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네가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어”…‘엄마 성’ 물려준 아빠의 편지

입력 2021.11.11 (07:00) 수정 2021.11.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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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지난 9일, 당연하게 여겨지던 '아빠 성' 대신 '엄마 성'을 자녀에게 물려준 가족들의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마음먹는 것도, 주변을 설득하는 것도, 실제로 법적 절차를 밟기도 모두 쉽진 않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게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방송에선 못다 한 이야기, 지금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연관기사] “아빠 성 대신 엄마 성 쓸게요”…“부성우선주의 폐지해야” (21.11.09. KBS 뉴스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321013

■ "엄마 성 쓰려면 이혼해야 한다고요?"

김지예 씨와 정민구 씨는 결혼 9년 차에 접어든 부부입니다. 혼인신고 당시엔 자녀를 가질 생각이 없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서 지난 5월 딸 정원이를 출산했는데요.

이때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려고 보니,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혼인신고 당시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지 않았다면, 이제 와서 엄마 성을 물려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실제 혼인신고서에는 자녀에게 ‘모의 성·본’을 물려줄 수 있는 조항이 있다.실제 혼인신고서에는 자녀에게 ‘모의 성·본’을 물려줄 수 있는 조항이 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선택지는 2가지였습니다. 서류상 이혼을 한 다음 다시 혼인신고를 하면서 8년 전에 체크하지 않았던 '모의 성·본 협의' 조항에 체크하거나, 아니면 일단 아빠 성을 따른 뒤 법원에 변경 청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고민 끝에 법원에 청구서를 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정민구 씨 (정원이 아빠)
"실제로 저희는 이혼까지 생각했었어요.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혼 후에 다시 혼인신고를 하고 거기에 엄마 성 쓰기를 체크하는 거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하려고 하니까 이게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아무리 서류적인 거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해서 할 일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성본 변경 신청을 하게 됐습니다."


■ 법원에 낸 20쪽짜리 청구서…한 달 만에 '허가' 결정

이혼만큼 확실한 방법은 아니었기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청구서를 낸 지 한 달여 만에 서울가정법원의 '성·본 변경 허가' 결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스무 쪽에 가까운 청구서도 작성해 냈는데요. 일부를 발췌해봤습니다.

자의 성과 본의 변경허가 심판청구서 中

청구인들 부부는 사건본인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 감수성을 가진 사람’
으로 자라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청구인들은 사건본인이 모의 성과 본을
따름으로서 자신의 이름이 여성을 배제시킨 가부장적 가족 질서에 저항하는 맥락에
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평등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모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결정은 아직 낯선 것이므로, 청구인들 역시 모의 성
과 본을 따르는 것이 자녀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지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
니다. 그러나 청구인들은 고민 끝에 ‘부의 성본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시
되고, 모의 성본을 물려주는 것이 예외적인 사회’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는 결론
에 이르렀고 사건본인에게 모의 성과 본을 물려줄 결심을 굳혔습니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이번 결정에 대해 "부모가 동의했고, 자녀의 복리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판단한 것"이라며 "우리 민법에서 엄마 성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의 송세이 활동가는 "이번 판결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리게 돼 너무 감사한 마음"이라며 "궁극적으로는 부성우선주의 원칙을 폐지하고, 부부가 합의해 성·본을 물려줄 수 있도록 민법과 행정절차 개정을 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대부분은 혼인신고 때 자녀의 성본을 결정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충분한 가족들 간의 협의 없이 부의 성본을 따른다고 체크하고 제출하게 된다"며 "자녀의 성·본 선택을 출생신고 때 하도록 개정을 요청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엄마 성' 물려준 아빠의 편지…"내 것을 뺏긴다는 마음이 들었어"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성과 본에 관한 사건'은 한 해에 4,746건이나 접수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3,924건이 인용 결정을 받았는데요. 지금도 한부모 가정이나 재혼 가정 등에서 편견 섞인 시선을 피하려고 성을 변경하는 경우가 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김지예 씨와 정민구 씨 부부처럼 '혼인 중'에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하는 경우는 드문 사례일 겁니다. 이들은 오히려 바로 그 편견 섞인 시선에 맞서기 위해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이 시끄럽고,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정원이의 아빠 정민구 씨는 지난 9일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성·본 변경 청구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에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편지에는 엄마 성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느낀 아빠로서의 솔직한 소회가 담겨 있어, 이 자리에 옮겨 봅니다.

정원이에게

사랑하는 정원아. '언젠가 정원이가 이 영상편지를 보겠지?'라는 마음으로 썼으니까 나중에 꼭 봐줘.

