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71년 만에 인정…6·25 참전 ‘소녀 첩보원’

입력 2022.08.27 (08:17) 수정 2022.09.0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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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6.25 전쟁을 직접 겪고 기억하는 세대는 이제 일흔 중반 이상의 나이가 되셨을 텐데요.

그 치열했던 6.25 전쟁통에 적진에 몰래 들어가 첩보 활동을 펼쳤던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네, 군번 없는 군인이었던 이분들에게 최근 기쁜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6.25전쟁에 참전한 공로를 71년 만에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하영 리포터, 그 중 한 분을 직접 만나고 오셨죠?

[기자]

네, 인천 강화군에 사시는 민옥순 할머니를 뵙고 왔는데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나섰던 첩보원 활동을 이제라도 인정받아 다행이라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앵커]

10대 나이에 어떻게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첩보 활동을 했을까요? 무서웠을 거 같아요.

[기자]

네,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도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3년 동안, 전쟁 내내 첩보활동을 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인데요.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소녀 첩보원’ 이야기, 지금부터 들려 드리겠습니다.

[리포트]

잔잔한 수면 위로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습을 드러낸 인천의 바닷가.

아흔을 앞둔 민옥순 할머니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그리움에 잠깁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아휴, 언제나 저길 가 볼까. 동생들아 잘 있느냐. 난 이렇게 니들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난다."]

민 할머니의 고향은 바다만 건너면 바로 닿을 수 있는 황해도 연백입니다.

전쟁 이전엔 남한 땅이었지만, 이후엔 북한 땅이 됐습니다.

민 할머니는 6·25전쟁 발발 뒤 1·4후퇴 때 어머니와 동생 넷을 고향에 남겨두고 아버지, 오빠와 함께 강화도 교동으로 내려왔는데요.

오로지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에 시작한 첩보 활동.

그렇게 민 할머니는 열여덟 살에 ‘군번 없는 군인’이 됐습니다.

1951년 1월 창설된 이후 서해 도서 지역과 황해도 내륙 등지에서 기습 작전을 펼쳤던 ‘8240부대’. 민 할머니도 이곳 소속이었는데요.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사람 만나면 뭐 얘기 하지 마라. 뭐든지 물어보면 모른다 해라 어디서 왔냐, 몰라요, 몰라요 그냥 몰라야."]

한 달 정도 첩보 교육을 받은 뒤, 밤이 되면 민간인 복장으로 배를 타고 북한 개풍군 일대로 향했는데요.

방공호에 숨은 채로 인민군의 규모와 위치 등의 정보를 수집해 치마에 그려 돌아왔다고 그 시절을 회고합니다.

몸을 숨겨야 하는 과정에서 민 할머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는데요.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내 동생이 동네를 다 돌아다녀, 난 돌아다닐 수가 없잖아. 나 붙들리게. 우리 집 건너 건너집이 기와집인데 거기 인민군이 몇이 와서 있다 또 어디에 가니까 누구네 집에 인민군이 사람이 밖에 있다."]

민 할머니는 이런 어려움 속에 우리 군에 유리한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첩보 활동은 어떤 거 했어요?) 인민군이 어디가 있냐, 또 중공군이 언제쯤 어디에 있나 그런 거지."]

이렇게 목숨을 건 첩보 생활은 3년간 계속됐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은 북녘에 둔 가족을 잠깐 보는 게 다였지만, 민 할머니는 우리 군에 도움을 줬다는데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나 살기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한 거지. 한국을 위해서 한 거지. 난 후회도 하나도 없어."]

이후 71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소녀 첩보원으로 활동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고 또렷한데요.

민옥순 할머니는 이 시절을 함께 했던 남편과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역시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김청산 할아버지는 ‘8240부대’에서 민 할머니와 처음 만나 한평생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부대 선임하사였던 김 할아버지는 민 할머니를 보곤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김청산/93세/남편 : "좌우지간 구름에 붕 올라탄 거 같고 무지개 꼭대기에 올라탄 거 같고 그랬어. 그거 말할 수 없지. 아휴 뒤틀려."]

그렇게 연인으로 발전해 어려운 시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줬지만, 김 할아버지는 결혼한 후에야 민 할머니가 적진을 넘나든 사실을 알았습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누가 알고 나 이렇게 (탄로 나면) 어떡해. 말 퍼져 나가면 그럼 어떡해."]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우리 아버지가 엄마, 동생을 데리러간다 그러잖아. 그니까 아버지 들어가지 말아요. 중공군 바다에 깔려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네가 뭘 알아. 내가 그걸 해서 나왔으니까 난 단단히 알지."]

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건너간 아버지와는 그 뒤 생사도 모른 채 영영 이별하게 됐습니다.

