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K] ‘4·3 잃어버린 땅’(1) 땅을 찾아낸 재판, 원동마을

입력 2021.04.0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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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최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개정됐습니다. 부당한 국가폭력에 희생된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의 근거가 마련돼 4·3 해결에 큰 전기를 맞게 됐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 과제는 여전히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KBS는 4·3 73주년을 맞아 희생자와 유족들이 부당하게 소유권을 빼앗긴 ‘잃어버린 땅’에 주목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잃어버린 땅’의 사례와 실태 조사의 필요성을 전해드립니다.

'잃어버린 마을' 원동마을 터. 마을은 사라지고 마을 터를 알리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잃어버린 마을' 원동마을 터. 마을은 사라지고 마을 터를 알리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 잃어버린 마을, 원동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간선도로인 평화로. 평화로가 지나는 중산간에는 ‘원지’이라고 적힌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4·3 당시 큰 피해를 봐 지금은 사라진 ‘원동마을’ 터입니다.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된 4·3 당시인 1948년 11월. 원동마을에는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군인들의 총격에 마을주민과 길 가던 사람 등 6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원동에 살고 있던 강응필 할아버지는 “소개령을 내렸는데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붙들어 총살을 해버렸다”고 증언합니다.

군인들은 집까지 모두 불태워버렸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동마을이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된 이유입니다.

■ 원동에서 불거진 대규모 소송

원동에서 부모를 잃고 서울로 떠나 살던 올해 80살의 강응필 할아버지가 제주로 돌아온 건 1983년. 강 할아버지는 4·3 때 희생된 조부가 지분을 갖고 있던 마을 공동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소유권은 누군가에게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당시 임야대장을 확인해보면 일제 강점기 때 강 할아버지의 조부를 비롯해 모두 7명이 공유자로 이름이 올라있는데, 1971년 특정인이 소유권 보존 등기를 하면서 땅을 가져간 내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응필 씨 조부가 공유지분을 갖고 있던 임야대장. 1971년 특정인이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고 적혀있다.강응필 씨 조부가 공유지분을 갖고 있던 임야대장. 1971년 특정인이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고 적혀있다.

조부는 4·3 때 희생됐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걸까? 확인 결과, 마을 유지가 공동목장에 조림사업을 한 뒤 농지위원들로부터 ‘이 사람의 땅이 맞는다’며 보증을 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를 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마을 유지가 이런 방식으로 가져간 땅은 강 할아버지 땅만은 아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실제 땅 주인의 후손들이 품삯을 받고 마을 유지의 조림 사업을 도왔다는 겁니다. 조상의 땅인 것도 모른 채, 땅이 넘어가는 데 일조한 셈입니다.

■ “부모 잃은 것도 억울한데 땅까지”…무혼굿 개최

1989년, 원동 유족들은 결국 마을 유지를 상대로 대규모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합니다. 강 할아버지처럼 이미 지분을 돌려받았거나, 포기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원고가 모두 19명에 달하는 대규모 소송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며 원동마을 터에서 무혼굿도 벌였습니다. 4·3의 진상조사가 이뤄지기 전, 4·3을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땅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인 자리였습니다.

원동마을 터에서 열린 무혼굿. 4·3의 언급조차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유족들은 땅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했다원동마을 터에서 열린 무혼굿. 4·3의 언급조차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유족들은 땅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유족들은 마을 유지가 1965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20여 필지의 땅을 부당하게 빼앗아 갔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법정 투쟁을 벌이는 한편 땅을 빼앗아간 마을 유지의 양심에 호소하겠다고 선포한 겁니다.

무혼굿에 참여했던 김창후 전 제주 4·3 연구소장은 “경찰들이 뒤에서 알게 모르게 탄압을 하고, 유족들을 위협하기도 했었다”면서 “그런데도 굿을 하면서 결의를 보이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 증인 수십 명 동원…결국 허위보증 확인

재판 과정에서는 이례적으로 현장 법정도 열렸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는 ‘수십 명의 증인이 동원됐다’든가, ‘관공서의 창고에 쌓여있던 케케묵은 관리대장들이 증거로 동원됐다’는 등 재판의 열기가 뜨거웠던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마을 유지가 토지 소유권을 가져가는 데 토대가 된 보증이 허위란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농지위원들이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마을 유지의 말만 믿고 보증을 서줬다고 실토한 겁니다.

원동마을 소송의 1심 판결문.  허위 보증서로 소유권 보존등기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적혀있다.원동마을 소송의 1심 판결문. 허위 보증서로 소유권 보존등기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적혀있다.

결국 재판부는 마을 유지가 허위로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 소송을 다룬 광주고법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부동산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다고 인정할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원인 무효에 해당”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소송에 참여한 김경용 씨는 “조상의 땅이 있었다는 것도 전혀 생각을 못 했다”면서 “조상의 어떤 흔적을 찾은 느낌”이었다고 당시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잃어버린 땅’

