없다"
KBS는 간도참변에 차출된 한국인 경찰관 48명 가운데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공주경찰서 등 소속 경찰서가 기재된 이들의 추가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공식 질의했다. 경찰은 " 인사관리시스템에서 연관성이 있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정경찰서(현재:서울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1920년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張國煥).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국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을 찾을 수 있었다. 한자까지 일치하고 계급 승급 가능성이 있어 동일인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경찰은 두 인물의 연관성을 확인해줄 수가 없었다. 장국환에 대한 인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1952년 경기도 경찰국에 재직한 장국환은 정부 기록물에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정작 경찰청이 보유한 인사기록에는 빠져 있었다. 경찰은 인사기록을 기준으로 인사관리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에 일부 누락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간도참변에 가담했다가 일제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은 순사 장국환(위)과 해방 후인 1952년 경기도 경찰국 소속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아래). 경찰은 두 인물 모두 인사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
■김구 동상 세운 경찰, 친일 잔재 청산은 사실상 '전무'
경찰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본청 청사 안에 세웠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다. 경무국장은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이다.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이 2019년 경찰청에 들어섰다.
2년여가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지 따져봤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조사했다. 이 가운데 70여 명(중복 포함)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는데, 각 경찰청·경찰서 홈페이지에는 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심지어 일부 경찰서 건물 안엔 여전히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이었던 김상규도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 형사로 근무하며 사상범과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 김상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지만, 영동경찰서 대회의실에 별도의 친일 이력 표기 없이 이름이 걸려 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재직 이력을 있는 그대로 표기했을 뿐 선양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친일 이력을 함께 또렷하게 적고 있다. 경기도는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표기하고 있다.
경기도 김홍국 대변인은 " 친일 이력이 있는 인사의 재직 이력을 지우는 것도 사실 왜곡인 만큼, 기록 삭제 없이 친일 행적을 병기 했다"라며 " 친일 잔재 청산과 도민의 알 권리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반민특위' 습격한 경찰…사과 요구에도 여전히 묵묵부답
경찰은 2019년 이른바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려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뚜렷한 성과를 내지 않고 있다. 경찰은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고자 편찬위원회까지 꾸렸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빛'만 드러내고 '그늘'은 외면하는 꼴이다.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구성한 헌법기구였지만, 경찰은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 위원과 직원, 특경대원 등 35명을 연행했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 기한은 본래 임기보다 10개월 축소됐고 같은 해 8월 31일 특위 활동은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 과제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6월 6일을 '국치일'로 보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역사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2005년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관련해 경찰에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경찰의 공식 입장은 나온 바 없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경찰 지도부에게 과오를 과감하게 덜어내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반민특위 와해에 대한 진정한 사죄라든지 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상 노력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KBS 사회부는 삼일절을 맞은 오늘밤 [9시 뉴스]에서 이번에 단독 발굴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는 한편, 취재진의 추적 경위도 생생한 영상으로 전할 예정이다.
[연관기사]
[발굴①] ‘동족학살’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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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② 경찰 48인 추적…친일의 그림자 청산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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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3-01 10:00:15
- 수정2021-03-01 12:08:25
KBS 사회부는 정확히 100년 전 오늘(1921년 3월 1일) 작성된 600쪽 가량의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을 일제 입장에서 적은 문서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곧바로 간도참변이라는 끔찍한 보복에 나선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여 명. 일제는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일제가 작성한 공적서에 이름을 올린 경찰들은 일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이들이지만, 우리에게는 같은 민족을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들의 구체적 행위가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발굴 문서를 보면 이들이 '동족학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히 기록돼 있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공동 취재로,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에 기재된 해당 경찰관들의 소속과 계급, 주요 공적 내용을 토대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봤다.
■ 일제로부터 상훈 받은 9명…연금 받고 진급까지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이다. 단서는 1928년 8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의 부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인 경찰관 9명이 1920년 12월 25일 '종군기장'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이다.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 각각의 전쟁마다 종군기장의 종류도 달랐는데,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다.
충북 청주경찰서 순사 백창돈(白昌敦)은 1920년 5월 17일 간도 지역에 파견됐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 당시 적을 경계하고 재류민을 보호한 것 ( 2) 토벌대에 배속돼 귀순자 처리 및 선전 업무 종사 등이다. 물론 이때의 '적'은 우리에겐 독립운동가를 뜻한다.
