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50여 년 설움 속 ‘지뢰꽃 마을 대마리’

입력 2022.04.23 (08:46) 수정 2022.04.2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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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강원도 철원 땅은 6.25 전쟁의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입니다.

북한의 노동당사, 백마고지 등 치열한 전투의 상흔이 남아 있습니다.

네, 철원의 전방지역에는 전쟁 때 매설했던 수많은 지뢰가 아직도 남아있기도 한데요.

이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땅에 세워진 특별한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이하영 리포터, 직접 다녀오셨죠?

[답변]

네, 대마리라고 하는 곳에 다녀왔는데요.

주민들이 직접 만든 지뢰탐지기를 이용해서 지뢰를 찾고 제거하면서 논과 밭을 일궜다고 합니다.

[앵커]

마을을 이루기까지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을 테고.

[답변]

네 그렇습니다. 지뢰 때문에 부상은 다반사고, 나중엔 땅 소유권 문제로 설움도 겪었다고 합니다.

지뢰밭 위에 세워진 마을 대마리, 이 속에 얽힌 주민들의 애환, 지금 만나보시죠.

[리포트]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아래 위치한 철원군 대마리.

비슷비슷한 모양의 양옥집들이 줄지어 있는데요.

평범한 시골 동네처럼 보이는 이곳에는 한반도 분단의 아픔이 묻어있습니다.

[김종도/철원군 대마리 주민 : "한동안은 신탄리 검문소하고 여기 검문소 이 앞에 사람을 통과를 안 시켰어요."]

대마리는 6.25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방치된 땅이었습니다.

1968년, 당시 정부는 북한보다 잘 산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마리에 전략촌을 건설했는데요.

150세대, 905명의 주민들이 정착했습니다.

[윤상섭/철원군 대마리 주민 : "60년대 후반에 마을이 재향군인들 제대군인들 위주로 해서 정부에서 입주시켜서 남의 땅이라도 전부 개간하라고 나눠줬어요. 그렇게 돼서 마을이 형성되고 그랬습니다."]

정착 초기 대마리 사람들은 천막에서 먹고 자며, 황무지를 일궜습니다.

접경지역이라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농사를 접고 전투 준비에 나서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주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1985년 대마리 주민 인터뷰 : "막 들어가 가지고 지뢰를 캐고 하다 사고도 나고 그랬죠. 그 당시 절단돼서 의족이에요. 의족."]

[윤상섭/철원군 대마리 주민 : "지뢰탐지기로 허가 난 구역에서 (지뢰를) 탐지해서 개간하게 되고요. 폭풍 지뢰라 그래서 발목지뢰. 발목들이 많이 잘리셨어요. 특히 그런 분들이 많았죠."]

목숨을 담보로 지뢰밭을 개간했지만, 입주 당시 작성한 각서 때문에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1985년 대마리 주민 인터뷰 : "저희가 어떻게 했느냐면 여기 들어와서 개척을 하다 죽어도 이의가 없다는 각서까지 쓰고 들어왔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대마리. 하지만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는데요. 이 마을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대마리를 찾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철원에서 나고 자란 정춘근 시인.

지역 문인으로서 철원군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학창 시절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대마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춘근/시인 : "(친구들이) 대마리 얘기를 하는데 지뢰 사고 얘기 또 지뢰를 갖고 놀았던 얘기를 할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 지역이 있나 철원이지만."]

대마리의 이야기를 들은 정춘근 씨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먹먹했는데요.

시인이 된 뒤엔 대마리 주민들이 정착 과정에 겪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춘근/시인 : "제가 보니까 대마리 개척 1세대 얘기가 어느 기록에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깊은 트라우마 이런 것들이 해소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보니까 일단 세상에 널리 알려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대마리의 삶을 담은 ‘지뢰꽃 마을, 대마리’라는 시집을 발표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정착한 대마리 주민들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정부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1인당 2만 제곱미터의 개간지를 받기로 하고 이곳에 정착했는데요.

하지만 개간 초기엔 무관심했던 토지 소유주들이 소송을 걸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은 겁니다.

[정춘근/시인 : "땅을 개간하고 나서 등기를 내려고 그러니까 국유지가 있었고요. 일본 사람이 버린 적산지가 있었거든요. 그다음에 개인 사유지가 있었는데 국유지조차 국가에서 그냥 주지 않고 전부 다 임대료를 5년 치 선불로 받고 장기분할로 줬고요. 일본인 땅도 딱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개인 땅은 아직까지 해결도 안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대마리 주민들의 아픔을 기억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다시는 이러한 이념에 의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대마리 입주자 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화배 할머니.

월남전에 참전했던 남편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이화배/대마리 입주자 동지회 회장 : "나이가 노랑 저고리 빨간 치마 입고 왔으니까 23살. 23살에 입주해왔어요. 정부에서 일자로 방 두 칸에 부엌 하나씩 지어주는 일자집이었어요. 그런 집에서 산 거지. 이렇게 다 줄대로."]

수많은 고난 속에도 맨주먹 하나로 마을을 일궜다는 자부심에 5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왔는데요.

한편으론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 짙어집니다.

[이화배/대마리 입주자 동지회 회장 : "우리가 이북이에요 고향이. 근데 부모님들 말씀 들으면 거긴 자원이 많다 그랬어. 서로 통일이 돼서 좋아서 같이 나누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은 갖고 살아요."]

지뢰밭이었던 이곳에도 어김없이 봄을 알리는 꽃이 피었습니다.

민통선 주민들의 애달픈 희생으로 만들어진 마을 대마리.

1세대 입주민들은 대부분 세상을 등지고.