끔찍했던 기억은 이게 끝이 아닌데요.

중공군 진지에 침투했다가 검문에 걸린 겁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나오다가 인민군한테 붙들렸지 총으로 탁 찍어. 여기 멀리서서 탁 찌르는데 어휴! 이랬어."]

천만다행으로 여성이라 풀려났지만, 같이 붙잡혔던 남성 첩보원은 두 번 다시 못 만났습니다.

아픈 기억들은 시간이 흘러도 명절 때만 되면 더욱 또렷이 되살아나는데요.

[한영주/59세/막내며느리 : "(큰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예요. 학교에서 6·25 돼서 글짓기 대회 이런 걸 했어요. 그런데 애가 거기서 그 글에 저희가 다 가슴 아팠던 게 글짓기의 첫 문장이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명절 때마다 우십니다, 첫 문장이."]

전쟁의 비극은 이렇게,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과 후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최근 민옥순 할머니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성 최초로 6.25 전쟁 비정규군 공로자로 인정받은 건데요.

소녀첩보원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국방부는 지난달 27일, 민 할머니를 포함한 여성 비정규군 16명을 공로자로 인정했습니다.

비정규군은 전쟁 기간 중 민간인 신분으로 첩보를 수집하거나 유격 활동 등에 참여한 사람을 말하는데요.

특히 여성이 6·25 비정규군 공로자로 인정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 의미가 큽니다.

여성은 휴전 이후 대부분 군 복무를 하지 않아 증빙이 어려워, 공로를 인정받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여기 보니까 신청인 민옥순을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서 비정규군 공로자로 인정함 이렇게 적혀 있네요."]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그때 생각하면 눈물밖에 나는 거 없어. 근데 인정을 해주는 구나 그래서 눈물 나."]

민 할머니 말고도 전쟁 당시 활약했던 여성 비정규군은 많았는데요.

실제 ‘8240’부대원 중 20%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정순분, 김정림이.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응. 다 죽었어. 이건 6.25 때 여기 나와서 전쟁했던 사람들 행사 때 나와서 반갑다고 같이 사진 찍은 거지. 몇 년 전에. 한 5년 되나봐."]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했던 민옥순 첩보원과 동료 소녀 첩보원들의 공로와 헌신이 70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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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71년 만에 인정…6·25 참전 ‘소녀 첩보원’
    • 입력 2022-08-27 08:17:57
    • 수정2022-09-03 08: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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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을 직접 겪고 기억하는 세대는 이제 일흔 중반 이상의 나이가 되셨을 텐데요.

그 치열했던 6.25 전쟁통에 적진에 몰래 들어가 첩보 활동을 펼쳤던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네, 군번 없는 군인이었던 이분들에게 최근 기쁜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6.25전쟁에 참전한 공로를 71년 만에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하영 리포터, 그 중 한 분을 직접 만나고 오셨죠?

[기자]

네, 인천 강화군에 사시는 민옥순 할머니를 뵙고 왔는데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나섰던 첩보원 활동을 이제라도 인정받아 다행이라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앵커]

10대 나이에 어떻게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첩보 활동을 했을까요? 무서웠을 거 같아요.

[기자]

네,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도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3년 동안, 전쟁 내내 첩보활동을 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인데요.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소녀 첩보원’ 이야기, 지금부터 들려 드리겠습니다.

[리포트]

잔잔한 수면 위로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습을 드러낸 인천의 바닷가.

아흔을 앞둔 민옥순 할머니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그리움에 잠깁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아휴, 언제나 저길 가 볼까. 동생들아 잘 있느냐. 난 이렇게 니들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난다."]

민 할머니의 고향은 바다만 건너면 바로 닿을 수 있는 황해도 연백입니다.

전쟁 이전엔 남한 땅이었지만, 이후엔 북한 땅이 됐습니다.

민 할머니는 6·25전쟁 발발 뒤 1·4후퇴 때 어머니와 동생 넷을 고향에 남겨두고 아버지, 오빠와 함께 강화도 교동으로 내려왔는데요.

오로지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에 시작한 첩보 활동.

그렇게 민 할머니는 열여덟 살에 ‘군번 없는 군인’이 됐습니다.

1951년 1월 창설된 이후 서해 도서 지역과 황해도 내륙 등지에서 기습 작전을 펼쳤던 ‘8240부대’. 민 할머니도 이곳 소속이었는데요.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사람 만나면 뭐 얘기 하지 마라. 뭐든지 물어보면 모른다 해라 어디서 왔냐, 몰라요, 몰라요 그냥 몰라야."]

