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은 병사들

입력 2003.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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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2003년 9월 28일(일) 밤09:30~10:10 / KBS1
■취재 : 성재호 기자 jhsung@kbs.co.kr
■제작 : 보도제작국 보도제작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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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닝 멘트:
베트남에서 국군이 철수한지 꼭 30년 만에 베트남 땅에서 국군의 유해를 찾기 위한 발굴작업이 시작됐습니다. 그 동안 우리 정부는 베트남 전쟁의 경우 6.25전쟁과 달리 유해 발굴이나 실종군인을 찾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베트남에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거나 실종된 군인은 7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시신이나 실종자가 이보다 더 많다는 주장입니다.

* 성재호 기자:
패망한 월남 정권의 중심지 사이공, 지금은 호치민 시로 불리는 이 곳은 예나 지금이나 활력이 넘치는 베트남 최대의 도시이자 경제의 중심지입니다. 거리마다 오토바이 행렬이 물결처럼 넘치는 호치민 시에서 지난 날의 전쟁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호치민 시 북쪽,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베트남 중부 빈딩성의 성도 퀴년. 이 곳 퀴년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서쪽 안케 고개를 향해 30여분을 가면 안년으로 불리는 평야지대가 나옵니다. 지난 25일부터 이 곳의 한 야산에서는 중요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 땅에서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입니다. 이번 유해 발굴 작업은 베트남 여인의 증언과 이를 국내에 전한 한 참전 군인의 노력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 이남원/베트남 참전 군인
“작년 11월 달에, 여기 맹호부대 작전 지역을 돌다가 옛날에 한국 군인들이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가게에 들어가 혹시 여기 한국군이 옛날에 묻힌 데가 있느냐 했더니, 가게 남자분이 탕티순 씨를 소개시켜주더라구요.”

* 성재호 기자:
국군 유해가 묻혀 있다는 야산 아랫마을을 한번도 떠나지 않고 52년을 살아온 탕티순 씨, 30여 년이 흘렀지만 그녀는 당시의 한국군 매장 광경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연도는 정확치 않지만 1966년 또는 1967년 말쯤이라고 말했습니다.

* 탕 티 순 (한국 군인 매장 목격자):
“구덩이를 길다랗게 판 다음에 주변에 한국 군인들이 둘러싸서 많이 울었습니다. 세 구의 시신을 차례대로 놓고는 부대장이 먼저 한줌의 흙을 뿌린 뒤에 나중에 군인들이 흙을 덮었습니다.”

* 성재호 기자:
탕티순 씨의 증언대로라면 한국군이 전투 중에 숨진 전우 3명의 시신을 직접 매장했다는 얘기입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기 하루 전 탕티순 씨는 한국 군인들이 묻혀 있다는 위치로 취재 팀을 안내했습니다.

* 탕티순 (한국군인 매장 목격자)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이 부근에 군인들이 묻혀있습니다.”

* 성재호 기자:
탕티순 씨는 더구나 묻힌 3명의 한국 군인 가운데 한 명과는 애인 사이로 비록 태어난 지 8달 만에 숨졌지만 아이까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땅 속에 묻힌 옛 애인의 이름과 계급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탕티순 (한국 군인 매장 목격자):
“김영화, 김영화” 계급은? “3줄” 상병? “예”

* 성재호 기자:
국방부의 확인 결과 ‘김영화’라는 참전군인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가장 유사한 인물은1967년 11월 빈딩성 지역에서 숨진 맹호부대 “김영희” 상병. 하지만 더 이상 자세한 기록이 없어 김영화와 김영희가 동인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탕티순 씨의 증언을 토대로 지난 사흘동안 발굴 작업을 벌였지만 아직 유해는 나오지 않은 상탭니다. 안년 지역은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가 곳곳에 주둔했던 곳으로 발굴 현장이 위치한 야산 정상에도 중대급 규모의 부대가 건물을 짓고 주둔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탕티순 씨의 증언대로 이 곳에서 국군 전사자의 유해가 나올 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습니다.