이제, 11명만이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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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23 08:46:38
    • 수정2022-04-23 09: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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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강원도 철원 땅은 6.25 전쟁의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입니다.

북한의 노동당사, 백마고지 등 치열한 전투의 상흔이 남아 있습니다.

네, 철원의 전방지역에는 전쟁 때 매설했던 수많은 지뢰가 아직도 남아있기도 한데요.

이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땅에 세워진 특별한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이하영 리포터, 직접 다녀오셨죠?

[답변]

네, 대마리라고 하는 곳에 다녀왔는데요.

주민들이 직접 만든 지뢰탐지기를 이용해서 지뢰를 찾고 제거하면서 논과 밭을 일궜다고 합니다.

[앵커]

마을을 이루기까지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을 테고.

[답변]

네 그렇습니다. 지뢰 때문에 부상은 다반사고, 나중엔 땅 소유권 문제로 설움도 겪었다고 합니다.

지뢰밭 위에 세워진 마을 대마리, 이 속에 얽힌 주민들의 애환, 지금 만나보시죠.

[리포트]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아래 위치한 철원군 대마리.

비슷비슷한 모양의 양옥집들이 줄지어 있는데요.

평범한 시골 동네처럼 보이는 이곳에는 한반도 분단의 아픔이 묻어있습니다.

[김종도/철원군 대마리 주민 : "한동안은 신탄리 검문소하고 여기 검문소 이 앞에 사람을 통과를 안 시켰어요."]

대마리는 6.25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방치된 땅이었습니다.

1968년, 당시 정부는 북한보다 잘 산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마리에 전략촌을 건설했는데요.

150세대, 905명의 주민들이 정착했습니다.

[윤상섭/철원군 대마리 주민 : "60년대 후반에 마을이 재향군인들 제대군인들 위주로 해서 정부에서 입주시켜서 남의 땅이라도 전부 개간하라고 나눠줬어요. 그렇게 돼서 마을이 형성되고 그랬습니다."]

정착 초기 대마리 사람들은 천막에서 먹고 자며, 황무지를 일궜습니다.

접경지역이라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농사를 접고 전투 준비에 나서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주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1985년 대마리 주민 인터뷰 : "막 들어가 가지고 지뢰를 캐고 하다 사고도 나고 그랬죠. 그 당시 절단돼서 의족이에요. 의족."]

[윤상섭/철원군 대마리 주민 : "지뢰탐지기로 허가 난 구역에서 (지뢰를) 탐지해서 개간하게 되고요. 폭풍 지뢰라 그래서 발목지뢰. 발목들이 많이 잘리셨어요. 특히 그런 분들이 많았죠."]

목숨을 담보로 지뢰밭을 개간했지만, 입주 당시 작성한 각서 때문에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1985년 대마리 주민 인터뷰 : "저희가 어떻게 했느냐면 여기 들어와서 개척을 하다 죽어도 이의가 없다는 각서까지 쓰고 들어왔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대마리. 하지만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는데요. 이 마을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대마리를 찾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철원에서 나고 자란 정춘근 시인.

지역 문인으로서 철원군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학창 시절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대마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춘근/시인 : "(친구들이) 대마리 얘기를 하는데 지뢰 사고 얘기 또 지뢰를 갖고 놀았던 얘기를 할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 지역이 있나 철원이지만."]

대마리의 이야기를 들은 정춘근 씨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먹먹했는데요.

시인이 된 뒤엔 대마리 주민들이 정착 과정에 겪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춘근/시인 : "제가 보니까 대마리 개척 1세대 얘기가 어느 기록에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깊은 트라우마 이런 것들이 해소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보니까 일단 세상에 널리 알려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대마리의 삶을 담은 ‘지뢰꽃 마을, 대마리’라는 시집을 발표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정착한 대마리 주민들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정부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1인당 2만 제곱미터의 개간지를 받기로 하고 이곳에 정착했는데요.

하지만 개간 초기엔 무관심했던 토지 소유주들이 소송을 걸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은 겁니다.

[정춘근/시인 : "땅을 개간하고 나서 등기를 내려고 그러니까 국유지가 있었고요. 일본 사람이 버린 적산지가 있었거든요. 그다음에 개인 사유지가 있었는데 국유지조차 국가에서 그냥 주지 않고 전부 다 임대료를 5년 치 선불로 받고 장기분할로 줬고요. 일본인 땅도 딱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개인 땅은 아직까지 해결도 안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대마리 주민들의 아픔을 기억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다시는 이러한 이념에 의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대마리 입주자 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화배 할머니.

월남전에 참전했던 남편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이화배/대마리 입주자 동지회 회장 : "나이가 노랑 저고리 빨간 치마 입고 왔으니까 23살. 23살에 입주해왔어요. 정부에서 일자로 방 두 칸에 부엌 하나씩 지어주는 일자집이었어요. 그런 집에서 산 거지. 이렇게 다 줄대로."]

수많은 고난 속에도 맨주먹 하나로 마을을 일궜다는 자부심에 5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왔는데요.

한편으론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 짙어집니다.

[이화배/대마리 입주자 동지회 회장 : "우리가 이북이에요 고향이. 근데 부모님들 말씀 들으면 거긴 자원이 많다 그랬어. 서로 통일이 돼서 좋아서 같이 나누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은 갖고 살아요."]

지뢰밭이었던 이곳에도 어김없이 봄을 알리는 꽃이 피었습니다.

민통선 주민들의 애달픈 희생으로 만들어진 마을 대마리.

1세대 입주민들은 대부분 세상을 등지고.

이제, 11명만이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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