오늘로 정원이가 태어난 지 벌써 179일째네. 그동안 무럭무럭 잘 자라줘서 너무 고마워. 병원에서 네 심장 소리를 듣고 너의 눈코입을 보며 너를 상상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너와 함께한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긴 했지만,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가슴 벅참을 선물해 주기도 했어. 그리고 정원이 아빠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갖게 해줘서 고마워. 널 키우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더라고.

저출산이 국가적 문제라고 하면서 보건소에서 유축기 하나 빌리려면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지?
산후조리원은 왜 이렇게 비싸지?
이마트 월계점 수유실에는 왜 아빠가 들어갈 수 없지?
유아차가 갈 수 없는 길이 왜 이렇게 많지?
노키즈존? 이건 차별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에게 왜 엄마 성을 물려 줄 수 없는 거지?

아빠는 정원이를 키우며 맞닥뜨리는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 나갈 생각이야. 엄마 성을 물려 주는 것도 그렇고.

사실 네게 엄마 성을 물려 주기로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어. 할머니, 할아버지를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주변 지인들의 반응도 떨떠름했거든. 유난 떤다는 느낌이랄까?

근데 네 엄마랑 오랜 시간 같이 얘기해 보니까 내가 망설였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그건 바로 내 것을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어. 정원이에게 아빠 성을 물려주는 게 당연한 건데, 남들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왜 성을 물려줄 수 없지? 뭐 이런 쪼잔한 마음 말이야.

근데 따지고 보면 엄마가 열 달 동안 뱃속에 정원이 품고 목숨 걸고 출산해서 젖 물리느라 밤낮없이 고생하는 거 생각하면 아빠는 기여도가 미비한데 말야. 성은 아빠 성을 물려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게 미안하더라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까, 성이 뭐 대순가 싶어. 정원이가 김정원이든, 정정원이든 정원이는 정원이잖아. 근데 정정원은 좀 그러네… 청정원이라고 놀림 받을 거 같아…

근데 네 이름이 왜 정원인 줄 알아? 엄마가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하거든. 작은 베란다 정원에 앉아 한낮의 따스한 햇볕 쬐기. 식물들에 시원하게 물 뿌려 주기. 이런 걸 엄마는 무척 좋아해.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 모습을 보면 아빠도 기분이 좋아져. 그래서 너도 너만의 정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세상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거든. 그럴 때 너만의 정원에서 편하게 쉬고 놀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네 이름을 정원이라고 지었어. 기억해둬.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행복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는 것, 그걸 우린 인생이라고 불러.

근데 혹시 말야, 나중에 누가 네 성이 아빠 성과 다르다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편견 쟁이는 멀리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엄마 성 쓰는 걸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차별해 온 부성주의원칙에 우리는 당당히 맞선 거야. 앞으로도 편견과 차별에는 당당히 맞서는 정원이가 됐으면 좋겠어. 아빠가 너무 많은 걸 바라나? 대신 공부 해라, 좋은 대학 가라, 돈 많이 버는 일 해라, 결혼해라, 아기 낳아라. 이런 잔소리는 하지 않을게. 너의 삶을 살아. 이 정도면 너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정원아. 우리 재미나게 살아보자. 너와 함께 한 시간은 가슴 벅찼고 너와 함께 할 순간들이 기대되는구나.

2021년 11월 9일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성본 변경 확정원을 손에 쥔 아빠가


■ "편견 섞인 시선 던지는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김지예 씨와 정민구 씨 부부를 포함해 엄마 성을 물려준 가족들은, 엄마 성을 가진 아이를 차별하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아이가 그런 사회의 시선에 맞설 수 있는 사람으로 커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려운 선택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수연 씨와 박기용 씨 부부는 딸 제나에게 엄마 성인 '이 씨'를 물려줬습니다. 혼인신고를 출생신고와 함께 했기 때문에 김지예 씨와 정민구 씨 부부처럼 법원을 찾는 일은 없었지만 주변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박기용 씨 (제나 아빠)
"저희가 엄마 성을 물려줄 때 저희 부모님들이 우려했던 핵심이 혹시 주변에서 '재혼 가정의 아이라든지 아버지가 없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떤 아이에 대한 차별이 되고 그걸로 연결시킨다는 것 자체가 지금 그 사회가 여전히 한부모 가정이나 재혼 가정에 대해서 안 좋은 처우를 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게 없는 식으로 계속 사회가 바뀌어가는 게 바람직한 것이고 아이의 존재 자체가 거기에 좀 기여할 수 있게끔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였죠."