* 김종수 (대령/베트남 국방무관):
“증언자의 증언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그 증언이 정확한가, 그 다음에 위치를 혹시 착각하고 있지 않는가? 또 설사 위치가 정확하더라도 36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지형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고…”

* 성재호 기자:
조국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 선열들이 잠든 서울 동작동 국립 묘지. 이 곳에 조성된 5만 4천 여 위의 묘지 가운데 베트남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참전 군인들의 묘지는 4천 6백여 위에 이릅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숨진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5천 명이 넘지만 일부 가족들이 따로 묘지를 조성했다는 게 국립 현충원의 얘깁니다. 시신을 찾지 못해 혼백만을 모셔놓은 국립묘지 위패보관소. 이 곳에는 김인수 상병만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유일한 위패입니다. 국방부가 지금까지 밝힌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뒤 시신을 찾지 못하고 군인은 김인수 상병과 이용선 병장, 안상이 상병 등 모두 3명, 하지만 이 병장과 안 상병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위패조차 없습니다. 이와 함께 실종자로 처리한 군인은 4명으로 이 가운데 안학수 하사와 박성열 병장, 김인식 대위 등 3명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정준택 하사는 탈영 처리된 채 행방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5천명이 넘는 베트남 전쟁 군인 희생자 가운데 실종자와 유해를 찾지 못한 사망자는 국방부의 주장대로 단 7명 뿐일까? 국방부는 이와 관련해 공식적인 인터뷰를 거부했습니다.

<맹호는 간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 성재호 기자:
지난 1964년 7월 국군은 소규모 의무부대를 시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합니다. 그 뒤 1973년 1월 철수할 때까지 8년 8개월동안 국군은 연인원 3십 2만 여 명이라는 외국 부대로는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참여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와 청룡부대 등 국군이 벌인 작전은 안케패스나 짜빈동 전투와 같은 대규모 작전이 천 백 여 차례, 소부대 작전은 무려 5십 7만 여 차례나 됩니다. 국군 피해도 커서 전사자와 순직 등을 합쳐 모두 5천 66명이 지금까지 국방부가 밝힌 베트남 전쟁 군인 사망자입니다. 이렇게 많은 국군 희생자가 났지만 지난 1973년, 베트남 철수 당시 이세호 파월사령관은 단 한명의 포로나 실종자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성재호 기자:
세월이 흘러 일부 밝혀지기는 했지만 베트남 전쟁은 철수 당시 단 한명의 국군 포로도 실종자도 없는 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베트남 중부 빈딩성과 중심지 퀴년시는 베트남 전쟁 당시 국군 맹호 사단이 주둔한 곳입니다. 맹호부대가 이 곳에서 철수한지 올해로 꼭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퀴년시와 빈딩성 곳곳에는 맹호부대가 남긴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현재 퀴논시 종합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지난 1968년 이 곳에 주둔했던 맹호부대가 지은 것입니다. 박물관 창고를 열자 맹호부대 마크가 선명한 철제 표지판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 당시에는 건물 현관에 붙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박물관 관계자
“1968년, 한국군이 건물을 지어 기증했다고 써져 있습니다.”

* 성재호 기자:
당시 맹호부대장이었던 윤필용 장군의 빛바랜 사진들도 남아 있습니다. 퀴논시 외곽 농촌 지역에서도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흔적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곳 빈딩성과 퀴논시 지역에서 맹호부대는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주요 보급로였던19번 국도를 차단하는 것이 주임무였습니다. 19번 국도를 따라 빈딩성 서쪽 끝까지 가면 안케 고지가 나옵니다. 대관령 고갯길처럼 꼬불꼬불한 안케고지 가는 길 곳곳은 맹호부대와 베트남 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입니다.

* 웅엔 쫑 루(빈딩성 재향군인회장/북베트남 연대장 출신):
“한국군이 이 쪽에 진을 치고서는 이 길을 감시했습니다.” 베트남 군은 어디에 있었나요? “베트남 군은 저 쪽 너머에 진지를 파고 있었고.” 한국군은요? “한국군은 바로 요 앞 산에…”

* 성재호 기자:
당시 638고지로 불렸던 안케고지 최정상. 정상 부근에 널려 있는 녹슨 포탄 껍질들은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638 고지 정상 한 가운데는 당시 이 곳에서 숨진 전우들을 기리며 맹호 부대 원들이 세운 위령비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 브릿지 :
지난 1972년 북베트남 정규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이 곳 안케지구에서는 모두 2백 명이 넘는 국군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전사자만도 7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성재호 기자:
국방부가 밝힌 안케지구 전투의 전사자는 75명,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전사한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 즉 월맹군의 포로가 된 국군이 있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안케 고지 전투를 겪었던 참전군인 강길원 씨는 당시 같은 소대원이었던 부인호 일병이 638고지 수색도중 적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됐다고 말합니다.