간도참변 이후 그의 행적을 따라가봤다. 조선총독부 연금자료에서 추가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간도참변 이듬해인 1921년 본래 소속돼 있던 충북 청주경찰서로 귀환한다. 이후 1930년 제천경찰서로 근무지를 옮긴 뒤 퇴직했다.
재간도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한 경부보 최태욱(崔泰郁).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밀정 사용 및 은닉 총기의 소재지에 관해 내사, 독립운동가 행동 조사에 관한 사무에 복무해 그 공적이 현저 (2) 1920년 10월 5일~7일 출동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총영사관 경찰관과 재향군인으로 경비대를 조직해 임무를 완수 등이다. 공적서는 그가 1920년 10월부터 시작된 간도참변 당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가리킨다.
그의 추가 행적은 1926년 1월 16이 경성일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간도총영사관 소속 다른 경찰관들과 함께 승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의 계급은 경부보가 아닌 경부로 기재돼 있다. 간도참변 가담 당시 경부보였던 최태욱이 참변 이후 불과 5년 사이 경부로 진급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찰 계급 체계는 위로부터 경무총장-경무부장-경무관-경시-경부-경부보-순사 순으로 정비돼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출신 경찰들은 순사 계급에 머물렀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경시나 경부급 인사가 되기는 어려웠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 당시 조선인이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라며 " 1920년대 당시 조선인 경부는 각 도에 한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태욱이 어떤 연유로 경부로 승급했는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간도참변에 가담함으로써 얻은 공적이 직간접적으로 진급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 간도참변 순사 장국환과 해방 후의 장국환…경찰 "기록 없다"
KBS는 간도참변에 차출된 한국인 경찰관 48명 가운데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공주경찰서 등 소속 경찰서가 기재된 이들의 추가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공식 질의했다. 경찰은 " 인사관리시스템에서 연관성이 있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정경찰서(현재:서울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1920년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張國煥).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국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을 찾을 수 있었다. 한자까지 일치하고 계급 승급 가능성이 있어 동일인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경찰은 두 인물의 연관성을 확인해줄 수가 없었다. 장국환에 대한 인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1952년 경기도 경찰국에 재직한 장국환은 정부 기록물에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정작 경찰청이 보유한 인사기록에는 빠져 있었다. 경찰은 인사기록을 기준으로 인사관리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에 일부 누락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구 동상 세운 경찰, 친일 잔재 청산은 사실상 '전무'
경찰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본청 청사 안에 세웠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다. 경무국장은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이다.
2년여가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지 따져봤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조사했다. 이 가운데 70여 명(중복 포함)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는데, 각 경찰청·경찰서 홈페이지에는 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심지어 일부 경찰서 건물 안엔 여전히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이었던 김상규도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 형사로 근무하며 사상범과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경찰은 이에 대해 "재직 이력을 있는 그대로 표기했을 뿐 선양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친일 이력을 함께 또렷하게 적고 있다. 경기도는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표기하고 있다.
경기도 김홍국 대변인은 " 친일 이력이 있는 인사의 재직 이력을 지우는 것도 사실 왜곡인 만큼, 기록 삭제 없이 친일 행적을 병기 했다"라며 " 친일 잔재 청산과 도민의 알 권리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반민특위' 습격한 경찰…사과 요구에도 여전히 묵묵부답
경찰은 2019년 이른바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려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뚜렷한 성과를 내지 않고 있다. 경찰은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고자 편찬위원회까지 꾸렸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빛'만 드러내고 '그늘'은 외면하는 꼴이다.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구성한 헌법기구였지만, 경찰은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 위원과 직원, 특경대원 등 35명을 연행했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 기한은 본래 임기보다 10개월 축소됐고 같은 해 8월 31일 특위 활동은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 과제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6월 6일을 '국치일'로 보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역사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2005년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관련해 경찰에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경찰의 공식 입장은 나온 바 없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경찰 지도부에게 과오를 과감하게 덜어내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반민특위 와해에 대한 진정한 사죄라든지 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상 노력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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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①] ‘동족학살’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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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락규 기자 rockyo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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