엄마 성을 쓰는 건 아직 우리 사회에 너무 낯선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변화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에 물음표를 제기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시작될 겁니다. 작은 움직임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한 뼘 더 포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길, 이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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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네가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어”…‘엄마 성’ 물려준 아빠의 편지
    • 입력 2021-11-11 07:00:35
    • 수정2021-11-11 07:00:43
    취재후·사건후

KBS는 지난 9일, 당연하게 여겨지던 '아빠 성' 대신 '엄마 성'을 자녀에게 물려준 가족들의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마음먹는 것도, 주변을 설득하는 것도, 실제로 법적 절차를 밟기도 모두 쉽진 않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게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방송에선 못다 한 이야기, 지금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연관기사] “아빠 성 대신 엄마 성 쓸게요”…“부성우선주의 폐지해야” (21.11.09. KBS 뉴스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321013

■ "엄마 성 쓰려면 이혼해야 한다고요?"

김지예 씨와 정민구 씨는 결혼 9년 차에 접어든 부부입니다. 혼인신고 당시엔 자녀를 가질 생각이 없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서 지난 5월 딸 정원이를 출산했는데요.

이때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려고 보니,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혼인신고 당시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지 않았다면, 이제 와서 엄마 성을 물려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실제 혼인신고서에는 자녀에게 ‘모의 성·본’을 물려줄 수 있는 조항이 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선택지는 2가지였습니다. 서류상 이혼을 한 다음 다시 혼인신고를 하면서 8년 전에 체크하지 않았던 '모의 성·본 협의' 조항에 체크하거나, 아니면 일단 아빠 성을 따른 뒤 법원에 변경 청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고민 끝에 법원에 청구서를 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정민구 씨 (정원이 아빠)
"실제로 저희는 이혼까지 생각했었어요.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혼 후에 다시 혼인신고를 하고 거기에 엄마 성 쓰기를 체크하는 거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하려고 하니까 이게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아무리 서류적인 거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해서 할 일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성본 변경 신청을 하게 됐습니다."


■ 법원에 낸 20쪽짜리 청구서…한 달 만에 '허가' 결정

이혼만큼 확실한 방법은 아니었기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청구서를 낸 지 한 달여 만에 서울가정법원의 '성·본 변경 허가' 결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스무 쪽에 가까운 청구서도 작성해 냈는데요. 일부를 발췌해봤습니다.

자의 성과 본의 변경허가 심판청구서 中

청구인들 부부는 사건본인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 감수성을 가진 사람’
으로 자라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청구인들은 사건본인이 모의 성과 본을
따름으로서 자신의 이름이 여성을 배제시킨 가부장적 가족 질서에 저항하는 맥락에
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평등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모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결정은 아직 낯선 것이므로, 청구인들 역시 모의 성
과 본을 따르는 것이 자녀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지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
니다. 그러나 청구인들은 고민 끝에 ‘부의 성본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시
되고, 모의 성본을 물려주는 것이 예외적인 사회’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는 결론
에 이르렀고 사건본인에게 모의 성과 본을 물려줄 결심을 굳혔습니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이번 결정에 대해 "부모가 동의했고, 자녀의 복리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판단한 것"이라며 "우리 민법에서 엄마 성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의 송세이 활동가는 "이번 판결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리게 돼 너무 감사한 마음"이라며 "궁극적으로는 부성우선주의 원칙을 폐지하고, 부부가 합의해 성·본을 물려줄 수 있도록 민법과 행정절차 개정을 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대부분은 혼인신고 때 자녀의 성본을 결정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충분한 가족들 간의 협의 없이 부의 성본을 따른다고 체크하고 제출하게 된다"며 "자녀의 성·본 선택을 출생신고 때 하도록 개정을 요청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엄마 성' 물려준 아빠의 편지…"내 것을 뺏긴다는 마음이 들었어"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성과 본에 관한 사건'은 한 해에 4,746건이나 접수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3,924건이 인용 결정을 받았는데요. 지금도 한부모 가정이나 재혼 가정 등에서 편견 섞인 시선을 피하려고 성을 변경하는 경우가 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김지예 씨와 정민구 씨 부부처럼 '혼인 중'에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하는 경우는 드문 사례일 겁니다. 이들은 오히려 바로 그 편견 섞인 시선에 맞서기 위해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이 시끄럽고,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정원이의 아빠 정민구 씨는 지난 9일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성·본 변경 청구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에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편지에는 엄마 성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느낀 아빠로서의 솔직한 소회가 담겨 있어, 이 자리에 옮겨 봅니다.

정원이에게

사랑하는 정원아. '언젠가 정원이가 이 영상편지를 보겠지?'라는 마음으로 썼으니까 나중에 꼭 봐줘.