*강길원(베트남 전 참전 군인- 맹호부대):
“그 쪽에서 반발이 심하니까 소대장이 후퇴하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후퇴를 해서 돌아왔는데, 부인호 일병은 거기서 못 빠져 나오고 사로 잡힌 거죠. 사로잡혔다고 확신하는데 왜냐면 2,3일쯤 뒤에 삐라가 날아왔는데 부일병이 우리에게 자수를 했다고 그게 한국말로 적혀있더라구요.”

* 성재호 기자:
월맹 군이 뿌린 선전 물에는 부일병의 살아있는 얼굴 사진도 실려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소대원들이 시신조차 보지 못했는데도 부인호 일병은 실종자가 아닌 안케패스 전투 전사자 75명에 포함돼 있습니다.

* 강길원 (베트남 전 참전군인- 맹호부대):
시신을 못보신 거죠? “못봤죠. 분명히 살아있었어요. 우린 그렇게 확신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절대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 그 (삐라) 사진은 죽은 사진이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살아있다고…”

* 성재호 기자:
국방부가 밝힌 4명의 베트남 전쟁 실종 군인 이외에 다른 실종 군인이 더 있다는 증언은 또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수출용 의류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윤경 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주월사령부 민사 심리전 부대에 근무했습니다. 전투 부대원과는 달리 비교적 당시 전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이 씨는 1971년에만 대여섯 명의 국군 실종자가 발생해 수배를 했지만 결국 단 한 명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이윤동 상병’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이윤경(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주월 사령부):
“이윤동입니다. 내가 그 친구, 내가 이윤경이고. 내 동생이 이윤도여서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계급은? “상병일 거예요. 그 때 아마 5,6명을, 중위도 한 사람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몇 달 뒤에 다시 물어보니까 결국은 못 찾았다고 그랬거든요.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영현 처리 과정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성재호 기자:
베트남 전쟁 당시 사망자 시신은 나트랑 소재 100군수사령부 영현 중대에서 모아 화장 처리한 뒤 한국으로 송환했습니다. 하지만 종종 시신 숫자보다 전사자 명단이 더 많을 경우가 생기고는 했다는 게 참전 군인들의 얘깁니다.

* 김동문(베트남 전 참전 군인- 100군수사령부):
“67년 12월쯤에 퀴년지역에서 맹호부대 1개 소대 33명이 전멸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을 경우 나중에 시신수습을 하는데33명 명단은 나왔지만 시신은 15구인지 20구인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15구의 시신만 수습해가지고 누구 시신인지도 모른체 그 명단에 의해서 유족의 품으로….”

* 성재호 기자: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1970년 이후에는 아예 출국을 앞두고 손톱과 발톱을 잘라놓은 뒤 파병길에 올랐다고 말합니다.

* 이남원(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십자성 부대):
“전에 시체를 많이 못 찾은 것 같아요. 파월 전우와 선배들이…참전했다 숨진 시체를 많이 못 찾은 거 같은데.. 못 찾다 보니까 아마 만일 시체를 못 찾으면 그걸로 시체를 대신해서 고국으로 송환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아요.”

* 성재호 기자:
퀴논시와 빈딩성 일대에 돌아다니는 국군 인식표도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빈딩성 푸캇 공항 인근 한 농촌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미군 인식표를 내보이며 며칠 안으로 한국군의 것도 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주민:
“예전에는 한국군 인식표도 있었는데 다 팔았어요. 원한다면 며칠 안으로 구해다 보여줄 수 있어요.”