한 달 정도 첩보 교육을 받은 뒤, 밤이 되면 민간인 복장으로 배를 타고 북한 개풍군 일대로 향했는데요.

방공호에 숨은 채로 인민군의 규모와 위치 등의 정보를 수집해 치마에 그려 돌아왔다고 그 시절을 회고합니다.

몸을 숨겨야 하는 과정에서 민 할머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는데요.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내 동생이 동네를 다 돌아다녀, 난 돌아다닐 수가 없잖아. 나 붙들리게. 우리 집 건너 건너집이 기와집인데 거기 인민군이 몇이 와서 있다 또 어디에 가니까 누구네 집에 인민군이 사람이 밖에 있다."]

민 할머니는 이런 어려움 속에 우리 군에 유리한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첩보 활동은 어떤 거 했어요?) 인민군이 어디가 있냐, 또 중공군이 언제쯤 어디에 있나 그런 거지."]

이렇게 목숨을 건 첩보 생활은 3년간 계속됐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은 북녘에 둔 가족을 잠깐 보는 게 다였지만, 민 할머니는 우리 군에 도움을 줬다는데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나 살기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한 거지. 한국을 위해서 한 거지. 난 후회도 하나도 없어."]

이후 71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소녀 첩보원으로 활동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고 또렷한데요.

민옥순 할머니는 이 시절을 함께 했던 남편과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역시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김청산 할아버지는 ‘8240부대’에서 민 할머니와 처음 만나 한평생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부대 선임하사였던 김 할아버지는 민 할머니를 보곤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김청산/93세/남편 : "좌우지간 구름에 붕 올라탄 거 같고 무지개 꼭대기에 올라탄 거 같고 그랬어. 그거 말할 수 없지. 아휴 뒤틀려."]

그렇게 연인으로 발전해 어려운 시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줬지만, 김 할아버지는 결혼한 후에야 민 할머니가 적진을 넘나든 사실을 알았습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누가 알고 나 이렇게 (탄로 나면) 어떡해. 말 퍼져 나가면 그럼 어떡해."]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우리 아버지가 엄마, 동생을 데리러간다 그러잖아. 그니까 아버지 들어가지 말아요. 중공군 바다에 깔려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네가 뭘 알아. 내가 그걸 해서 나왔으니까 난 단단히 알지."]

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건너간 아버지와는 그 뒤 생사도 모른 채 영영 이별하게 됐습니다.

끔찍했던 기억은 이게 끝이 아닌데요.

중공군 진지에 침투했다가 검문에 걸린 겁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나오다가 인민군한테 붙들렸지 총으로 탁 찍어. 여기 멀리서서 탁 찌르는데 어휴! 이랬어."]

천만다행으로 여성이라 풀려났지만, 같이 붙잡혔던 남성 첩보원은 두 번 다시 못 만났습니다.

아픈 기억들은 시간이 흘러도 명절 때만 되면 더욱 또렷이 되살아나는데요.

[한영주/59세/막내며느리 : "(큰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예요. 학교에서 6·25 돼서 글짓기 대회 이런 걸 했어요. 그런데 애가 거기서 그 글에 저희가 다 가슴 아팠던 게 글짓기의 첫 문장이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명절 때마다 우십니다, 첫 문장이."]

전쟁의 비극은 이렇게,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과 후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최근 민옥순 할머니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성 최초로 6.25 전쟁 비정규군 공로자로 인정받은 건데요.

소녀첩보원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국방부는 지난달 27일, 민 할머니를 포함한 여성 비정규군 16명을 공로자로 인정했습니다.

비정규군은 전쟁 기간 중 민간인 신분으로 첩보를 수집하거나 유격 활동 등에 참여한 사람을 말하는데요.

특히 여성이 6·25 비정규군 공로자로 인정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 의미가 큽니다.

여성은 휴전 이후 대부분 군 복무를 하지 않아 증빙이 어려워, 공로를 인정받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여기 보니까 신청인 민옥순을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서 비정규군 공로자로 인정함 이렇게 적혀 있네요."]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그때 생각하면 눈물밖에 나는 거 없어. 근데 인정을 해주는 구나 그래서 눈물 나."]

민 할머니 말고도 전쟁 당시 활약했던 여성 비정규군은 많았는데요.

실제 ‘8240’부대원 중 20%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민옥순/89세/6·25전쟁 비정규군 공로자 : "정순분, 김정림이.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응. 다 죽었어. 이건 6.25 때 여기 나와서 전쟁했던 사람들 행사 때 나와서 반갑다고 같이 사진 찍은 거지. 몇 년 전에. 한 5년 되나봐."]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했던 민옥순 첩보원과 동료 소녀 첩보원들의 공로와 헌신이 70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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