대법원에서는 조림 사업을 통한 마을 유지의 권리를 일부 인정해줘 돌려받은 땅은 다소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4·3으로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은 대규모 소송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김창후 전 제주 4·3 연구소장은 “굉장히 큰 일이자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분명 잃어버린 마을이 되는 과정에서 옛날 조상들의 땅이 있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을 텐데, 차마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뜨거웠던 재판과 달리 이 소송 이후 4·3 유족들의 잃어버린 땅에 대한 관심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린 땅을 두고 개별적으로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만 이따금 들려올 뿐, 실태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은 겁니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재산권이라는 민감한 권리에 가려져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던 ‘잃어버린 땅’. 다음 기사에서는 지금도 땅을 돌려받기 위해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또 다른 유족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연관기사]
[탐사K] 4·3 또 하나의 상처…잃어버린 땅(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47796)
[탐사K] 4·3 잃어버린 땅…땅을 찾아낸 재판, 원동마을(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5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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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사K] ‘4·3 잃어버린 땅’(1) 땅을 찾아낸 재판, 원동마을
    • 입력 2021-04-02 14:23:07
    탐사K
최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개정됐습니다. 부당한 국가폭력에 희생된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의 근거가 마련돼 4·3 해결에 큰 전기를 맞게 됐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 과제는 여전히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KBS는 4·3 73주년을 맞아 희생자와 유족들이 부당하게 소유권을 빼앗긴 ‘잃어버린 땅’에 주목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잃어버린 땅’의 사례와 실태 조사의 필요성을 전해드립니다.<br />
'잃어버린 마을' 원동마을 터. 마을은 사라지고 마을 터를 알리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 잃어버린 마을, 원동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간선도로인 평화로. 평화로가 지나는 중산간에는 ‘원지’이라고 적힌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4·3 당시 큰 피해를 봐 지금은 사라진 ‘원동마을’ 터입니다.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된 4·3 당시인 1948년 11월. 원동마을에는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군인들의 총격에 마을주민과 길 가던 사람 등 6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원동에 살고 있던 강응필 할아버지는 “소개령을 내렸는데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붙들어 총살을 해버렸다”고 증언합니다.

군인들은 집까지 모두 불태워버렸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동마을이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된 이유입니다.

■ 원동에서 불거진 대규모 소송

원동에서 부모를 잃고 서울로 떠나 살던 올해 80살의 강응필 할아버지가 제주로 돌아온 건 1983년. 강 할아버지는 4·3 때 희생된 조부가 지분을 갖고 있던 마을 공동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소유권은 누군가에게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당시 임야대장을 확인해보면 일제 강점기 때 강 할아버지의 조부를 비롯해 모두 7명이 공유자로 이름이 올라있는데, 1971년 특정인이 소유권 보존 등기를 하면서 땅을 가져간 내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응필 씨 조부가 공유지분을 갖고 있던 임야대장. 1971년 특정인이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고 적혀있다.
조부는 4·3 때 희생됐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걸까? 확인 결과, 마을 유지가 공동목장에 조림사업을 한 뒤 농지위원들로부터 ‘이 사람의 땅이 맞는다’며 보증을 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를 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마을 유지가 이런 방식으로 가져간 땅은 강 할아버지 땅만은 아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실제 땅 주인의 후손들이 품삯을 받고 마을 유지의 조림 사업을 도왔다는 겁니다. 조상의 땅인 것도 모른 채, 땅이 넘어가는 데 일조한 셈입니다.

■ “부모 잃은 것도 억울한데 땅까지”…무혼굿 개최

1989년, 원동 유족들은 결국 마을 유지를 상대로 대규모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합니다. 강 할아버지처럼 이미 지분을 돌려받았거나, 포기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원고가 모두 19명에 달하는 대규모 소송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며 원동마을 터에서 무혼굿도 벌였습니다. 4·3의 진상조사가 이뤄지기 전, 4·3을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땅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인 자리였습니다.

원동마을 터에서 열린 무혼굿. 4·3의 언급조차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유족들은 땅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유족들은 마을 유지가 1965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20여 필지의 땅을 부당하게 빼앗아 갔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법정 투쟁을 벌이는 한편 땅을 빼앗아간 마을 유지의 양심에 호소하겠다고 선포한 겁니다.

무혼굿에 참여했던 김창후 전 제주 4·3 연구소장은 “경찰들이 뒤에서 알게 모르게 탄압을 하고, 유족들을 위협하기도 했었다”면서 “그런데도 굿을 하면서 결의를 보이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 증인 수십 명 동원…결국 허위보증 확인

재판 과정에서는 이례적으로 현장 법정도 열렸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는 ‘수십 명의 증인이 동원됐다’든가, ‘관공서의 창고에 쌓여있던 케케묵은 관리대장들이 증거로 동원됐다’는 등 재판의 열기가 뜨거웠던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마을 유지가 토지 소유권을 가져가는 데 토대가 된 보증이 허위란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농지위원들이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마을 유지의 말만 믿고 보증을 서줬다고 실토한 겁니다.

원동마을 소송의 1심 판결문.  허위 보증서로 소유권 보존등기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적혀있다.
결국 재판부는 마을 유지가 허위로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 소송을 다룬 광주고법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부동산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다고 인정할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원인 무효에 해당”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소송에 참여한 김경용 씨는 “조상의 땅이 있었다는 것도 전혀 생각을 못 했다”면서 “조상의 어떤 흔적을 찾은 느낌”이었다고 당시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잃어버린 땅’

대법원에서는 조림 사업을 통한 마을 유지의 권리를 일부 인정해줘 돌려받은 땅은 다소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4·3으로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은 대규모 소송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김창후 전 제주 4·3 연구소장은 “굉장히 큰 일이자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분명 잃어버린 마을이 되는 과정에서 옛날 조상들의 땅이 있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을 텐데, 차마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뜨거웠던 재판과 달리 이 소송 이후 4·3 유족들의 잃어버린 땅에 대한 관심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린 땅을 두고 개별적으로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만 이따금 들려올 뿐, 실태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은 겁니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재산권이라는 민감한 권리에 가려져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던 ‘잃어버린 땅’. 다음 기사에서는 지금도 땅을 돌려받기 위해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또 다른 유족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연관기사]
[탐사K] 4·3 또 하나의 상처…잃어버린 땅(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47796)
[탐사K] 4·3 잃어버린 땅…땅을 찾아낸 재판, 원동마을(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5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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