* 성재호 기자:
그러면서 자신이 한때 갖고 있었던 한국군 인식표에 새겨진 글자 하나를 기억해 써보였습니다. 아마도 ‘ㅊ’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가진 국군 인식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듯이 전사했더라도 인식표는 항상 군인의 목에 걸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군이 잃어버린 것을 주민들이 주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포로가 된 국군이나 숨진 국군의 시신으로부터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퀴년시에서는 국군 인식표 뿐만 아니라 본국으로 미처 송환하지 못한 국군 전사자들의 유골 함이 시장에서 골동품처럼 나돌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 성재호 기자:
베트남 전쟁 전사자 통계도 국군 실종자나 돌아오지 못한 유해가 상당수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더욱 부풀리고 있습니다. 지난 1973년 5월 이세호 당시 주월사령관은 국회에서 베트남 전쟁 국군 전사자는 3,844명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1985년 국방부 발간 주월한국군 전쟁 사에서는 전사자 3,806명을 포함해 사망자가 모두 4,960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국방부는 이어 지난 1992년 사망자를 5천 51명으로 고쳤고 2001에는 다시 5,066명으로 늘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고무줄처럼 늘어만 가는 국방부의 베트남 전 사망자 숫자를 믿는 이는 이제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 성재호 기자:
베트남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열사 묘지입니다. 열사 묘지는 프랑스 또는 미국과의 전쟁 등에서 숨진 베트남 군인들의 유해가 묻힌 곳으로 마을마다 거의 한 곳 이상 열사 묘지가 조성돼 있을 정도입니다. 퀴년시 외곽의 이 열사묘지에서는 요즘 새로운 묘를 조성하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최근 새로 발굴한 베트남 군인의 유해를 묻기 위해서 입니다. 빈딩성 전체로 볼 때 이처럼 새로 조성한 묘가 작년 한 해 동안 2백 기가 넘습니다.

* 하이(빈딩성 보훈노동국 부국장):
“작년 2월 빈딩성 인민위원회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격전지를 찾아내 조국을 위해 희생한 각 열사와 전사들을 추적하는 책임을 가진 기구를 구성했습니다.”

* 성재호 기자:
지난 5월 베트남 정부는30여년 전 라오스 일대에서 숨진 베트남 군인 유해 230여 구를 본국에 송환해 안장했습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접 국가와의 전쟁에서 숨진 군인들의 유해를 송환하려는 베트남 정부의 노력은 각별합니다. 올해만도 지금까지 8백 구가 넘는 유해를 찾아 각 고향의 열사묘지에 안장했습니다. 실종자와 유해를 찾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귀감이 될 만큼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미국은 수교 전인 1992년부터 이미 실종자와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베트남 종전 당시 2천 5백 명이 넘는 실종자 수가 지금은 천 8백 여 명으로 줄었습니다.

* 토머스 스미스 중령(미군 실종자 수색, 발굴 하노이 사무소장):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이 실종자 수색과 발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팀을 교육하고 어떻게 필요한 정보를 얻는지 등에 대해 문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경우 문의를 해온 적이 있나요? “글쎄요…저에게 직접 오는게 아니라 제 상부로 요청되는 거라서 모르겠습니다.”

* 성재호 기자:
지난해 7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고 박우식 소령의 유해가 35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박 소령의 유해는 미군이 베트남에서 자국 군인 실종자를 찾는 과정에서 한국군 유해로 판명돼 우리에게 보내준 것입니다. 35년 동안 우리 정부는 박 소령의 생사여부나 시신을 찾기 위한 별다른 노력도 기울이지 않다가 미군에게 무임 승차한 셈이 됐습니다.

* 성재호 기자:
우여곡절 끝에 우리 정부도 베트남 땅에서 처음으로 국군 유해 발굴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발굴 작업 기간동안 국군 유해가 나올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이제 정부가 베트남 전쟁 실종자와 유해 발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 이남원(베트남 참전 군인):
“안 나온다고 해서 일회적으로 끝내면 안되죠. 가능성이 자꾸…우리 전우들 증언도 나오고 있고 딴 사람들도 증언이 나오고 그러니까, 1%의 가능성만 있다면 우리 정부가 적극 나서서 우리 전우들을 찾아 와야죠.”