오늘로 정원이가 태어난 지 벌써 179일째네. 그동안 무럭무럭 잘 자라줘서 너무 고마워. 병원에서 네 심장 소리를 듣고 너의 눈코입을 보며 너를 상상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너와 함께한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긴 했지만,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가슴 벅참을 선물해 주기도 했어. 그리고 정원이 아빠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갖게 해줘서 고마워. 널 키우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더라고.

저출산이 국가적 문제라고 하면서 보건소에서 유축기 하나 빌리려면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지?
산후조리원은 왜 이렇게 비싸지?
이마트 월계점 수유실에는 왜 아빠가 들어갈 수 없지?
유아차가 갈 수 없는 길이 왜 이렇게 많지?
노키즈존? 이건 차별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에게 왜 엄마 성을 물려 줄 수 없는 거지?

아빠는 정원이를 키우며 맞닥뜨리는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 나갈 생각이야. 엄마 성을 물려 주는 것도 그렇고.

사실 네게 엄마 성을 물려 주기로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어. 할머니, 할아버지를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주변 지인들의 반응도 떨떠름했거든. 유난 떤다는 느낌이랄까?

근데 네 엄마랑 오랜 시간 같이 얘기해 보니까 내가 망설였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그건 바로 내 것을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어. 정원이에게 아빠 성을 물려주는 게 당연한 건데, 남들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왜 성을 물려줄 수 없지? 뭐 이런 쪼잔한 마음 말이야.

근데 따지고 보면 엄마가 열 달 동안 뱃속에 정원이 품고 목숨 걸고 출산해서 젖 물리느라 밤낮없이 고생하는 거 생각하면 아빠는 기여도가 미비한데 말야. 성은 아빠 성을 물려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게 미안하더라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까, 성이 뭐 대순가 싶어. 정원이가 김정원이든, 정정원이든 정원이는 정원이잖아. 근데 정정원은 좀 그러네… 청정원이라고 놀림 받을 거 같아…

근데 네 이름이 왜 정원인 줄 알아? 엄마가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하거든. 작은 베란다 정원에 앉아 한낮의 따스한 햇볕 쬐기. 식물들에 시원하게 물 뿌려 주기. 이런 걸 엄마는 무척 좋아해.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 모습을 보면 아빠도 기분이 좋아져. 그래서 너도 너만의 정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세상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거든. 그럴 때 너만의 정원에서 편하게 쉬고 놀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네 이름을 정원이라고 지었어. 기억해둬.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행복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는 것, 그걸 우린 인생이라고 불러.

근데 혹시 말야, 나중에 누가 네 성이 아빠 성과 다르다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편견 쟁이는 멀리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엄마 성 쓰는 걸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차별해 온 부성주의원칙에 우리는 당당히 맞선 거야. 앞으로도 편견과 차별에는 당당히 맞서는 정원이가 됐으면 좋겠어. 아빠가 너무 많은 걸 바라나? 대신 공부 해라, 좋은 대학 가라, 돈 많이 버는 일 해라, 결혼해라, 아기 낳아라. 이런 잔소리는 하지 않을게. 너의 삶을 살아. 이 정도면 너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정원아. 우리 재미나게 살아보자. 너와 함께 한 시간은 가슴 벅찼고 너와 함께 할 순간들이 기대되는구나.

2021년 11월 9일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성본 변경 확정원을 손에 쥔 아빠가


■ "편견 섞인 시선 던지는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김지예 씨와 정민구 씨 부부를 포함해 엄마 성을 물려준 가족들은, 엄마 성을 가진 아이를 차별하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아이가 그런 사회의 시선에 맞설 수 있는 사람으로 커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려운 선택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수연 씨와 박기용 씨 부부는 딸 제나에게 엄마 성인 '이 씨'를 물려줬습니다. 혼인신고를 출생신고와 함께 했기 때문에 김지예 씨와 정민구 씨 부부처럼 법원을 찾는 일은 없었지만 주변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박기용 씨 (제나 아빠)
"저희가 엄마 성을 물려줄 때 저희 부모님들이 우려했던 핵심이 혹시 주변에서 '재혼 가정의 아이라든지 아버지가 없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떤 아이에 대한 차별이 되고 그걸로 연결시킨다는 것 자체가 지금 그 사회가 여전히 한부모 가정이나 재혼 가정에 대해서 안 좋은 처우를 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게 없는 식으로 계속 사회가 바뀌어가는 게 바람직한 것이고 아이의 존재 자체가 거기에 좀 기여할 수 있게끔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였죠."

엄마 성을 쓰는 건 아직 우리 사회에 너무 낯선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변화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에 물음표를 제기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시작될 겁니다. 작은 움직임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한 뼘 더 포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길, 이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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