* 클로징 멘트:
머나먼 이국 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꽃다운 청춘들, 이념 대결이 퇴색된 지금 베트남 전 참전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은 조국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섰고 또 고귀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정부가 이들을 외면한다면 앞으로 어느 젊은이가 조국을 위해 총을 들겠느냐는 참전 군인들의 절규가 더 이상 울림 없는 메아리가 돼 돌아와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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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오지 않은 병사들
    • 입력 2003-09-28 00:00:00
    취재파일K
■방송 : 2003년 9월 28일(일) 밤09:30~10:10 / KBS1 ■취재 : 성재호 기자 jhsung@kbs.co.kr ■제작 : 보도제작국 보도제작2부 (전화)02-781-4321 (팩스)02-781-4398 (인터넷)http://www.kbs.co.kr/4321 * 오프닝 멘트: 베트남에서 국군이 철수한지 꼭 30년 만에 베트남 땅에서 국군의 유해를 찾기 위한 발굴작업이 시작됐습니다. 그 동안 우리 정부는 베트남 전쟁의 경우 6.25전쟁과 달리 유해 발굴이나 실종군인을 찾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베트남에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거나 실종된 군인은 7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시신이나 실종자가 이보다 더 많다는 주장입니다. * 성재호 기자: 패망한 월남 정권의 중심지 사이공, 지금은 호치민 시로 불리는 이 곳은 예나 지금이나 활력이 넘치는 베트남 최대의 도시이자 경제의 중심지입니다. 거리마다 오토바이 행렬이 물결처럼 넘치는 호치민 시에서 지난 날의 전쟁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호치민 시 북쪽,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베트남 중부 빈딩성의 성도 퀴년. 이 곳 퀴년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서쪽 안케 고개를 향해 30여분을 가면 안년으로 불리는 평야지대가 나옵니다. 지난 25일부터 이 곳의 한 야산에서는 중요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 땅에서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입니다. 이번 유해 발굴 작업은 베트남 여인의 증언과 이를 국내에 전한 한 참전 군인의 노력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 이남원/베트남 참전 군인 “작년 11월 달에, 여기 맹호부대 작전 지역을 돌다가 옛날에 한국 군인들이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가게에 들어가 혹시 여기 한국군이 옛날에 묻힌 데가 있느냐 했더니, 가게 남자분이 탕티순 씨를 소개시켜주더라구요.” * 성재호 기자: 국군 유해가 묻혀 있다는 야산 아랫마을을 한번도 떠나지 않고 52년을 살아온 탕티순 씨, 30여 년이 흘렀지만 그녀는 당시의 한국군 매장 광경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연도는 정확치 않지만 1966년 또는 1967년 말쯤이라고 말했습니다. * 탕 티 순 (한국 군인 매장 목격자): “구덩이를 길다랗게 판 다음에 주변에 한국 군인들이 둘러싸서 많이 울었습니다. 세 구의 시신을 차례대로 놓고는 부대장이 먼저 한줌의 흙을 뿌린 뒤에 나중에 군인들이 흙을 덮었습니다.” * 성재호 기자: 탕티순 씨의 증언대로라면 한국군이 전투 중에 숨진 전우 3명의 시신을 직접 매장했다는 얘기입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기 하루 전 탕티순 씨는 한국 군인들이 묻혀 있다는 위치로 취재 팀을 안내했습니다. * 탕티순 (한국군인 매장 목격자)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이 부근에 군인들이 묻혀있습니다.” * 성재호 기자: 탕티순 씨는 더구나 묻힌 3명의 한국 군인 가운데 한 명과는 애인 사이로 비록 태어난 지 8달 만에 숨졌지만 아이까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땅 속에 묻힌 옛 애인의 이름과 계급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탕티순 (한국 군인 매장 목격자): “김영화, 김영화” 계급은? “3줄” 상병? “예” * 성재호 기자: 국방부의 확인 결과 ‘김영화’라는 참전군인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가장 유사한 인물은1967년 11월 빈딩성 지역에서 숨진 맹호부대 “김영희” 상병. 하지만 더 이상 자세한 기록이 없어 김영화와 김영희가 동인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탕티순 씨의 증언을 토대로 지난 사흘동안 발굴 작업을 벌였지만 아직 유해는 나오지 않은 상탭니다. 안년 지역은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가 곳곳에 주둔했던 곳으로 발굴 현장이 위치한 야산 정상에도 중대급 규모의 부대가 건물을 짓고 주둔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탕티순 씨의 증언대로 이 곳에서 국군 전사자의 유해가 나올 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습니다. * 김종수 (대령/베트남 국방무관): “증언자의 증언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그 증언이 정확한가, 그 다음에 위치를 혹시 착각하고 있지 않는가? 또 설사 위치가 정확하더라도 36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지형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고…” * 성재호 기자: 조국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 선열들이 잠든 서울 동작동 국립 묘지. 이 곳에 조성된 5만 4천 여 위의 묘지 가운데 베트남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참전 군인들의 묘지는 4천 6백여 위에 이릅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숨진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5천 명이 넘지만 일부 가족들이 따로 묘지를 조성했다는 게 국립 현충원의 얘깁니다. 시신을 찾지 못해 혼백만을 모셔놓은 국립묘지 위패보관소. 이 곳에는 김인수 상병만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유일한 위패입니다. 국방부가 지금까지 밝힌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뒤 시신을 찾지 못하고 군인은 김인수 상병과 이용선 병장, 안상이 상병 등 모두 3명, 하지만 이 병장과 안 상병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위패조차 없습니다. 이와 함께 실종자로 처리한 군인은 4명으로 이 가운데 안학수 하사와 박성열 병장, 김인식 대위 등 3명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정준택 하사는 탈영 처리된 채 행방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5천명이 넘는 베트남 전쟁 군인 희생자 가운데 실종자와 유해를 찾지 못한 사망자는 국방부의 주장대로 단 7명 뿐일까? 국방부는 이와 관련해 공식적인 인터뷰를 거부했습니다. <맹호는 간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 성재호 기자: 지난 1964년 7월 국군은 소규모 의무부대를 시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합니다. 그 뒤 1973년 1월 철수할 때까지 8년 8개월동안 국군은 연인원 3십 2만 여 명이라는 외국 부대로는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참여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와 청룡부대 등 국군이 벌인 작전은 안케패스나 짜빈동 전투와 같은 대규모 작전이 천 백 여 차례, 소부대 작전은 무려 5십 7만 여 차례나 됩니다. 국군 피해도 커서 전사자와 순직 등을 합쳐 모두 5천 66명이 지금까지 국방부가 밝힌 베트남 전쟁 군인 사망자입니다. 이렇게 많은 국군 희생자가 났지만 지난 1973년, 베트남 철수 당시 이세호 파월사령관은 단 한명의 포로나 실종자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성재호 기자: 세월이 흘러 일부 밝혀지기는 했지만 베트남 전쟁은 철수 당시 단 한명의 국군 포로도 실종자도 없는 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베트남 중부 빈딩성과 중심지 퀴년시는 베트남 전쟁 당시 국군 맹호 사단이 주둔한 곳입니다. 맹호부대가 이 곳에서 철수한지 올해로 꼭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퀴년시와 빈딩성 곳곳에는 맹호부대가 남긴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현재 퀴논시 종합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지난 1968년 이 곳에 주둔했던 맹호부대가 지은 것입니다. 박물관 창고를 열자 맹호부대 마크가 선명한 철제 표지판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 당시에는 건물 현관에 붙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박물관 관계자 “1968년, 한국군이 건물을 지어 기증했다고 써져 있습니다.” * 성재호 기자: 당시 맹호부대장이었던 윤필용 장군의 빛바랜 사진들도 남아 있습니다. 퀴논시 외곽 농촌 지역에서도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흔적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곳 빈딩성과 퀴논시 지역에서 맹호부대는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주요 보급로였던19번 국도를 차단하는 것이 주임무였습니다. 19번 국도를 따라 빈딩성 서쪽 끝까지 가면 안케 고지가 나옵니다. 대관령 고갯길처럼 꼬불꼬불한 안케고지 가는 길 곳곳은 맹호부대와 베트남 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입니다. * 웅엔 쫑 루(빈딩성 재향군인회장/북베트남 연대장 출신): “한국군이 이 쪽에 진을 치고서는 이 길을 감시했습니다.” 베트남 군은 어디에 있었나요? “베트남 군은 저 쪽 너머에 진지를 파고 있었고.” 한국군은요? “한국군은 바로 요 앞 산에…” * 성재호 기자: 당시 638고지로 불렸던 안케고지 최정상. 정상 부근에 널려 있는 녹슨 포탄 껍질들은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638 고지 정상 한 가운데는 당시 이 곳에서 숨진 전우들을 기리며 맹호 부대 원들이 세운 위령비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 브릿지 : 지난 1972년 북베트남 정규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이 곳 안케지구에서는 모두 2백 명이 넘는 국군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전사자만도 7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성재호 기자: 국방부가 밝힌 안케지구 전투의 전사자는 75명,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전사한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 즉 월맹군의 포로가 된 국군이 있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안케 고지 전투를 겪었던 참전군인 강길원 씨는 당시 같은 소대원이었던 부인호 일병이 638고지 수색도중 적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됐다고 말합니다. *강길원(베트남 전 참전 군인- 맹호부대): “그 쪽에서 반발이 심하니까 소대장이 후퇴하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후퇴를 해서 돌아왔는데, 부인호 일병은 거기서 못 빠져 나오고 사로 잡힌 거죠. 사로잡혔다고 확신하는데 왜냐면 2,3일쯤 뒤에 삐라가 날아왔는데 부일병이 우리에게 자수를 했다고 그게 한국말로 적혀있더라구요.” * 성재호 기자: 월맹 군이 뿌린 선전 물에는 부일병의 살아있는 얼굴 사진도 실려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소대원들이 시신조차 보지 못했는데도 부인호 일병은 실종자가 아닌 안케패스 전투 전사자 75명에 포함돼 있습니다. * 강길원 (베트남 전 참전군인- 맹호부대): 시신을 못보신 거죠? “못봤죠. 분명히 살아있었어요. 우린 그렇게 확신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절대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 그 (삐라) 사진은 죽은 사진이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살아있다고…” * 성재호 기자: 국방부가 밝힌 4명의 베트남 전쟁 실종 군인 이외에 다른 실종 군인이 더 있다는 증언은 또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수출용 의류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윤경 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주월사령부 민사 심리전 부대에 근무했습니다. 전투 부대원과는 달리 비교적 당시 전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이 씨는 1971년에만 대여섯 명의 국군 실종자가 발생해 수배를 했지만 결국 단 한 명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이윤동 상병’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이윤경(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주월 사령부): “이윤동입니다. 내가 그 친구, 내가 이윤경이고. 내 동생이 이윤도여서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계급은? “상병일 거예요. 그 때 아마 5,6명을, 중위도 한 사람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몇 달 뒤에 다시 물어보니까 결국은 못 찾았다고 그랬거든요.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영현 처리 과정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성재호 기자: 베트남 전쟁 당시 사망자 시신은 나트랑 소재 100군수사령부 영현 중대에서 모아 화장 처리한 뒤 한국으로 송환했습니다. 하지만 종종 시신 숫자보다 전사자 명단이 더 많을 경우가 생기고는 했다는 게 참전 군인들의 얘깁니다. * 김동문(베트남 전 참전 군인- 100군수사령부): “67년 12월쯤에 퀴년지역에서 맹호부대 1개 소대 33명이 전멸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을 경우 나중에 시신수습을 하는데33명 명단은 나왔지만 시신은 15구인지 20구인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15구의 시신만 수습해가지고 누구 시신인지도 모른체 그 명단에 의해서 유족의 품으로….” * 성재호 기자: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1970년 이후에는 아예 출국을 앞두고 손톱과 발톱을 잘라놓은 뒤 파병길에 올랐다고 말합니다. * 이남원(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십자성 부대): “전에 시체를 많이 못 찾은 것 같아요. 파월 전우와 선배들이…참전했다 숨진 시체를 많이 못 찾은 거 같은데.. 못 찾다 보니까 아마 만일 시체를 못 찾으면 그걸로 시체를 대신해서 고국으로 송환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아요.” * 성재호 기자: 퀴논시와 빈딩성 일대에 돌아다니는 국군 인식표도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빈딩성 푸캇 공항 인근 한 농촌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미군 인식표를 내보이며 며칠 안으로 한국군의 것도 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주민: “예전에는 한국군 인식표도 있었는데 다 팔았어요. 원한다면 며칠 안으로 구해다 보여줄 수 있어요.” * 성재호 기자: 그러면서 자신이 한때 갖고 있었던 한국군 인식표에 새겨진 글자 하나를 기억해 써보였습니다. 아마도 ‘ㅊ’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가진 국군 인식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듯이 전사했더라도 인식표는 항상 군인의 목에 걸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군이 잃어버린 것을 주민들이 주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포로가 된 국군이나 숨진 국군의 시신으로부터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퀴년시에서는 국군 인식표 뿐만 아니라 본국으로 미처 송환하지 못한 국군 전사자들의 유골 함이 시장에서 골동품처럼 나돌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 성재호 기자: 베트남 전쟁 전사자 통계도 국군 실종자나 돌아오지 못한 유해가 상당수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더욱 부풀리고 있습니다. 지난 1973년 5월 이세호 당시 주월사령관은 국회에서 베트남 전쟁 국군 전사자는 3,844명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1985년 국방부 발간 주월한국군 전쟁 사에서는 전사자 3,806명을 포함해 사망자가 모두 4,960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국방부는 이어 지난 1992년 사망자를 5천 51명으로 고쳤고 2001에는 다시 5,066명으로 늘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고무줄처럼 늘어만 가는 국방부의 베트남 전 사망자 숫자를 믿는 이는 이제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 성재호 기자: 베트남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열사 묘지입니다. 열사 묘지는 프랑스 또는 미국과의 전쟁 등에서 숨진 베트남 군인들의 유해가 묻힌 곳으로 마을마다 거의 한 곳 이상 열사 묘지가 조성돼 있을 정도입니다. 퀴년시 외곽의 이 열사묘지에서는 요즘 새로운 묘를 조성하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최근 새로 발굴한 베트남 군인의 유해를 묻기 위해서 입니다. 빈딩성 전체로 볼 때 이처럼 새로 조성한 묘가 작년 한 해 동안 2백 기가 넘습니다. * 하이(빈딩성 보훈노동국 부국장): “작년 2월 빈딩성 인민위원회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격전지를 찾아내 조국을 위해 희생한 각 열사와 전사들을 추적하는 책임을 가진 기구를 구성했습니다.” * 성재호 기자: 지난 5월 베트남 정부는30여년 전 라오스 일대에서 숨진 베트남 군인 유해 230여 구를 본국에 송환해 안장했습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접 국가와의 전쟁에서 숨진 군인들의 유해를 송환하려는 베트남 정부의 노력은 각별합니다. 올해만도 지금까지 8백 구가 넘는 유해를 찾아 각 고향의 열사묘지에 안장했습니다. 실종자와 유해를 찾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귀감이 될 만큼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미국은 수교 전인 1992년부터 이미 실종자와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베트남 종전 당시 2천 5백 명이 넘는 실종자 수가 지금은 천 8백 여 명으로 줄었습니다. * 토머스 스미스 중령(미군 실종자 수색, 발굴 하노이 사무소장):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이 실종자 수색과 발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팀을 교육하고 어떻게 필요한 정보를 얻는지 등에 대해 문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경우 문의를 해온 적이 있나요? “글쎄요…저에게 직접 오는게 아니라 제 상부로 요청되는 거라서 모르겠습니다.” * 성재호 기자: 지난해 7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고 박우식 소령의 유해가 35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박 소령의 유해는 미군이 베트남에서 자국 군인 실종자를 찾는 과정에서 한국군 유해로 판명돼 우리에게 보내준 것입니다. 35년 동안 우리 정부는 박 소령의 생사여부나 시신을 찾기 위한 별다른 노력도 기울이지 않다가 미군에게 무임 승차한 셈이 됐습니다. * 성재호 기자: 우여곡절 끝에 우리 정부도 베트남 땅에서 처음으로 국군 유해 발굴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발굴 작업 기간동안 국군 유해가 나올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이제 정부가 베트남 전쟁 실종자와 유해 발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 이남원(베트남 참전 군인): “안 나온다고 해서 일회적으로 끝내면 안되죠. 가능성이 자꾸…우리 전우들 증언도 나오고 있고 딴 사람들도 증언이 나오고 그러니까, 1%의 가능성만 있다면 우리 정부가 적극 나서서 우리 전우들을 찾아 와야죠.” * 클로징 멘트: 머나먼 이국 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꽃다운 청춘들, 이념 대결이 퇴색된 지금 베트남 전 참전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은 조국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섰고 또 고귀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정부가 이들을 외면한다면 앞으로 어느 젊은이가 조국을 위해 총을 들겠느냐는 참전 군인들의 절규가 더 이상 울림 없는 메아리가 돼 돌아와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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